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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주(羅州)에 가거든
    기타 etcetera 2009. 1. 22. 11:39

    경상도가 경주와 상주로 묶이듯 충청도가 충주와 청주로 묶이듯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를 묶는다. 그 나주에 가면 배도 맛봐야 하지만 끼니로는 무엇보다 곰탕을 먹어야 한다. 곰탕이 얼마나 유명한지 곰탕의 거리 이정표가 보인다. 나주곰탕의 원조집이라는 남평식당은 일정상 들어가질 못하고, 도곡온천 앞을 지나다 들어간 집이 장원봉국밥집이다. 간판이 무슨 말인지 첨엔 아리송하다가 나중에야 사장님 이름인가 보다 했다. 턱수염만 기른 이 분이 분위기를 띄우느라 손수 만든 음악실에 들어가 7080 노래를 골라 틀어 준다. 아침식사로 먹는 그 유명한 나주곰탕은 사골이 가마솥에서 12시간 고아 나온다. 끈적하고 뽀얀 국물을 뚝배기가 넘치도록 담아내온다. 세상에 이리 구수하고 맛이 좋을까 싶은데 간을 맞춰 짭조름하다. 그 말에 아낙은 육수를 한 바가지 내온다. 전라도 사람 같은 구수한 인정이 또 있을까 싶잖다. 속이 녹아 풀리면서 집안을 꾸민 장식들이 눈에 들어온다. 붓글씨며 장승이며 그림이며 탈이며 인형이며 오만 잡기를 주렁주렁 붙이고 매달고 칠하여 걸어 놓은 폼새가 주인을 닮았다. 산만한 기운이 돌아 밖을 보니 아직 걷히지 않은 안개비다. 상기 잠에서 깨나지 않은 세상을 따뜻하게 감싸고 돈다. 나는 잠시 무진을 기행하는 '윤희중'이 되어 본다. '하인숙' 같은 여자를 내 생전에 만날 일이 있을까?

    송수권 시인의 주간동아에 연재된 나주곰탕 이야기를 열어본다.

    걸랑, 고거리, 고들개, 곤자소니, 구녕살, 꾸리, 다대, 달기살, 대접살, 도래목정, 둥덩이, 떡심, 만하바탕, 만화, 멱미레, 발채, 새창, 서대, 서푼목정, 설낏, 설밑, 수구레, 홀떼기, 이보구니….’이보구니는 소잇몸살, 수구레는 쇠가죽 안에 붙어 있는 아교질이다. 이처럼 쇠고기에 대한 미각문화가 발달한 이유는 대략 세 가지 설(說)로 요약된다. 첫째는 신성설, 둘째는 희귀설, 섯째는 전통설이다. 전통설에 비추어 본다면, 고대 중국에서 가장 고급요리로 맥적(貊炙)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불고’라고 한다. 이것이 다시 설야멱(雪夜覓)으로 계승되어 지금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불고기의 뿌리가 되었다. 난징요리에 ‘고려육’이 있고, 베이징요리에 ‘고려저’(高麗猪)가 있다. 이는 원`-`명`-`청나라 때 중국 황실에 불려간 조선 숙수들이 정착시킨 한국의 육류문화다. 이처럼 육식문화가 발달하다 보니 부위별 미각이 세분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 부위마다 맛을 정리한 문헌은 아직 없는 것 같다. 고작해야 고려시대 ‘향약구급방’ 정도가 예시로 적합할 듯하다.식품 하나하나에 기(氣)와 미(味)를 표기하고 이것을 영양관리 지침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즉, 5기란 한(寒) 열(熱) 온(溫) 량(凉) 평(平)을 말하며, 맛으로는 단맛 쓴맛 신맛 짠맛 매운맛 등이다. 기(氣)도 그렇지만 맛을 다시 세분해보면, 4미에 단맛을 첨가하여 1대 교합미(味)로 만들면 벌써 여덟 가지의 맛이 나온다. 2, 3대까지만 세분한다 해도 족히 60여 가지의 맛이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 ‘달다+시다’의 1대 교합만 해도 달시다, 달새콤하다, 달시큼시큼하다 등으로 합을 이루고 이 하나의 명제만 가지고 보더라도 단맛에 강, 중, 약의 신맛을 섞으면 5기와 5미의 분열이 일어나 묘합의 맛으로 번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사실 이런 맛의 표현형태는 세계 어느 민족도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니 언어란 얼마나 부정확한 표현인지 모른다. 그러니 쇠고기 각 부위의 맛을 다 표현한다는 것은 그 육질이나 내장 세포의 맛을 표현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남도 육류문화에서 가장 널리 보급되어 정착된 것이 나주 곰탕이다. 천년 목사골로 농경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설렁탕’은 왕이 농사를 장려하고 기원하기 위해 종로의 선농단(善農壇)에서 제를 올렸기에 붙여진 이름이란 것이 일반적 견해다. 그런데 ‘곰탕’의 유래는 아직도 확실치가 않다. 물론 ‘국밥’에서 유래했을 터이지만 함평 우시장설, 남평 우시장설, 심지어는 창평 우시장설까지 나오고, 나주는 관아의 저잣거리이기 때문에 ‘소머리 국밥’이 구실아치(아전)들의 입맛에 맞게 정착되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뿐이다. ‘삼국유사’ 유리왕조에 처음으로 소가 쟁기를 끌었으며, 신라 지증왕(439) 때에 우차법이 도입되었다. 남도에서는 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소는 곡물생산의 주역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제 소는 육류용으로 전락해버렸다. 탕반음식을 주로 하고 있는 우리 음식문화에 어쨌든 곰탕은 입맛에 딱 맞을 수밖에 없다. 원래 곰탕은 사태살, 쇠꼬리, 허파, 양곱창을 썰지 않고 덩이째 삶아 무, 파 등을 넣어 푹 고아 내는 탕이었으며, 설렁탕은 쇠뼈가 많이 들어가고 그 쇠뼈의 골수를 우려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나주곰탕’은 세월이 가도 향수를 달래는 음식의 하나로서 그 자리매김은 영원할 것 같다. 노안집, 하얀집, 남평식당(장금숙·061-333-4665)이 그 원조들로 비슷한 연대에 출발한 집들이다. 2대째 내려온 장금숙씨의 말에 따르면 ‘장터 국밥’이 살기 좋아지면서 ‘곰탕’으로만 정착된 게 아니가 한다. 곰탕은 양지와 사태를 주로 쓰고 수육은 머리, 혀, 볼때기살을 주로 하며 삶는 과정에서 차별화한다고 노하우를 말한다. 어쨌건 소 부위 살을 아프리카 보디족이 40여 부위, 영국이 25부위 정도로 구분하는 데 비해 우리 민족은 125부위 정도로 세분하면서 소의 혓바닥 잇몸살까지 긁어먹는 희한한 민족임에 틀림없다.

     

     

    나주곰탕 -박종택 선생님  /   김경윤

     

     

    나주에 가면 나주곰탕이 제일이다

    그 중에서도 시청 건너편 늙은 은행나무집

    국물 맛은 진국 중에 진국이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다

    검은 가마솥에 하루 낮 하루 밤을 고아서 내놓은

    나주곰탕집 국물 같은 사람

    누군가 가슴 속 불 다스리지 못하고

    총알처럼 뱉어낸 말들을

    (말이란 때로는 총알보다 깊은 상처를 남긴다)

    고스란이 뒤집어쓰고도

    빙그시 웃기만 하시던

    귀가 크고 입술 두터운

    늙은 은행나무처럼 속 깊던 사람!

    나주곰탕 먹을 때마다

    나는 불현듯 그 분 생각이 난다.

     

    수록시집 아름다운 사람의 마을에서 살고 싶다 ( 내일을 여는 책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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