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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산 명재고택(明齋古宅)-
    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10. 10. 25. 17:20

     

    윤증 [尹拯, 1629~1714]은 호를 명재(明齋)·유봉(酉峰)이라 한다.

    디지탈논산문화대전 http://nonsan.grandculture.net/Contents/Index에 소개된 윤증은 이런 사람이다.

    [활동사항]

    효종(孝宗)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663년(현종 4) 35세에 내시교관에 제수되었다.

    이후 공조랑·사헌부지평에 잇달아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숙종(肅宗) 때는별유(別諭: 임금이 내린 특별한 유지)를 내려 부르기도 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82년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의 주목받는 활동은 예송 논쟁 및 송시열(宋時烈)과의 갈등 대립 및 당파의 분파일 것이다.

    예송 사건이 당파와 연계되면서 윤증과 윤선거는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을 때,

    송시열을 지지하는 쪽이 노론이 되고 윤증을 지지하는 쪽이 소론이 되었다.

    윤증은 아버지가 죽은 지 4년 뒤 송시열에게 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그 때 송시열은 묘지명을 짓되 내용은 고쳐 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송시열의 인격을 의심하게 되어 사제간의 의리마저 끊어졌다.

    윤증은 53세 이후 무실(務實)과 실심(實心)을 강조하며

    송시열의 명분주의와 일정한 선을 긋는 데서 학풍의 변모를 보였다.

    성리학의 기본 틀은 율곡과 함께 하면서도 성리의 사변적 탐구보다는

    유학 본래의 자기 수양과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 자신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학문)을 지향하며,

    이론보다는 실천,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시하는 무실학풍을 연 것이다.

     

    [학문과 사상]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윤황과 아버지 윤선거의 슬하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4세 때 아버지의 학문적 동지였던 유계의 문하로 들어갔다.

    19세 때 권시의 딸과 혼인하면서 그의 문하에 들어갔고,

    23세 때 김집의 문하에, 이듬해에는 송준길(宋浚吉), 26세 때인 1654년에는 조익(趙翼),

    29세 때에는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독실하게 공부하였다.

    그의 이름을 듣고 공부를 청하는 자가 많아지자,

    주자의 한천고사(寒泉故事: 주자가 어머니 묘소 곁에 한천정사를 세우고 학자들과 담론하기도 하며,

    여동래와 함께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한 일을 말함)를 모방해 거상 중에도 강학하였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추모하여 종약(宗約)을 만들고 모임을 결성해 학사(學事)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현종실록(顯宗實錄)에 “윤증과 박세채는 모두 위기지학에 뜻을 두고 있으므로

    조정 신하로서 문학에 있어 두 신하보다 나은 자가 없을 것이니,

    만약 춘방관을 겸대하게 하면 또한 반드시 보익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윤증의 문학적인 능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저술 및 작품] 시문집 『명재유고(明齋遺稿)』가 전한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지방 유림들의 합의로 홍주(현 홍주군)의 용계서원, 노성(현 논산 지역)의 노강서원, 영광의 용암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도화서 화원이었던 장경주가 그린 윤증 초상은 보물 제1495호로 지정되어 있다.

    겨울의 명재고택 http://ktk84378837.tistory.com/6243 http://ktk84378837.tistory.com/976

     

     

    장독 / 박성우

     

     

      장 담글 때도 지났는데

    투박한 장독 하나가 평상 뒤에 놓여졌다

     

    불룩한 배에는

    단아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세 개의 산봉우리를 품고 있던 장독

    뚜껑을 열어 볼까 하다가

    담 밖의 아카시아 냄새에 취해 대문 밀쳤다

     

    휴일에 대청소를 하다가 보았다

    무릎 높이의 장독 위에

    엉덩이를 까고 앉아 있는 어머니

    아카시아꽃들이 키득키득

    하얀 이 드러내어 웃는 줄도 모르고

    장독에 오줌 누고 계셨다

     

    장독 안에서 익는 것이 어디

    간장 된장 같은 것들 뿐이더냐

    금간 뚜껑 열어 보니 오줌장이 익고 있다

    그 옛날 외할머니처럼 앞니 빠진 장독

     

    제 맛이 날 때까지 오줌장 익혀서

    호박넝쿨, 가지, 고추에게 먹일 거란다

    오줌 보탤 것 아니면 뚜껑 닫으라 한다

    술독도 아닌데

    아카시아꽃잎이 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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