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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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현을 배향한 논산 죽림서원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11. 9. 13. 20:07
죽림서원(竹林書院)은 6현(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을 배향하였다. 육현서원으로 불리기도 한다. 당시 공주목에 속하였던 논산은 서인계, 또는 노론계의 일색이었다. 영남학파인 조광조와 이황, 기호학파의 거유인 노·소론의 이이와 성혼, 노론의 조종(祖宗)인 김장생과 송시열이 함께 제향되어 있어 매우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임리정(臨履亭)은 재야학자인 사계 김장생이 건축하여 후학을 가르치던 학당이다. 용강서원 http://ktk84378837.tistory.com/2538 죽림서원 http://ktk84378837.tistory.com/541 화양서원 http://ktk84378837.tistory.com/3060 사계 김장생의 돈암서원 http://ktk84378837.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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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송시열유허비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10. 9. 20. 20:02
유허비의 전면과 후면 우암 송시열이 태어나고부터 26세까지 보낸 이원면 구룡리 외가에 정조2년 1778년 세워진 유허비. 노론의 영수로 효종의 북벌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현종때 좌의정에 올랐다. 숙종 때 세자책봉에 반대하다 제주로 귀양을 갔다가 신문을 받기 위해 돌아오다 남인의 책동으로 정읍에서 암살당했다. 송시열유허비 옆에 충신 곽자방의 비각이 있다. 곽자방은 임란 때 의병장 조헌 휘하에서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웠으나 금산전투에서 희생되었다. 우암 송시열유허비와 한자리에 있는 곽자방은 외가인 선산곽씨 인물이다. 우암 송시열의 부친인 睡翁 송갑조가 살던 집터에 세워진 유기비. 우암 송시열은 아버지 집인 이곳에서 태어나 유허비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하여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사유재산 이용에 장애가 많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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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님도 쉬어넘는 월류봉(月留峰)-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10. 2. 5. 18:31
월류정 http://ktk84378837.tistory.com/1707 http://ktk84378837.tistory.com/4344하늘을 찌를듯한 월류봉과 선녀처럼 단아하게 서 있는 월류정이다. 한천정사에서 우러러 보면 달이 머물다 갈 수 밖에 없는 절경이다. 한천(寒泉) 냇가에 서재를 지어 글을 가르친 우암(尤庵)이 부럽기 짝없다. 후세에 우암을 기리는 한천서원이 세워졌다가 대원군 때 철폐되고, 1910년에 한천정사(寒泉精舍)를 건립하였다.(안내문은 띄어쓰기가 엉망이다.) 당대 우암의 세력이 어찌나 컸는지 조선 반도 구석구석 풍광 좋다는 곳에는 그의 서재는 물론 그를 기리는 유허비가 서 있다. 우암이 충북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 외가에서 출생한 회덕 은진송씨이니 이 지역은 물론이요, 대전 가양동에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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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동(靜中動)심상 image 2009. 10. 27. 21:26
동학사. 동학사 https://ktk84378837.tistory.com/1789 노론-소론의 분리가 된 회니시비(懷尼是非, 1665)는 가을 동학사에서 있었다.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숙종 때 사제 관계에 있었던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의 불화 때문에 그들의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분쟁으로,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지게 한 사건이다. 숙종조에 충청도 회덕(懷德)에 살았던 저명한 우암(尤庵) 송시열과 그의 제자로서 이산(尼山)에 살았던 명재(明齋) 윤증은 여러 가지 일로 불화를 빚었다. 그들의 사사로운 불화는 1684년(숙종 10) 4월에 송시열의 제자 최신(崔愼)이 조정에 윤증을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국가 차원의 정치적 분쟁이 되었다. 두 사람의 제자들은 각기 스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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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화양서원(華陽書院)과 운영담(雲影潭)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08. 6. 11. 15:18
화양서원(華陽書院). 우암 선생사후 7년 뒤인 1696년(숙종 22) 권상하, 정호 등이 청천면 도원리 침류정 아래 만경대에 건립하였다. 창건되던 해 바로 사액되고, 1716년에는 어필로 편액을 달았다. 1704년 만동묘 건립후 왕래불편과 서원수호의 이유로 1709년 겨울 만동묘 옆으로 이전하였다. 조선후기 노론사림의 본거지이자 중앙정치의 중심이었으며, 18세기 정치 및 학문의 중심이었다. 후에 '華陽墨牌'의 폐단등으로 1858년(철종 9)에 복주촌이 폐쇄되고, 1871.03.16(고종 8)모든 건물이 헐리고 묘정비는 땅에 묻히게 되었다. 2002~2004년까지 남아있는 초석 위에 송자사, 숭삼문을 복원하였다. 화양동에 은거하기 시작한 우암 송시열이 지은 화양서원과 그 맞은 편의 암서재(巖棲齋)는 당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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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상팔담 가는 길문화 culture/해외 foreign travel 2007. 9. 16. 14:06
만물상(萬物相), 만물상은 하늘을 찌를 듯한 거암(巨巖)들이 난립하여 천태만상을 이루고 있다. 이들이 모두 숭고하고 신비한 인상을 주는 것은 흰색의 화강암의 절리(節理) 때문이다. 화강암은 지하 깊은 곳에 있던 마그마가 서서히 식어서 형성된 것으로, 오랜 시간 풍화와 침식을 통해 지표상에 드러나는데 화강암에 발달하는 서로 교차하는 수직 및 수평절리로 인해 만물상과 같은 기암괴석이 만들어지고, 주변 풍광과 어우러져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룬다. 구룡연 위를 흐르는 상8담(上八潭). 물줄기가 천 년 만 년 흐르면서 여덟 개의 바위연못을 만들어앴다. 금강산의 팔담은 구룡동 웃골에 있기 때문에 묘향산 만폭동(萬瀑洞)의 팔담과 구별하기 위해 상팔담이라 부르기도 한다. 팔담은 우리나라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가 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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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호텔문화 culture/해외 foreign travel 2007. 9. 16. 13:48
남북이산가족 상봉장소로 언론에서 자주 보아온 금강산호텔. 남북회담 때도 사용되었다. 온정각에는 이외에도 외금강호텔, 호텔 해금강, 금강패밀리비치호텔이 있다. 접대원 김남희동무가 카메라에 깜짝 놀라 당황해하는 모습 호텔연회장에서 관람객을 위해 연주하는 악단원 로비에는 남한관광객을 위해 필리핀 가수도 초청해 연주를 한다. 금강산 비룡폭포 http://ktk84378837.tistory.com/3781 금강산호텔 http://ktk84378837.tistory.com/3782 금강산 가는길 http://ktk84378837.tistory.com/3783 구룡폭포 가는길 http://ktk84378837.tistory.com/3780 상팔담 가는 길 http://ktk84378837.tistory.com/3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