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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도 호거산(虎踞山) 운문사(雲門寺)
    문화 culture/불교문화 Buddhist culture 2024. 10. 21. 23:04

    비구니 사찰이라는 호거산(虎踞山) 운문사(雲門寺), 비구니 사찰은 정돈되어 깔끔하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이미지가 있다.  문을 들어서기 전 맥문동 밭에 눈 익은 토기가 먼저 들어온다. 신라시대 기마인물형토기인데 중앙박물관에 있는 경주 노동동 금령총 출토분1쌍(국보91호), 경주 덕천리 출토분, 김해 덕산리 출토분 1개(국보275호) 총4개가 전한다. 높이 한 뼘 정도 23.4cm 의 이 조그만 토기에 대해 고고학계에서는 술주전자로 해석하지만 최근 김정수는 '신라 기마인물형토기의 용도에 관한 소고'에서 실험을 통해 주전자가 아니라 등잔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동안 고고학계에서는 주전자이며, 명기(明器, 장사 지낼 때 무덤 속에 주검과 함께 묻기 위해 만든 그릇)로 알려져 있었다. 속이 비어 있어 술을 넣으면 주전자고 기름을 넣으면 등잔인 것을...

    국보91호인 기마인물형 토기 주인상(좌) 하인상(우) 1쌍 사진을 국가유산청에서 가져왔다. 

    뒤돌아보면 범종루(梵鐘樓)

    대웅전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는 거북바위, 앞발 2개, 뒷발 2개, 머리 1개, 몸통 1개, 총 6개의 작고 큰 자연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양과 비례가 너무 현실적이어서 기가 막혔다. 

    만세루(萬歲樓). 신라 원광국사가 초창하여 고려의 보양국사가 중창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105년 원응국사가 3차 중창할 때의 것이다. 사찰에서의 누각건물은 큰 법회시에 대웅전에 들어가지 못한 대중들이 대웅전을 향하여 법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만든 건물로, 운문사 만세루는 200여 평의 넓은 공간을 누각으로 조성하였다.

    대웅보전, 기존의 대웅보전이었던 현재의 비로전에 늘어난 대중을 수용하기 어려워지자 1994년에 새로 건립하였다. 현재조석예불을 모시는 주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웅보전 칠불, 과거 연등불 현재 석가모니불, 미래 미륵불인 삼세불(三世佛)과 대세지, 보현, 문수, 관음의 사대보살을 모셨다. 

    대웅보전 좌우측 벽에 걸린 탱화

    은진전과 조영당이 한 건물의 좌우에 동거하고 있다. 좌측에 응진전(應眞殿)은 수도승에 대한 신앙 형태를 나타내는 사찰의 당우다. 보통 석가불이 주불이고 좌우에 제자인 아난과 가섭을 협시로 모신다. 우측은 조영당(祖影堂)인데, 운문사에 주석하였던 원광국사·보양국사·원응국사 등 3대 중창주와 운문사에 주석했던 열한 분 조사의 영탱과 운문사 수호에 공이 많은 손 장군과 김 장군의 영정을 봉안한 공간이다.

    전향각(篆香閣), 불전에 향을 피우고 도를 닦는 스님들의 거처다. 

    본래의 대웅보전(大雄寶殿)으로 현판은 그대로인데 현재 내용은 비로전(毘盧殿)이다. 보물835호. 신라시대에 창건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는데 지금의 절은 조선 숙종 44년(1718)에 있었던 네 번째 보수 때의 것이다. 대웅보전도 이때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기둥 사이의 간격을 넓게 잡아서 같은 규모의 건물보다 크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현재 비로전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비로자나는 산스크리트어로 ‘두루 빛을 비추는 자’라는 뜻을 가진 부처다. 대일여래(大日如來)라고 한역하기도 하므로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을 대광명전(大光明殿), 대적광전(大寂光殿), 비로전(毘盧殿)이라고 한다. 『대방광불화엄경』에서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을 포괄하여 대표하는 법신불(法身佛 부처님이 깨친 진리, 그 정신적인 부분을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부처)로 등장하는 비로자나불은 지권인(指拳印·智拳印)을 맺고 있다. 지권인은 이치(理致)와 지혜(智慧),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이 둘이 아님을 설하는 수인이다. 양손을 가슴 앞에 올리고 치켜 세운 왼손 검지를 오른손이 감싸는 형태와 좌우 엄지를 속에 넣고 다른 손가락으로 감싸 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운문사 비로전의 비로자나부처님은 첫 번째 형식을 띄고 있다. 

    후불탱화인 비로자나삼신불회도(보물1613호), 이는 1755년 임한(任閑)을 수화사로 하여 19명의 화승이 제작하였다. 삼신불회도는 법신 비로자나불과 보신 노사나불, 화신 석가모니불의 설법 장면을 표현한 불화를 말한다. 화면은 크게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앙에는 삼신불, 하단에는 협시보살과 사천왕 그리고 상단에는 설법을 들으려는 십대제자와 청중들을 표현하였다.

    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우측에 걸린 삼중탱화, 아래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좌측에 걸린 신중탱화

    대웅보전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大雄寶殿 觀音菩薩·達摩大師 壁畵), 보물1817호. 거대한 흙벽에 높고 험준한 바위산을 배경으로 온화하고 화려한 관음보살과 호방하고 대담한 달마대사를 조화롭게 그렸다. 한 화면에 관음과 달마를 나란히 표현한 벽화의 유일한 사례로,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전통을 잇는 선찰 운문사의 성격을 잘 대변해 준다. 공사중이어서 볼 수가 없어서 경북도청에서 가져온 사진. 

    반야용선(般若龍船)에 매달린 악착보살(齷齪菩薩), 비로전 서쪽 천장에 종을 매단 반야용선이 보인다. 반야용선이란 피안의 극락정토에 갈 때 탄다는 배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법당 자체가 지혜의 세계로 나아가는 반야용선과 같다고도 하는데, 운문사 비로전 내에 형상화 되어있는 반야용선에는 밧줄이 하나 걸려 있고, 그 밧줄을 잡고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동자상이라 하여 악착보살이라고 한다. 악착(齷齪)은 매우 모질고 끈질기다는 뜻이다. 억척이란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을까? 양성모음과 음성모음의 차이를 노린 말일 수도 있다. 당나라 때의 유명한 문장가인 한유(韓愈, 768~824)가 '齪齪(착착)' 이란 시가 전한다.

    극락전 우물천장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문양과 색채를 접하는 순간 저 바티칸의 천장 벽화보다 훨 낫다는 생각이 들면서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석등, 보물193호. 방형 지대석 위에 상대·중대·하대석을 갖춘 기단부와 화사석, 옥개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륜부에 보주가 놓여 있다. 절제된 문양의 조식으로 기단부와 몸체의 비례 및 균형이 조화를 이루며, 부석사 석등 이후 통신 전형적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현재 금당 앞에 자리하고 있으나, 1935년경 촬영된 사진에는 작압전 뒤로 1기가 찍혀 있다.

    동서삼층석탑(雲門寺 東·西 三層石塔). 보물678호. 대웅보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이 두 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규모와 양식이 서로 같다. 각 층의 기단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기고, 특히 윗층 기단에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겨 놓았는데 모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을 이루며,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각 부분들이 차례로 올려져 있는데, 모두 본래의 것들이다. 기단의 가운데기둥이 아래층 기단에서는 2개이던 것이 윗층 기단에서는 1개로 줄어들고, 표면에 조각을 둔 점 등으로 보아 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기단부가 몹시 부서져 무너지기 직전이던 것을 일제시대에 보수하였는데 이 때에 팔부중상 등 일부를 새로운 돌로 보충하였다.

    오백전(五百殿), 주불로 석가모니불과 좌 제화갈라보살, 우 미륵보살과 오백나한상을 모신 전각이다. 부처님과 같이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른 사람으로,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른 수행자다. 부처님을 부르는 열 가지 명칭(十號) 중의 하나가 응공(應供, 아라한)이었다. 통도사 구하 스님이 86세에 쓰신 五百殿 현판 글씨가 일품이다.

    관음전(觀音殿), 1105년 원응국사가 중창한 것이라고 전하나, 건축 양식으로 볼 때 조선 초기 건물로 추정된다.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씩인 정사각형 공간에 팔작지붕을 이고 있으며 사방의 기둥에 각각 2개씩의 주련을 걸었는데,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찬탄하는 두 가지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건물 안팎에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벽화로 표현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일체 중생들을 고통에서 건져 즐거움을 주겠노라 서원을 세운 대자대비의 상징으로, 운문사 관음전에는 1816년에 제작한 수월관음도가 후불탱화로, 1871년에 제작한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冥府殿), 신라시대 원응국사가 건립하였고 나말려초의 보양국사가 중창한 운문사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건물로 조선 중엽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지옥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지장보살과 십대왕을 모신 전각이으로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 하기도 하며, 십대왕을 모신 전각이라 하여 시왕전(十王殿)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또한 명부전이라는 명칭은 지장보살과 시왕이 머무르는 곳이 저승세계 즉 명부이므로 이런 명칭을 사용한다. 십대왕(十大王) 저승을 관장하는 열 명의 대왕으로 진광(秦廣)대왕, 초강(初江)대왕, 송제(宋帝)대왕, 오관(伍官)대왕, 염라(閻羅)대왕, 변성(變成)대왕, 태산(泰山)대왕, 평등(平等)대왕, 도시(都市)대왕, 전륜(轉輪)대왕 등을 일컫는다. 망자가 저승에 다다르면 이들 열 명의 대왕에게 심판을 받아 각각의 업식에 따른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 망자를 위해 지내는 재(齋)의식 가운데 대표적인 49재는 망자가 열 명의 대왕에게서 심판을 받고 윤회하여 다음 몸을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인 49일 동안 그의 업식이 맑아지고 보다 부처님의 세계에 가까워지길 발원하는 추모의식이다

    운문사 원응국사비(淸道 雲門寺 圓鷹國師碑), 보물316호. 고려 중기의 원응국사(1051∼인종22년 1144)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 송나라에 화엄의 뜻을 전하고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워 귀국하였다. 비는 비받침, 비몸, 머릿돌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받침돌과 머릿돌이 없어진 상태이다. 다만 세 쪽으로 잘린 비몸만 복원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그의 행적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비가 깨어져 알 수 없으나, 국사가 입적한 다음해에 인종이 국사로 명하고, 윤언이에게 글을 짓게 하였다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대략 1145년 이후로 짐작된다. 

    석조여래좌상(淸道 雲門寺 石造如來坐像), 보물 317호.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는 완전한 형태의 불상이지만, 호분이 두껍게 칠해져 세부표현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분명하다. 신체 비례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인데, 가는 눈썹·작은 눈·오똑한 코· 작은 입 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평판적인 모습이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그 안에 비스듬히 표현된 내의가 보인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배꼽 부분에 놓여져 있는데, 손이 작고 표현이 섬세하지 못해 투박한 모습이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투박한 모양이며 가장자리에 형식적인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매우 특이한 양식으로 주목된다. 맨 윗부분은 평면 타원형으로 14개의 연꽃잎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는 6각형이며, 아랫부분은 긴 6각형에 18개의 연꽃잎이 표현되어 있다. 겉옷 안에 표현된 속옷, 전반적으로 투박해진 표현기법 등에서 9세기 불상을 계승한 10세기 초의 불상으로 보인다. 사진 서오선 제공.

    석조여래조상 좌우로 석조사천왕상(雲門寺 石造四天王像)이 서 있다. 보물318호. 좌측은 남방증장천왕과 서방광목천왕이다.  우측은 북방다문천왕과 동방지국천왕상이다. 운문사 작압전(鵲鴨殿)안에 모셔진 석주로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으며, 머리 뒷쪽으로 둥근 광채를 띤 채 악귀를 발로 밟고 있다. 이 4개의 사천왕상 돌기둥은 신체가 큰 반면, 돋을새김을 뚜렷하게 하지 않아 양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체구도 약해보이고 얼굴 생김새도 부드러운 것으로 보아 시대가 내려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880년에 만들어진 보조선사탑(普照禪師塔) 사천왕상이나 철감선사탑(澈鑑禪師塔) 사천왕상과 비슷하지만, 보다 크고 띠주름도 굵어지는 등 형식화된 면이 8세기 석굴암의 사천왕상과 비교하여 시대적인 차이가 보인다. 통신 후기나 후삼국 900년 전후제작 짐작된다.

    운문사 동호(雲門寺 銅壺), 청동 항아리 모양의 불교 용기로 감로준甘露樽이라고도 부른다. 감로수를 담아 놓는 의식용 항아리일 가능성이 높으며, 높이는 55㎝, 입 지름은 19.5㎝, 몸통 지름은 31㎝로 보물 제208호이다. 향로, 정병 외에 용도나 형태에 있어 유일하게 뚜껑 높이가 다소 높으나 안정된 비례감과 명문이 고려불교의 자료. 임춘林椿의 시문집인 '서하집'이 여기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사진은 국가유산청에서 가져옴.

    들어갈 때 안 보이던 단풍이 뒤돌아 나올 때 보인다. 더 짙어지면 소란스럽고 지금이 딱 좋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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