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봇대풍경 landscape 2009. 2. 11. 11:32
문화동.
전봇대 뒤의 세계 / 이장욱
호기심의 끝에 있는 것.
킁킁거리는 코와
전봇대의 깊이 너머에.
거기서 자꾸 달아나는 중인 것.
냄새가 없는
내일이 없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과 흡사한.
우리는 오래전에 술래잡기를 한 적이 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머리카락 보인다.
머리카락,
점점 무성해지는 그림자들의 자리에
밤의 전봇대 뒤에
누가 계속 숨어 있다.
개의 목줄을 쥔 채
개에게서 숨으려는 사람처럼.
점점 커지는 머리통을 감추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저녁 무렵에 가만히 내어다본다.
숨어 있는 사람이 아직도 숨어 있는
적막한 골목을.
거대한 머리통이 아직도 자라고 있는
밤의 전봇대 쪽을.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시집『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문학과지성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