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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양 매화마을
    풍경 landscape 2023. 3. 18. 18:06

    섬진강유래비, “고려말에 왜구들의 노략질이 극심하였는데 한 번은 왜구들이 강 하구로부터 침입해 오자 진상면 섬거에 살던 두꺼비 수 십만 마리가 섬진 나루터로 몰려와 울부짖자 왜구들이 놀라 물러갔다. 또 한 번은 강 동편에서 왜구들에 쫓긴 우리 병사들이 섬진 나루 건너편에서 꼼짝없이 붙들리게 되었는데 두꺼비 떼들이 강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놓아 우리 병사들을 건네주었다. 뒤쫓아 온 왜구들도 두꺼비 등을 타고 강을 건너던 중 강 한 가운데에 이르러 두꺼비들이 그대로 강물 속으로 들어가 버려 왜구들이 모두 빠져 죽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다사강, 모래내, 두치강 등으로 불리던 이 강을 두꺼비 ‘섬(蟾)’자를 써서 섬진강이라 부르게 되었다.

    수월정(水月亭) 조선 선조때 나주목사를 지낸 정설(鄭渫,1547-1643)이 만년을 보내기 위해 1573년 건립했다. 수월정삼십영水月亭三十詠), 수월정기(水月亭記)를 지었다. 수월정기는 정철鄭澈)의 작품이라고도 하고 수은 강항(姜沆)의 작품이라고도 한다. 광양 수월정의 수월정기 원작자는 누구일까? < 독자기고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광양만신문 (gymnews.net)  현 건물은 1999년 광양시에서 옛터에 축조. 섬진 마을(일명 매화마을) 초입. 괴산 칠성면 사은리 산막이길에 있는 노수신의 적소 이름도 수월정(水月亭)이다.

    수월정(水月亭)유허비, 1971년 정설의 후손들이 수월정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광양 다압 섬진진터 석비좌대(두꺼비 석상), 문화재자료262호, 섬진진터는 임란때 이순신 장군의 군사매복지로 선조36년에 도청창(都聽倉), 숙종때 통제영직할진을 거쳐 고종32년에 폐쇄되었다. 석비는 현재4개가 남아 있으며 수군별장의 공적비 좌대로 추정된다. 길이173cm 높이72cm이며 비신이 들어갈 홈이 파여 있다. 석조 두꺼비상은 치아가 빠진 입모양, 간략한 발, 독특한 머리 모양으로 투박한 조선시대 조각기법의 특징을 보여준다. 문화재자료262호. 

    은어, 재첩과 더불어 섬진강의 3대 명물 벚굴이 제철이다. 강에서 자라는 굴이라고 강굴이란 이름도 있고, 또 벚꽃 필 때 맛이 좋아 벚굴이라고도 불리는 섬진강 벚굴. 군침을 삼키며 상가를 휘돌아 지나야 매실농원에 다다른다. 

    오르막에 자엽자두가 먼저 들어온다

    광양매화문화관

    백매

    청매

    홍매

    홍쌍리매실가가 자랑하는 매화나무 보호수. 홍쌍리 시부가 1917년 식수하여 오늘날의 매실가를 이루게 한 원조다.

    진달래도 보인다 환장하겄다.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 전기(田琦, 1825-1854) 作’, 29.4×33.3cm, 종이에 채색, 19세기 전반, 화면 아래쪽에 당시 역관이자 개화파의 중요 인물인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1879)에게 그려준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다압면 섬진강매화로 1563-1(도사리548) 마을 골목에서 만난 금두꺼비

     

    섬진강(蟾津江) 두꺼비 설화

     

    이명 섬여(蟾蜍), 축추(鼀鼀), 추시(䵸𪓻), 섬제(詹諸), 나하마(癩蝦蟆)

    섬진강의 생태 환경을 중심으로 한 지명유래담으로 전승되다가 왜구 출몰기의 역사적 사건과 합쳐지면서 확장된 설화이다. 섬진강은 본래 다사강 혹은 모래내 두치강(豆恥江) 등으로 불렸다.

    고려 말 섬진강 하구에 왜구가 쳐들어왔다. 그러자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섬거(蟾居)마을에 살던 수십만 마리 두꺼비가 섬진나루에 몰려와 울부짖어 왜구를 물리쳤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우왕이 1385(우왕 11)에 섬진강이라는 이름을 내렸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또 한 번은 강 동편에서 왜구에 쫓기던 우리 병사들이 꼼짝없이 붙들려 죽게 되었는데, 두꺼비 떼가 강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놓아 건너편으로 건너게 해 주었다. 뒤쫓아 온 왜구도 두꺼비 등을 타고 강을 건너던 중, 이들이 강 한가운데 이르자 두꺼비 떼가 모두 강물 속으로 들어가 버려 왜구만 빠져 죽었다. 그래서인지 이곳 사람들은 마당에 두꺼비가 나타나면 고수레라고 말하며 두꺼비에게 음식물을 던져 준다.

    변이

    섬진강 두치진 나루터에 마음 착한 아가씨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장마가 진 어느 날 부엌으로 뛰어든 두꺼비가 가여워 보살펴 주었다. 겨울이 와 모든 두꺼비가 겨울잠을 자러 가도 이 두꺼비는 부엌 아궁이 옆을 떠나지 않았다. 삼 년 후 두꺼비는 큰 솥뚜껑만큼 커졌다. 어느 날 밤 섬진강 상류에 폭우가 쏟아져 물이 불어나 아가씨가 익사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히 아가씨는 두꺼비를 타고 강기슭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물살과 사투를 벌였던 두꺼비는 강기슭에 도착하자마자 죽어 버렸다.

    https://blog.naver.com/donginthink9/222704312068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120751&cid=50223&categoryId=5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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