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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주 용화사 龍華寺
    문화 culture/불교문화 Buddhist culture 2021. 10. 19. 21:20

    금강역사의 도움을 받아 용화지문(龍華之門)을 들어선다. 청주 사직동 도심을 관통하는 무심천변에 용화사(龍華寺)라는 사찰이 있다. 용화수는 뽕나뭇과의 보리수(무우수, 무우화수, 나가수)라고 하는데 석가모니는 이 나무 아래서 꺠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태국의 식물3 방콕(Bangkok) :: 시사랑꽃사랑 (tistory.com)

     

    범종과 법고

    범종의 용두

    용화지문의 안쪽에서 보면 범종각이다. 용머리를 가진 목어가 타오르는 불꽃 위에 파란 비늘을 번쩍인다.

     

    좌로부터 약사여래불, 미륵불, 석가여래불.

    용화사 법당 상량문(上樑文:건축공사의 시작과 끝, 참여자의 이름을 기록한 글)에 의하면 이곳은 1902년에 만든 절로, 엄비(嚴妃)의 꿈에 청주에서 7구의 석불이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자, 사람을 보내어 청주 서북쪽의 냇가에서 이들 석불을 발견하였다는 유래가 있다. 그리하여 용화사를 세우고 미륵보전에 7구의 석불을 모시게 된 것이다

    5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되어있는 석불들은 모두 거대한 불상이라는 점이 주목되는데 최고 5.5m, 최저 1.4m이다. 이들 중 왼쪽 3번째의 불상은 머리 위에 솟아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크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신체는 전체적으로 양감이 풍부하며 가슴 부위에 자가 양각되어 있다. 왼쪽 5번째 불상은 독특한 옷주름이 있고, 뒷면에는 거대한 나한상(羅漢像)이 조각되었는데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머리 부분과 양 손을 나중에 보수한 석조여래입상은 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한 것이 특징이다.

    7구의 불상들은 모두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 입상과 좌상으로 얼굴과 세부기법, 특히 옷주름 표현과 손모양 등을 감안할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보물 청주 용화사 석조불상군 (淸州 龍華寺 石造佛像群) | 국가문화유산포탈 | 문화재 검색 (heritage.go.kr)

     

    우물천장

    불탱

    석가여래불

    높이 3.3m의 유등보살

     용화보전 7존 석불상군은 냇가에 방치되어 있던 것이라 보존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보물 제98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시대 석불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기 떄문이 아닐까 한다. 연산 개태사 삼존석불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석불 좌는 약사여래불, 중은 미륵불이며 최대5.5m로 가장 크다. 우가 석가여래불인데 불전 뒤로 돌아들어가면 멋진 장면을 볼 수 있다. 석가여래불의 뒷면이 유동보살이란 이름으로 화환에 둘러쌓여 있다. 2면석불인 셈이다. 유동보살 좌우로 문수전과 관음전이 펼쳐진다. 

     

    불사리4사자법륜탑(佛舍利四獅子法輪塔)은 팔각오층석탑이다. 법륜이 특이하게 보인다. 통영 용화사에는 원주형 불사리4사자법륜탑이 있다.

     

    독성각(獨聖閣), 산신각, 칠성각(七星閣)을 함께 모신 삼성각

     

    스님들의 수행공간인 적묵당(寂黙堂)

     

    극락전 삼존불 좌측에 유마거사상과 미상불이, 우측에 미상불과 입상의 미륵불이 위치하고 있다. 신자 한 분이 불경을 외면서 백팔배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

     

    종무소와 충북불교회관

    청주시 서원구 무심서로 565 (사직동)에 용화사가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 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1992년 국립청주박물관이 옛 절터인 이곳 용화사 부근에서 발굴한 청동반자의 명문 판독결과 고려 후기에 큰 사찰이었던 사뇌사(思惱寺)라 밝혀짐으로써 용화사가 무구한 역사의 고찰이라는 것이 확인되어졌다. 사뇌사는 신라 말이나 고려시대 초에 창건된 대찰로 일부 학계에서는 몽고의 4차 침입 때 유물들이 매몰한 것으로 추정한다. 일설에는 삼국통일의 의지가 태동하던 선덕여왕대에 미륵불 7본존을 중심으로 70칸 규모의 사찰로 창건되어 신라 화랑들의 심신 단련과 군사들의 충성을 맹세하는 도량으로 활용되기도 하다가 이후 여러 차례의 병화(兵火)로 법당은 소실되었으며, 미륵불은 대홍수로 무심천에 묻혔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그러나 용화사의 사적(1933년 10월에 기록한 법당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광무 6년(1902)3월 14일 고종의 후궁인 엄비 (嚴妃)의 명에 의해 청주 지주 이희복이 창건했다. 이에 관련한 전설을 소개하자면, 엄비는 1901년 어느 날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천지가 요동하는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가자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피어오르면서 일곱 선녀의 부축을 받고 나타난 미륵은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으니 큰절을 지어 우리를 구해달라’고 간청하며, 이와 같은 사정을 청주군 지주에게 물어보라 말한 뒤 서쪽 하늘로 사라졌다.

     이에 엄비는 고종에게 고하여 청주군 지주에게 어명을 내리고 조사하도록 하였다. 같은 시각 청주군 지주 이희복도 같은 내용의 꿈을 꾸었다. 3일 후 어명을 받은 이희복은 자신의 꿈이 엄비의 꿈과 일치한 것을 알고 필시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하여 사람들을 서쪽으로 보냈다. 과연 그 곳에 가니 큰 늪이 있었으며, 이희복은 늪의 물을 퍼내고 보니 그 곳에 칠존의 석불이 묻혀있었다. 그 일이 어명과 부합되는 일이라 상고하니 엄비는 너무나 신기하고 기뻐서 내탕금을 내려 그곳을 정비, 사찰을 짓고, 일곱 부처를 안치토록 했다. 
    이에 이희복은 상당산성 안에 있던 보국사(輔國寺)를 이곳으로 옮기고 용화사(龍華寺)라 했다.
    용화사라고 한 것은 미륵불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설법도생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용화사의 창건 당시 사찰규모는 미륵전 15칸, 산신각 칠성각 3칸, 설교전 15칸, 행랑 4칸의 비교적 큰 규모였다.
    이후 1935년 화재로 불타버리자 김원근(金元根)거사가 당시 충북도청부속건물인 선화당(宣化堂)을 매입, 이곳에 옮겨 법당 등으로 사용케 하였다. 

    6·25전쟁때 법당이 완전히 소실되는 바람에 칠존 석불도 노천에 방치되었다가 1972년 비구니 오동림(吳東林)과 신도들이 콘크리트 법당인 미륵보전을 새로 지어 안치했다. 1976년 12월 26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후 조각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인정받아 1989년 4월10일 보물 제985호로 승격된 이들 석불상군은 월탄스님이 목조건물인 용화보전 불사를 1995년 준공해 이곳에 봉안해 오고 있으며 2007년5월 용화보전 보현보살 석불을 봉안 2007년 8월부터 극락전 신축 불사중에 있다.

     청주의 중심도량인 용화사는 수행과 포교의 구심점으로 신행단체를 재조직 개편하여 활성화하고 청주시민의 참여와 지역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는 데 노력하고 있으며, 도내 사찰 중 가장 먼저 충북불교대학을 개설, 동문회활성화 그 외 많은 산하단체를 설립함으로서 많은 시민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 확대와 더불어 도심속의 열린 도량으로 도약하고 있다. - 용화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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