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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전 남간정사(南澗精舍)의 봄
    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15. 4. 8. 22:56

     

     

    남간정사(南澗精舍)는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을만큼 아름답기도 하고 건축사적 의미가 있는 건물이다.

    남간은 주자의 시에서 왔다는 운곡남간(雲谷南澗)의 준말이라는데 양지쪽 산골짜기 개울물 정도의 뜻이니 뒤편 고봉산에서 흘러내리고 있다.

    이 정사에서 우암은 유림과 제자들을 모아 학문을 강학했고 그의 사후에는 제자들이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목판으로 새긴 곳이다.

    정조 임금이 서인과 노론의 영수이던 우암을 존숭하여 송자라 하였고 그의 글을 모아 발간한 책이 송자대전이다.

    보수가 끝나 새 건물 같은 남간정사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소제동 방죽 옆에 구기자와 국화를 심었던 기국정(杞菊亭)을 옮겨온이다. 

    회덕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동춘당 송준길(1606~1672)과 우암 송시열(1607~1689)을 들 수 있다. 흔히 이 두 사람을 양송(兩宋)이라 하는데, 송준길의 제자 제월당 송규렴(1630~1709)을 더해서 삼송(三宋)이라고도 한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동문수학했던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송준길의 동춘당, 송시열의 남간정사, 송규렴의 옥류각은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을 대표한다.

     

     

     

     

     

     

     

     

    대전 가양동 우암사적공원 내

    .월류정  http://ktk84378837.tistory.com/1707 http://ktk84378837.tistory.com/4344 이지당 http://ktk84378837.tistory.com/1845

    남간정사 http://ktk84378837.tistory.com/4417 http://ktk84378837.tistory.com/407 http://ktk84378837.tistory.com/6411화양서원 http://ktk84378837.tistory.com/3060 송시열유허비 http://ktk84378837.tistory.com/1068

    동춘당 http://ktk84378837.tistory.com/408 http://ktk84378837.tistory.com/1907

     

     

    雲谷南澗 / 朱子

     

    危石下崢嶸 [위석하쟁영] 위태로운 돌 가파르고 험하게 아래로 향하고

    高林上蒼翠 [고림상창취] 높은 산의 숲 푸르고 푸르게 위로 솟았구나

    中有橫飛泉 [중유횡비천] 가운데 가로질러 나는 듯 흐르는 샘이 있으니

    崩奔雜綺麗 [붕분잡기려] 무너지듯 섞이는 모습이 기이하게 아름다워라

     

    *주자의 운곡이십육영 중 '운곡남간'을 주련으로 삼았다.

     

     

     물 흐르는 것처럼 생각과 철학도 자연스럽게 남간정사연못의 왕버들  / 고규홍(나무칼럼리스트)

     

     

    머물고 싶도록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면, 그곳에 집을 짓고, 삶의 터전을 잡았던 옛 사람들은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되 자연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만끽했다흐르는 물 위의 대청마루에 앉아 물소리, 바람소리를 맞으며, 자연이 펼쳐내는 풍요와 기품을 닮아갔던 옛 선비들의 삶을 새삼 그리워하게 되는 풍경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은 노론(老論) 최고 영수로서의 지위를 누리다가 말년에 벼슬살이를 접고당시 은진송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던 대전의 회덕 지역에 남간정사(南澗精舍)’라는 이름의 서당을 짓는다. 3백여 년 전인 1683년의 일이다. 일생을 학문과 함께 살았던 그가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나이에 생의 마지막 과업으로 선택한 일은 역시 후학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서당을 지은 건 그 과업을 완수하기 위한 첫 작업이었다. 그는 이전에도 대전 근교에 비래암, 능인암과 같은 서재를 겸한 강학(講學) 장소를 세웠지만이곳 남간정사는 특별히 서재의 기능을 배제하고, 순전히 후학 양성을 위한 장소로 지었다. 온전히 후학 양성에만 매진하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무릇 모든 옛 선비들이 그러했듯, 그도 자신의 마지막 서당인 남간정사에 조선 성리학의 중심인 자연주의 사상을 고스란히 담아내고자 애썼다집 뒤편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시내 위에 자연스럽게 집을 앉힌 건 수맥(水脈) 위에 건물을 짓지 않는 우리 풍습과 사뭇 다른 점이다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려 기둥을 높직하니 세우고, 그 위에 대청을 얹었다

    대청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은 집의 동편에서 흘러드는 또 하나의 작은 개울물과 마루 밑에서 만나 연못을 이루었다집 주위로 흐르는 물을 그냥 흐르게 두면 집안의 기()와 부()가 새어나가기 때문에 연못을 만들어야 한다는 옛 사람들의 생각을 염두에 둔 배치다.

    그러나 남간정사의 연못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착각할 만큼 극히 자연스럽다. 집과 원림(園林)의 조화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라 아니할 수 없다연못 가운데에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을 상징하기 위한 인공 섬을 쌓았고, 그 위에 한 그루의 왕버들이 크게 자랐다왕버들은 연못 가운데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연못 속에서까지도 잘 자랄 만큼 물과 친한 나무다.

    조선 숙종 대에 조성한 경북 청송의 주산지 안에서 우람하게 자라고 있는 30여 그루의 나무들이 그 예가 될 것이다왕버들은 연못 안의 섬에서 자라는 나무로서 더없이 알맞춤한 나무다연못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연못 가운데 섬에 배롱나무처럼 화려한 나무를 심기도 하지만, 남간정사는 인공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연못에서 자연스럽게 자랄 수 있는 나무를 선택했다.

    연못 가장자리에서도 커다란 한 그루의 왕버들을 찾아볼 수 있다. 눈대중으로 나이가 2백 살은 훨씬 넘어 보인다수평으로 길게 뻗은 왕버들의 가지는 대청마루 위 지붕에까지 닿았다무성하게 자라난 나무의 가지와 잎사귀에 덮여 정갈한 분위기의 남간정사가 외려 답답해 보이기까지 한다.

    독특한 구조의 남간정사가 답답해 보이는 것은 사실 나무 때문은 아니다송시열 사후에 쌓아올린 집 좌우의 돌담과 솟을대문은 무성한 나뭇가지가 자연스레 이뤄주게 된 집의 경계를 한 겹 덧대는 결과가 돼결국 남간정사를 왜소하고 답답하게 갇힌 꼴로 만든 것이다.

    또 남간정사의 풍광이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바깥에서 이 집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관점이다서당 안에서 글공부하는 유생(儒生)들의 입장에서 보면 생각은 달라진다대청마루에 앉아 글공부를 하던 유생들이 잠시 눈 들어 바깥을 내다볼 때, 가장 먼저 나무의 푸르름이 눈 앞에 나선다대청마루 지붕 위까지 드리운 나무는 자연스레 서당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시야의 자연스러운 프레임이 된다.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한결 운치가 높아진다. 그게 남간정사를 짓고 가꾸어온 사람들의 뜻이다우리 옛 건축물은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사람의 시야를 기준으로 했다는 점을 놓고 보면, 남간정사의 건축과 자연의 조화는 절묘하다 할 만하다

    그런데 몇해 전 대전시에서 남간정사의 풍광이 답답하다는 이유로 연못 왕버들의 가지를 무자비하게 쳐냈다옛 사람들의 생각을 고려하지 않고, 이 집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시선만을 중시한 처사였다. 물론 지금 남간정사에서 글공부하는 학생은 없다하지만, 건축물을 보전할 때에는 그 건축물을 지은 사람의 처음 정신까지 함께 보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이 크다.

    연못가의 왕버들과 이웃하여 왕벚나무와 말채나무가 자리잡았다. 화려한 아름다움보다 자연의 질박미를 선택한 조경이 눈에 뜨이는 집이지만꽤 큰 몸피로 자라난 다른 나무들은 봄볕 따스하게 피어오르는 날들에 이 집 분위기를 화사하게 수놓을 것이다바로 곁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 건너편으로는 모과나무 한 그루가 잎을 떨구고 나무 특유의 붉은 얼룩을 가진 매끈한 줄기를 드러냈다.

    그 옆, 송시열의 별당이었던 기국정(杞菊亭) 지붕 위로 가지를 뻗어올린 한 그루의 소나무도 이 집의 분위기를 한층 돋우는 나무다이쯤 되면, 물과 집과 나무의 조화는 완벽의 경지를 이루게 되는 셈이다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자연의 화려한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연못의 왕버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무들은 남간정사가 세워진 뒤, 이 집을 관리하면서 차츰 심은 나무로 생각된다현재의 나무 크기로 보아, 4백 살이 채 안 돼 보이기 때문에 그런 추측은 가능하다. 이 집 안에서 송시열이 직접 심은 유일한 나무 한 그루를 찾아볼 수 있다배롱나무다. 남간정사 안으로 난 작은 쪽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만나게 되는 나무인데, 안타깝게도 이 배롱나무는 수세(樹勢)가 무척 안 좋다.

    아직 살아 있기는 하지만, 가까스로 연명하고 있는 형편이다. 머물고 싶도록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면, 그곳에 집을 짓고삶의 터전을 잡았던 옛 사람들은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되 자연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만끽했다흐르는 물 위의 대청마루에 앉아 물소리, 바람소리를 맞으며, 자연이 펼쳐내는 풍요와 기품을 닮아갔던 옛 선비들의 삶을 새삼 그리워하게 되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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