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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산초당 지나 강진 백련사(白蓮社)
    문화 culture 2022. 7. 1. 11:56

    성균관진사 윤종진의 묘, 다산의 가장 어린 제자로 다산의 뜻을 따라 다산초당을 지켰다. 

    겨울방학 때 아이들을 들쳐업고 와서 초당과 울창한 가운데 빨간 동백숲의 가물가물한 기억을 30여년 만에 접할 기회가 찾아왔다.

    정약용은 1808년봄 해남윤씨 집안의 산정(尹博의 山亭)에 놀러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다사서옥(茶山書屋)은 지난 7년간 전전하던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비할 바가 이니었다. 더구나 가까운 백련사(白蓮寺)에 절친한 벗 혜장(惠藏)이 있었고 다산(多山)은 그 이름처럼 차나무로 가득했다.

    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비로소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10년동안 다산학단(多山學團)으로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백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초당을 가꾸는데도 정성을 기울여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새로 단장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윤씨집안의 산정은 다산초당으로 거듭났고 정약용은 스스로를 다산초부(多山樵夫)라고 칭하였다.

    다산초당 현액은 추사 김정희 서에서 집자하였다. 24세 연하인 추사는 평소 다산을 스승으로 존경했다.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은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만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만큼 귀히 여겼다. 동암(東庵)을 관어재(觀魚齋)라 한데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냈다고 한다. 

    서암(西庵)

    동암(東庵).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할 정신과 실천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현액 중 觀魚齋(관어재)는 연못의 물고기를 보는 집이다. 茶山東庵(다산동암)은 다산의 '서증기숙금계이군'에서 집자한 것이다. 寶丁山房(보정산방)은 추사의 친필이며 ‘정약용을 보배롭게 생각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원본 글씨는 따로 전한다. 

    천일각(天一閣). 하늘끝 한 모퉁이, 흑산도에 유배중인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였을 것으로 생각하여 강진군에서 1975년에 세웠다. 강진만 구강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삼나무

    광나무

    참식나무

    신우대

    황칠나무

    마삭줄

    참개구리

    말채나무

    쪽동백

    제피나무

    후박나무

    남도명품길.다산과 혜장(호는 아암(兒庵)이며 29세에 백련사 주지로 다산보다 열살 아래)이 39세에 입적하자 아암장공탑명을 지었다. 대흥사 부도밭에 시비가 전한다.

    백련사가는길. 혜장보다 10살 위인 다산은 혜장에게 주역과 유학을, 혜장은 다산에게 차를 이야기하며 지냈다고 한다.

    해월루(海月樓), 해월은 바다위에 뜬 달이라는 뜻으로 누각의 명칭은 양광식 강진군 문화재위원이 명명했다.  현판의 글씨는 마량면 출신으로 서울에서 작품활동중인 김제운씨가 쓰고 군동면 화방출신 혁인스님이 조각했다. 해월루는 독특한 십자형태의 누각의 모습을 만들어졌다. 해월루는 경기도 고양시 북한산에 위치한 산영루 누각의 형태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산영루는 북한산 비석거리앞 절벽위에 세워진 누각으로 다산 정약용선생이 산영루란 제목의 시를 지을 정도로 빼어난 절경을 자랑했다. 이에 군에서는 실학성지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다산선생의 시의 주제가 됐던 산영루의 형태로 누각을 새로 설치한 것이다. 다산초당 백련사 오솔길 2층 규모 누각 해월루 새로 세워 - 강진신문 (gjon.com)

    팽나무

    녹나무

    동백숲

     

    뿌리의 길 / 정호승

    다산 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 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달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강진 백련사(白蓮社) 육화당. 

    강진 백련사(白蓮寺)와 백련사(白蓮社)의 유래

    고려초 귀족중심의 화엄종이 대세였으나 쇄신의 하나로 왕제인 의천이 천태종을 일으켰으나 뛰어넘지 못하였다. 이에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이 서민중심의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송광사에서 일으켰다. 지눌의 정혜결사를 이어 천태종 쇄신운동인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일으켰다. 만덕사에서 백련사(白蓮社)로 바뀐 계기도 되었다.

    백련사는 만덕산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후기인 19세기에는 만덕사로 불렸다. 신라말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고 고려1232년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1163-1245)가 이곳에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였던 것이다. 백련사 만경루(萬景樓) 현액은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완성자라는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 글씨다. 동국진체란 조선 중기까지 중국 서체를 그대로 본뜨던 것을 우리 양식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대흥사 현액도 이광사의 것이었는데 추사 김정희가 저걸 글씨라고 붙여놓았느냐고 무시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만경루 앞의 배롱나무는 수령150년.

    백련사(白蓮社) 명부전은 세상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며 지옥의 중생들까지 구제하겠다는 뜻을 품은 지장보살을 모셨다.

    백련사(白蓮社) 범종각

    백련사(白蓮社) 대웅보전은 팔작지붕의 단청이 화려한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식건축물로 1762년에 건립하였다. 각 추녀마다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건물전면 2개의 주두(柱頭)에 용머리 조각을 장식하였다. 전남지방문화재136호.

    백련사(白蓮社) 대웅보전 현액 조선 후기의 명필 양명학자(陽明學者)인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글씨다. 만경루 현액도 마찬가지다. 영조 31년(1755) 나주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회령과 전라도 진도 등에 23년 유배생활을 하였다.

    백련사 대웅보전 삼존불. 목조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조선후기 1710년에 조성된 것이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본존불인 여래상 좌우에 보살상을 봉안하는데 백련사의 경우에는 보살상없이 여래삼존상만 봉안하였다. 어떤 곳은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협시불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백련사(白蓮社) 대웅보전 용두(龍頭) 법당은 불자들이 부처님과 함께 타고 가는 배의 선실이고 그 배는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간다. 법당 앞 용두는 그 극락정토로 가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을 상징한다. 왼쪽 용두(龍頭), 오른쪽 용두와 달리 왼쪽 용두는 윗입술이 아래로 말려 있다. 왼쪽 이미지는 마음은태양님 블로그에서 차용.

    대웅전 내부의 조각상

    대웅보전 한 바퀴.

    백련사 삼성각 튼실한 배롱나무가 여기도 버티고 있다.

    백련사 육화당(六和堂), 화경당(和敬堂)은 스님과 신도들의 거주공간. 육화당(六和)는 여섯가지로 화합하며 살아가는 곳이란 뜻이며 그 내용은  ①신화공주(身和共住), 몸으로 화합하여 같이 살라 ②구화무쟁(口和無諍), 입으로 화합하여 다투지 말라 ③의화동사(意和同事), 뜻으로 화합해 함께 일하라 ④계화동수(戒和同修), 계율로 화합 해 같이 수행하라 ⑤견화동해(見和同解), 바른 견해로 화합하여 같이 해탈하라 ⑥이화동균(利和同均), 이익을 균등히 나누라

    백련사 사적비(白蓮寺 事蹟碑)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이首)로 구성되어 있는데, 귀부는 고려시대, 비신과 이수는 1681년(조선 숙종 7)에 조성되어 각기 서로 다른 건립연대를 보이고 있으나 각 부재가 지닌 양식상의 특성으로 보아 가치가 있다. 보물 제1396호. 문화재청

    백련사 동백나무숲. 백련사 부근에 있는데 동백나무 1,5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동백 이외에도 굴참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동백은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秋栢), 추백(秋栢), 동백(冬栢)으로 부르기도 한다. 천연기념물 제151호

    백련사 해탈문. 현액은 지역 서예가인 학정 이돈흥의 글씨이다.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 눈을 부릅뜬 금강역사 두분, 마지막 사자를 탄 문수보살이다.

    만덕산 백련사 일주문을 나오며...

     

     

    강진 청조루(聽潮樓)는 강진읍 옛 객관에 있는 누각으로 현감 오순종(吳舜宗, 1491-1495 재임)이 건립하였다. 누각명에서 알 수 있듯 강진만의 무른 물결을 조망할 수 있다. 소실된 청조루에 대한 안타까움을 정약용이 탐진촌요(耽津村謠)에서 읊었다. 탐진(耽津)은 강진의 옛지명이며 청조루는 몇 번에 걸쳐 소실되었는데  2018년 강진군에서 복원하였다.

    崩城敗壁枕寒丘 (붕성패벽침한구) 성벽은 다 무너져 언덕바지 설렁한데

    鐃吹黃昏古礎頭 (뇨취황혼고초두) 해가 지면 징소리만 주춧돌을 울린다네

    諸島年年空斫木 (제도년년공작목) 여러 섬에 나무들을 해마다 베어만 내지

    無人重建聽潮樓 (무인중건청조루) 청조루를 중건하는 사람은 통 없다네

    강진 사의재(四宜齋)는 다산 정약용이 1801-1805년까지 이곳 주막을 거처로 삼았고, 그 뒤에는 백련사 혜장선사의 주선으로 고성암 보은산방과 제자 이학래의 집 등에서 3년을 지냈고, 1808년에 도암에 있는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11년을 머물렀다. 

    사의재와 주모상, 정약용은 강진 유배시 동문매반가라는 주막집 골방을 얻어 살며 사의재(四宜齋,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 하였다. 담백한 생각(사의담, 思宜澹), 장엄한 용모(모의장, 貌宜莊), 과묵한 언어(언의인, 言宜認), 신중한 행동(동의중, 動宜重)을 네가지 덕목으로 꼽았다.  이곳에 4년간 머물면서 경세유표라는 책을 남겼다. 

     

    사의재(四宜齋)에서 / 청연 양희봉

     

    다산의 길 위에서

    사의재를 돌아보고 있다.

    선생님은 세상을

    우래처럼 보시고

    눈이 시리도록

    사의제를 당부하셨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정일근

     

    第 一信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竹露茶)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 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 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適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을 끌고 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이 깎고 가는 바람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第 二信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우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우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주더니 이제 그중 큰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재워 무우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선재(四宣齋)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며 아아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 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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