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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전 박팽년유허비
    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16. 2. 25. 21:55

     

     

     

    우암사적공원 바로 아래 우암로 326번길 28.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 기념물1호.

    대전기념물 제5호 김익희 묘소 http://ktk84378837.tistory.com/6768 대전기념물 제10호 보문산성 http://ktk84378837.tistory.com/3567 http://ktk84378837.tistory.com/5488 

    대전문화재자료 제7호 김반 김익겸묘소 http://ktk84378837.tistory.com/6585 대전문화재자료 제8호 창계 숭절사 http://ktk84378837.tistory.com/6456 

    대전문화재자료 제8호 박팽년유허비 http://ktk84378837.tistory.com/7150 대전문화재자료 제37호 관동묘려 http://ktk84378837.tistory.com/6769

    대전유형문화재 제4호 남간정사 http://ktk84378837.tistory.com/6411 유형문화재19호 보문산마애여래좌상 http://ktk84378837.tistory.com/6407

     사적 제355호 계족산성 http://ktk84378837.tistory.com/2496 http://ktk84378837.tistory.com/4007 

    박팽년은 회덕현 흥농촌 왕댓벌(더퍼리) 출신으로 자를 인수(仁叟), 호를 취금헌(醉琴軒)이라 하고,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이곳 유허비에 본관이 평양으로 나오는데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순천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시조가 박영규라 하니 평양은 지금의 순천이다.  

    그는 집현전 학사 가운데 경술(經術)과 문장·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특히 필법에 뛰어나 남북조시대의 종유(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버금간다 하였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김질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추진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무산되어 참화를 입었다.

    사육신의 기원은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秋江集)』에서 사육신전(死六臣傳)을 논한 이후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유응부가 아닌 군동원책임을 맡은 김문기가 주모자 6인에 들어갔다. 

    우암 송시열도 그의 <송자대전>에서 '선생이 죄에 걸려 멸족(滅族)을 당하였지만, 세조대왕은 일찍이 “박모(朴某)는 만세(萬世)의 충신(忠臣)이다.”

    하였으니, 이야말로 반드시 귀히 되고 현달하고 번성한 다른 집안과 또 비교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이 보첩은 귀히 되고 현달하고 번성한 것까지 겸하였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나는 선생의 한 고을 사람인 것만으로도 선생이 남긴 훌륭한 덕을 입었다'고 하였다.

    중리동에 있는 쌍청당은 세종 14년(1432년) 은진 송씨의중시조인 유학자 송유宋愉가 건축을 하고,  

    박연朴堧이 이름을 지은 쌍청당(雙淸=淸風+霽月, 유형문화재 제2호)의 당기(堂記)는 박팽년이 썼다.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리의 육신사(六臣祠)는 박팽년을 모신 사당이다묘골은 순천박씨 박팽년의 후손 충정공파(忠正公派)의 세거지 마을이다.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박일산(朴日珊)은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99칸 종택을 짓고 묘골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박팽년의 후손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둘째 아들 박순(朴詢)의 처인 둘째 며느리 성주이씨 부인의 유복자(遺腹子) 때문이었다. 

    단종의 복위를 위하여 죽은 사육신처럼 비록 칼 아래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평생을 오직 한 마음, 절개를 지켜 살다가 죽은 사람이 또한 여섯 사람인데, 후세에 그들을 사육신에 비기어 생육신이라 하였다.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 원호(元昊), 조려(趙旅) 등을 말한다.

    대구 묘골 박팽년 후손집성지 https://blog.naver.com/sty5859/222556010406 김문기 https://ktk84378837.tistory.com/7179

    마지막으로 세조가 회유하려 태종이 포은 정몽주에게 건넸던 하여가를 내밀자 박팽년이 답을 했다.

    까마귀 눈 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이어서 성삼문이 답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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