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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부여박물관 탐방
    문화 culture/불교문화 Buddhist culture 2014. 11. 12. 21:56

     

    국보 제287호 금동대향로는 백제문화를 상징하는 최고의 걸작이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작이 있다. 백제 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盧)는 백제에서 520~534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 향로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6세기 초의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이루어진 백제공예품의 진수라 할 수 있다.  전체 높이가 61.8cm이며 용 모양의 향로 받침, 연꽃이 새겨져 있는 향로의 몸체, 산악도가 솟아있는 향로 뚜껑, 뚜껑 위의 봉황 장식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황과 향로 뚜껑은 하나의 주물로 제작되어 있어, 제작 과정에서 세 개의 주물틀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로 본체의 가운데 테두리의 구름 문양 아래에는 연꽃이 핀 연못이 있고, 그 위인 뚜껑에는 봉우리가 세 개 있는 산들이 있다. 이 산에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 신선으로 보이는 사람들, 호랑이,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많은 동물들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곳곳에 폭포, 나무, 불꽃 무늬, 귀면상 등이 있다.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상에는 봉황이 날개를 펴고 춤추고 있고, 그 아래에는 5악사가 있는데 이들은 소, 피리, 비파, 북, 현금을 연주하고 있다. 그 주위의 다섯 봉우리에는 각각 기러기로 보이는 새가 봉황과 함께 춤추는 형상이 있다. 향로의 몸체에는 연꽃이 있는데 그 위에 갖가지 새와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또 한쪽에는 무예를 하는 인물도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발가락이 다섯 개 있는 용이 위의 연꽃을 물고 하늘로 날아가려는 듯 용틀임을 하고 있다.

    봉황을 고대 동북아에서 신성시해 온 천계(天界)로 보고, 5악사와 기러기를 백제의 5부로 보아 백제대향로에 고대 동북아의 전통사상이 반영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0%B1%EC%A0%9C_%EA%B8%88%EB%8F%99%EB%8C%80%ED%96%A5%EB%A1%9C

     

     

    토기.

     

    송국리 철기.

     

    호자(虎子). 부여 군수리에서 출토된 호랑이 모습을 한 호자(虎子)는 7세기 백제시대 때 만들어진 남성용 토기 요강이다. 중국의 호자를 참고하였다 하는데 등에 난 손잡이를 한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 일을 보았을 것이다. 

     

     

    도깨비얼굴모양꾸미개.

     

    금동관모.

     

     

    무령왕릉(武寧王陵) 출토 금동신발은 충남 공주시 금성동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금동제 신발이다. 금동신발 안에서는 X-ray촬영을 통해 사람의 발 뼈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무덤 주인이 실제로 이 신발을 신은 상태에서 무덤에 묻혔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금동신발의 옆면에는 원주 법천리 출토 금동신발이나 경주 황남대총 출토 금동신발처럼 T자 모양 맞새김 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바닥 면에는 용을 형상화 한 것으로 보이는 무늬가 보이기도 한다.

    무령왕의 청동식이(靑銅飾履) / 문효치

    하늘이 주신 목숨을 다 살으시고 하나도 빼지 않고 구석구석 다 살으시고 곱슬거리는 백발을 날리며 달이라도 누렇게 솟고 파란 바람도 불고 하는 참 재미도 많은 날 이윽고 옷 갈아입으시고 왕후며 신하들 다 놓아두고 혼자 길을 떨치고 나서서 꾸불꾸불한 막대기 하나 골라 짚고 아 참말 미끄러운 저승길로 가실 때 이 신을 신으시다

    돌밭 가시밭 진흙 뻘길을 허리춤 부여잡고 달음질도 하고 수염도 쓰다듬으며 점잖게 걷기도 하여 임금님을 저승까지 곱게 모신 후 이제 또 다시 여기에 돌아와 쇠못이 박힌 불꽃무늬의 신이여 누구를 다시 모셔가려 함이냐 하늘이 정한 목숨을 구석구석 다 살으시고 그리고 웃으며 떠날 그 누구를 모셔가려 함이냐

     

    용마루 양 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기와인 치미(鴟尾), 주로 점토로 제작되고 있는데 용마루에 얹힐 수 있도록 하단부의 중앙에 적새[積瓦]와 연결하는 반원형 또는 방형의 홈이 가로로 패어 있어 고정시킬 수 있게 되어 있다. 길상(吉祥)과 벽사(辟邪)의 상징으로서 의장(意匠)된 상상의 새인 봉황에서 비롯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로 볼 수 있고, 백제 것은 부소산의 서복사지(西復寺址)에서 출토되었으며, 신라것은 황룡사지에서 나오고, 통일신라 것은 소형화되었고, 고려때부터 어룡형(魚龍形), 용두형(龍頭形), 취두형(鷲頭形) 등으로 퇴화되었다. 중국 한나라 때는 반우(反羽), 진나라 때는 치미, 당나라 때는 치문(鴟吻), 통일신라 때는 누미(樓尾)라고 불렀다. 치미의 크기와 무게로 보아 건축물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보물 제343호로 지정된 봉황무늬벽돌 말고도 반룡문, 연화문, 연화와운문, 연좌귀형문, 암좌귀형문, 봉황산수문, 인물산경문 등 8종이 있다. 크기는 대체로 28~29.8cm이다.

     

     

    백제왕 근구수왕이 왜왕 지에게 하사했는지 왜왕에게 백제왕이 헌상했는지 서로의 주장이 충돌하고 있는 칠지도(七支刀). 일본 나라현 이소노카미 신궁에 진본이 있다. 전체 길이는 74.9㎝. 칼의 양쪽 옆면에 금(金)으로 상감(象嵌)된 명문(銘文)을 발견하였다. 이로써 이것이 칼이며, 제작 당시의 명칭이 칠지도였음이 분명해졌다. 칠지도를 만든 주체와 목적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①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친 것이라는 설, ②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설, ③동진왕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설, ④대등한 관계에서 백제왕이 왜왕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설 등이 있다.

     

     

    보광사 대보광선사비. 보물 제109호. 고려 공민왕 때 보광사(普光寺)를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圓明國師) 공적을 기록했는데 머릿돌도 받침돌도 없는데 비석 가장자리를 덩굴식물 무늬로  감싸고 있다. 높이 1.97m.

    국립부여박물관은 1929년에 재단법인 부여고적보존회로 창립하여, 옛 객사 건물을 백제관이라 이름짓고 진열관을 개관하여 수집한 유물들을 전시했다. 1939년 총독부박물관 부여분관으로, 1945년 10월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으로 개편했다가, 1975년 8월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승격했다. 현재의 박물관은 1971년 9월 1일에 신축하여 개관한 건물이다.

     

     

    나란한 그대여 백제 칠지도七支刀 / 백우선

     

     

    나는 이제 이걸 그대께 드리렵니다

    위도 아래도 아닌 그대께

    그대의 그대인 내가

    나의 그대인 그대께

    나란히 서서 드리렵니다

    일흔일곱의 일곱 번으로도

    일흔일곱의 일곱 가지로도

    아직 더 아름다우리라 눈감지 않는

    나는 이제 이걸

    아닌 그대 없는 그대께 드리렵니다

     

    -미술관에서 사랑하기/ 2004/ 리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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