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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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비래사(飛來寺)와 옥류각(玉流閣)문화 culture/불교문화 Buddhist culture 2017. 8. 11. 00:08
비래사 대적광전에 봉안된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조선 효종2년인 1651년 무염스님이 제작하였는데 유형문화재 제30호이었다가 2014년 보물 제1829호로 승격되었다. 비로자나불은 손 모양이 특이한 지권인(智券印)인데 금강계(金剛界) 대일여래(大日如來)가 만드는 인상(印相)이란다. 오른손이 왼손 엄지를 감싼 모습인데 비래사의 지권인은 반대로 왼손이 오른손을 감싸고 있어 고창 선운사 비로자나불과 비슷하다. 오른손은 불계를 왼손은 중생계를 나타내며 법으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라고 하나 손의 위치가 다르니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중화 3년(883)에 제작됐다는 묵서명이 발견된 해인사 목조비로자나좌불은 보물 제1778호이다. 지난 목요일에 식장산 산행을 하던 중 소낙비로 불어난 계곡이 폭포수가 되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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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송애당 松崖堂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16. 3. 9. 13:03
조선 효종 때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송애당(松崖堂) 김경여가 지은 팔작지붕 형태의 별당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가 환도 후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호 역시 '눈서리를 맞아도 변치 않는 소나무의 굳은 절개와 우뚝 선언덕의 굳센 기상을 마음에 간직하겠다'는 뜻이다. 대전시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월류정 http://ktk84378837.tistory.com/1707 http://ktk84378837.tistory.com/4344 이지당 http://ktk84378837.tistory.com/1845 남간정사 http://ktk84378837.tistory.com/4417 http://ktk84378837.tistory.com/407 ht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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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쌍청당 雙淸堂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16. 3. 7. 22:07
은진송씨대종가 안내문은 세워져 있으나 다른 문화재처럼 문이 굳게 잠겨 있고 문틈을 기웃거리니 사람 사는 흔적이 보인다.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의 당호는 원일당인데 사랑채이다. 은진 송씨 중시조이며 여말선초에 부사정(副司正, 종칠품의 무관직)을 지낸 쌍청당 송유(宋愉)가 회덕으로 낙향한 후 세종 14년(1432)에 건립한 별당이다. 조선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붕어(崩御)한 뒤 위패가 태조묘(太祖廟)에 부(附)해지지 않자 이를 한탄하는 글을 올리고 낙향하였다고 한다. 왕비 신의왕후의 아들인 이방원이 왕위에 올라 신덕왕후 흔적지우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중종 19년(1524)에 1차 중수를 거친 이래 총 7차례에 걸쳤고 지금의 집은 후손인 이사동으로 옮겨진 절우당의 주인 송담 송남수(宋柟壽)에 의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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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관동묘려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15. 8. 18. 11:05
대청호를 바라다 보는 대전 동구 마산동에 위치한 관동묘려의 후경. 솟을대문. 담너머로 보는 관동묘려. 대전문화재자료 37호이다. 관동묘려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목백일홍이 한창이다. 담장엔 한가로이 잠자리 한 마리. 담너머로 보는 관동묘려. 관동묘려 안내문. 송명의유허비, 송대원의 증손인 송명의는 회덕에 살기 시작한 은진송씨 최초의 인물이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다 처가인 회덕으로 내려온 것이다. 현종 원년 (1835)년 그의 14대 손인 송기정이 세우고 고종 13년 (1876년)에 비의 규모를 크게 하여 다시 세웠다. 은진송씨는 당나라 호보상서를 지낸 송주은의 후손으로 그 10세가 되는 고려조 판도판서 송자영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시조는 송대원으로 알려져 있다. 관동묘려(寬洞墓廬)는 고흫유씨를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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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남간정사(南澗精舍)의 봄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15. 4. 8. 22:56
남간정사(南澗精舍)는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을만큼 아름답기도 하고 건축사적 의미가 있는 건물이다. 남간은 주자의 시에서 왔다는 운곡남간(雲谷南澗)의 준말이라는데 양지쪽 산골짜기 개울물 정도의 뜻이니 뒤편 고봉산에서 흘러내리고 있다. 이 정사에서 우암은 유림과 제자들을 모아 학문을 강학했고 그의 사후에는 제자들이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목판으로 새긴 곳이다. 정조 임금이 서인과 노론의 영수이던 우암을 존숭하여 송자라 하였고 그의 글을 모아 발간한 책이 송자대전이다. 보수가 끝나 새 건물 같은 남간정사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소제동 방죽 옆에 구기자와 국화를 심었던 기국정(杞菊亭)을 옮겨온 것이다. 회덕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동춘당 송준길(1606~1672)과 우암 송시열(1607~1689)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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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의 동춘당은 보수중이라...종가풍경 landscape 2012. 12. 8. 21:23
송준길의 종가가 있는 곳은 행정지명도 송촌동이요, 주변아파트 단지도 ‘선비마을’이다. 종손이 기거하는 곳으로서 사대부가의 상징이랄 수 있는 정침, 사랑채, 가묘, 별묘 등을 온전하게 갖춘 종택은 우리나라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송준길의 호 동춘당은 별당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먼 숙질간으로 한집안인 데다 두 사람의 할머니가 자매간으로 외척이었다. 그러다 보니 송시열이 어려서부터 이곳에 와 송준길과 동문수학하며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예학(禮學)을 계승하게 되었는데 둘의 성격은 너무나도 달랐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가장 많이 오른 인물로서 조선 후기 모든 논쟁의 진원지였으며 사후에도 공과(攻過)가 거론될 만큼 ‘화약고’였던 데 반해, 송준길은 그의 호 동춘당(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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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의 동춘당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11. 12. 14. 19:53
동춘당(同春堂)은 송준길의 부친인 송이창이 세웠으나 송준길(1606~1672)이 40세 되던 해에 중건한 별당 건물. 동춘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一자 모양의 평면으로 된 단층팔작지붕이며, 앞면을 널찍하게 다듬은 돌로 쌓은 단층기단 위에, 다듬은 돌 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워 주두 없이 직접 굴도리를 받친, 민도리집 양식이다. 대청과 온돌이 접합되었으며 고상식(高床式)으로 꾸몄음에도 적절한 비례감을 확보하였고 처마에 날아갈 듯한 유려한 지붕곡선이 특징이다. 건물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별당건축물로 규모도 크지 않고 송준길의 선비 기질을 잘 나타낸 간소한 건물이다. 현재 보물 제209호. 현판은 송준길 사후 우암 송시열이의 쓰고 인(仁, 春)을 구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함. 포저(浦渚) 조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