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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이 찾아가는 마지막 집
    문화 culture/역사 전통 history tradition 2017. 9. 1. 19:13

     나주 복암리 고분전시관.

     

    영산강 세력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제 목: 1500년전 영산강 제국의 블랙박스, 3m옹관을 판독하라.

      2. 담당 PD: 장 영 주 PD

      3. 방송 일시: 2001922() 20:00-21:00..... KBS 1TV

      4. 주요내용

      전남 나주시 반남면에는 50여기의 정체를 알수 없는 고분이 늘어서 있다.

      덕산리 3호분의 경우 폭 50미터 높이 9미터 규모.

    신라의 왕릉에 비해서도 결코 작은 편이 아니다.

    이 고분의 특징은 무덤속에 대형옹관을 부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옹관을 사용하는 대형고분의 존재는 한국고대사 최대의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지난 819일 년 전남 나주시. 공원묘지를 만들기 위해 흙을 깍아 내던 중 대량의 옹관 파편이 나타나자 공사는 중단됐다.

    과수원으로 연결된 흰 선이 드러났고 그것은 고대 옹관 가마터로 밝혀졌다!!

      드러난 가마의 숫자만 19.

    예상되는 가마의 숫자는 100여기 정도!!

    국내 최대 규모의 고대 생산 단지가 확인된 것이다.

    예상과는 달리 대형옹관은 계획 생산되고 있었다.

      이 대형 옹관 제작터의 발견은 금동관. 환두대도, 금동신발과 함께 영산강 세력이 상당히 체계화되고 강력한 세력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데...

      이번 주 역사스페셜에서는 옹관가마의 발견을 통해 미지의 영산강 대형옹관사회의 정체에 한발짝 다가서 본다.

     

      5. 세부내용

     

    1) 믿을 수 없는 옹관의 거대함.

      광주박물관과 목포대박물관에는 5세기의 유물로 도저히 믿기지 않는 거대한 토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나의 길이가 최고 2미터에 달하고 무게 400kg에 달하는 거대한 옹관이 영산강 유역에서는 대량 사용되고 있었다.

    하나의 제작기간은 한달.

    현재 우리나라의 가마에서 이 옹관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 주인을 알지 못하는 나주시 반남면의 고분에서는 바로 이 거대 옹관이 사용되고 있었다.

       

    2) 어떻게 옹관은 매장되어 있을까?

      역사스페셜은 나주 동신대박물관과 함께 파괴된 옹관 고분1기를 발굴했다!!

      내부에서는 항아리 하나와 철칼 두 자루, 옥이 수습되었다.

    그리고 옹관이 어떻게 매장되었는지를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발굴한 옹관은 큰 것이 1미터70 작은 것이 1미터30.

    작은 옹관이 큰 옹관 속으로 30cm 들어가고 주변은 점토로 밀봉되어 있었다.

      영산강 유역에서 대형옹관을 발견하기란 너무나 쉬운 일이다.

       

    3) 삼국시대 최대의 생산단지 발견되다.

      나주시 오량동 해발 20미터의 조그만 야산에서 대규모 가마유적이 발굴되었다.

    현재 확인된 가마만 17.

    전체 100여기의 대규모 생산공장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가마는 나란히 열을 지어 분포하고 있는 가마 속에서는 대형 옹관의 파편들이 무수히 출토되었다.

      최초로 확인된 대형 옹관의 생산지였다.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영산강 대형 옹관 고분 세력은 대규모 생산 시설을 장악하고 계획생 산을 하던 발달된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4) 백제와는 다른 영산강 미지의 세력

      고고학계에서는 영산강 유역의 사회를 옹관묘 세력으로 칭하기도 한다.

    대형 옹관 고분인 나주고분들.

    이곳 옹관 속에는 금동관을 비롯한 수장의 위세품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은 백제와는 다른 독특한 양식을 띄고 있다.

      영산강고분의 금동관은 백제와 고구려계통의 화염문양과 다른 나선문양을 하고 있던 것!

    대형옹관은 3세기에 시작, 6세기 중반에 끝난다.

    최 전성기였던 5세기 백제왕릉보다 더 큰 옹관고분을 축조하고 백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5) 영산강 지역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옹관고분은 영산강 강변을 따라서, 서해와 남해의 바다를 따라 분포하고 있다.

    옹관 고분 세력 집단끼리 교통하는 통로가 바로 강과 바다였다.

    이 지역은 일본토기와 흡사한 원통형 토기와 일본 특유의 열쇠형 고분(전방후원분)이 눈에 띈다.

    즉 문화적 다양성이 드러나는 고분과 부장품들은 영산강 지역 사람들이 바다를 통해 다른 세계와 교류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나주 영산강지역의 주체세력들이 일본과 문화적 교류가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나주의 옹관 고분 세력은 바로 일본과 교역하던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넓은 평야의 생산력에 바탕하고 해양활동을 통해 부를 축척해 백제말기까지 백제에 편입되지 않고 독립왕국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 http://cafe.daum.net/root2/5Sz/127?q=kbs+%BF%AA%BB%E7%BD%BA%C6%E4%BC%C8+%B3%AA%C1%D6+%BF%CB%B0%FC%B9%A6

     

     

    백제시 - 옹관 / 문효치

     

     

    천 오백년

    죽음을 가두어 둔 세월

     

    죽음이 익고 익어

    생명이 되었다.

     

    따스한 체온이 돌아

    백제 사투리를 말하는

     

    이제는 흙이 아니다

    한낱 그릇도 아니다.

    죽음을 품어

    생명으로 키워낸

    원시의 모태다.

      

    시집명 : 남내리 엽서, 2001, 문학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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