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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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심상 image 2013. 12. 24. 09:42
보문산. 솟대 / 마경덕 어쩌다 드넓은 허공의 배경이 되었을까 공중은 그를 거부하고 그는 정물이 되었다 머리위로 흘러가는 구름은 인질로 잡힌 적이 없다 입체적인 하늘은 구름과 새 떼를 날려 여백을 채우고 노을을 풀어 허공을 채색한다 지루한 허공은 여러 장의 배경이 필요하다 볼모야, 볼모야 지나가던 바람이 그를 놀린다 붙박이 나무새, 평생 하늘로 머리를 둔 나무의 유언이 저곳에 매달렸다 나무의 친족인 목수木手는 새를 빚어 하늘 가까운 곳으로 죽은 나무를 올려 보냈다 생전의 기억으로 잠시 나무 끝이 축축하다 바람이 달려와 울음을 지우고 벙어리새는 다시 정물로 돌아간다 계간 『착각의 시학』 2013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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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 내마음심상 image 2013. 12. 16. 15:55
우암사적공원. 내 마음은 / 김동명 내 마음은 호수(湖水)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 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라.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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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심상 image 2013. 12. 16. 15:13
아스팔트에서 유리창에서 거리에서 노숙 / 이영종 열차와 멧돼지가 우연히 부딪쳐 죽을 일은 흔치 않으므로 호남선 개태사역 부근에서 멧돼지 한 마리가 열차에 뛰어들었다는 기사를 나는 믿기로 했다 오늘밤 내가 떨지 않기 위해 덮을 일간지 몇 장도 실은 숲에 사는 나무를 얇게 저며 만든 것 활자처럼 빽빽하게 개체수를 늘려온 멧돼지를 탓할 수는 없다 동면에 들어간 나무뿌리를 주둥이로 캐다가 홀쭉해지는 새끼들의 아랫배를 혀로 핥다가 밤 열차를 타면 도토리 몇 자루 등에 지고 올 수 있으리라 멧돼지는 믿었던 것이다 사고가 난 지점은 옛날에 간이역이 서 있던 자리 화물칸이라도 얻어 타려고 했을까 멧돼지는 오랫동안 예민한 후각으로 역무원의 깃발 냄새를 맡아왔던 것일까 역무원의 깃발이 사라진 최초의 지점에 고속철도가 놓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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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선의 꿈일까심상 image 2013. 12. 16. 14:36
구룡포. 펄덕이는 물고기처럼 / 김종제 동해 바닷가에 산다는 용왕 친견하러 가는 길에 구룡포 어부의 물고기를 본 적 있다 처음 맞이하는 외출처럼 生이라는 것에 부딪혀 온몸을 펄덕이고 싶었을 것이다 무덤에 드러누운 것이 아니라고 갑옷 같은 비늘까지 뽑아가며 뚝뚝, 피 흘리는 생생한 살을 보여 주고 있다 감옥에 갇히기 전에 비상하게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물고기가 물속에서는 물처럼 한없이 부드럽게 살았다고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탁탁, 바닥을 때리면서 결코 그대에게 굴복하지 않겠다고 몸을 뒤집으며 다시 한 번 뛰쳐 올라 푸른 세상으로 달려들고 있는 물고기를 닮은 내가 물살을 헤치며 걸어가고 있다 마지막 역이 곧 다가온다고 힘차게 뛰어 달려가면서 내 속의 그물을 던진 어부와 한 판 승부를 겨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