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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석탑과 왕궁리오층석탑문화 culture/불교문화 Buddhist culture 2019. 4. 14. 22:59
1989년 7월 17일.
익산 미륵사지 석탑(益山 彌勒寺址 石塔), 국보11호,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던 익산 미륵사는 무왕(武王, 600-641) 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는 전형적인 1탑1금당의 백제식 가람배치와 달리 세 개의 탑과 금당 등으로 구성된 3탑3금당의 독특한 배치형식이다. 이 미륵사지 석탑은 세 개의 탑 중 서쪽에 위치한 탑이다.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창건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석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것이다.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었다. 창건당시의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으며, 17~18세기 이전 1층 둘레에 석축이 보강되고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운 상태로 전해졌다.
남아있던 6층까지의 높이는 약 14.2m이고 상·하 이층으로 구성된 기단의 전체 폭은 약 12.5m이다. 1층은 각 면이 3칸으로 구성되고 가운데 칸에는 문을 내달아 계단을 통해 사방으로 통하게 하였다. 기둥석은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민흘림기법과 양 끝 모서리를 약간 높인 귀솟음기법이 반영되어 있다. 기둥석 하부에는 목조건물에서처럼 별도의 초석이 있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상ㆍ하 인방석(引枋石)과 기둥 상부에 평방석(平枋石), 포벽석(包壁石) 등이 구성되었다. 옥개부(屋蓋部)는 목조건물의 지붕처럼 모서리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고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는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한편 석탑의 1층 내부에는 ‘十’자형 공간이 조성되어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출입이 가능하며, 탑의 중심에는 여러 개의 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린 기둥(심주)이 4층까지 연속된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석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며, 2009년 1층의 첫 번째 심주석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의 기록을 통해 639년이라는 석탑의 건립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졌다.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이듬해 해체수리가 결정되었고 2001년 해체조사에 착수하여 2017년 조립공정이 완료되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고대의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충실하게 잘 보여준다. 또한 고대건축의 실제 사례로써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우리나라 불탑건축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화재이다. -문화재청미륵사지 석탑 / 이재봉
벼락 맞아 기운 탑을 수리하다가
오래된 흑백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웬 낯선 여자가 서동과 팔짱을 끼고 서 있다
선화공주는 분명 아니었다
가짜 뉴스까지 퍼트리며
서동이 꾀어내고 어르는 바람에 얼떨결에
결혼까지 한 선화
마를 캐며 가난하게 살던 서동
왕이 되더니 선화를 버리고 사비성의 부잣집
딸과 또다시 결혼을 했단 말인가
마땅히 벼락을 맞아야지
조강지처를 버린 죄 아내를 능멸한 죄
탑이 그냥 벼락 맞을 리 없어
그것도 두 번씩이나
미륵사지 당간지주, 보물236호
18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발전된 복원기술로 서탑(국보 제11호)은 6층으로 복원하였으나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9층동탑은 1992년에 복원하였으나 실패작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https://ktk84378837.tistory.com/945
쌍릉, 위는 무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아래는 선화공주의 능으로 추정된다는 안내문이 있다.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무덤으로,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 쌍릉이라고 부른다.
무덤 안의 구조는 백제 후기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이며, 무덤의 봉분과 돌방의 크기가 큰 북쪽의 것을 대왕묘라 하고, 남쪽의 작은 것을 소왕묘라고 부른다. 크기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2기 모두 원형의 봉토무덤으로 흙을 높이 쌓아 만든 봉분 이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다.
1916년 조사할 당시 무덤은 이미 도굴이 되어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대왕묘 안에서 나무로 만든 관이 일부 발견되어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나무관은 바닥면보다 위쪽 면이 약간 넓고, 뚜껑의 윗면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관고리에는 8쪽의 꽃잎을 가진 연꽃무늬가 있었던 것도 확인되었다.
유물과 현실의 구조 및 형식이 부여 능산리 고분과 비슷하여 백제 후기의 것이 틀림없으며, 근처에 미륵사가 있어서 미륵사를 처음 만든 백제의 무왕과 그 왕비인 선화공주의 무덤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으나 뚜렷한 증거는 없다.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91205/98676351/1익산 왕궁리 오층석탑(益山 王宮里 五層石塔)은 국보 제289호인데 부여 정심사지오층석탑과 축조연대를 놓고 분분하다.
마한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진 익산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으나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그 시기가 비교적 뚜렷이 밝혀졌다. 즉,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이 석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유물들은 국보로 일괄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이 탑 밑부분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주목을 끌고 있다.- 문화재청그러거나 말거나 저 균형과 안정과 온화와 역사를 보아라. https://ktk84378837.tistory.com/6189
석탑 주변에서 왕궁사, 관궁사, 대관관사, 대관궁사 글자가 적힌 기와가 출토되었고 지금도 발굴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 ktk84378837.tistory.com/1749 원주 거돈사지 ktk84378837.tistory.com/8238 원주 법천사지 ktk84378837.tistory.com/8239
원주 흥법사지 ktk84378837.tistory.com/8237 익산 미륵사지 ktk84378837.tistory.com/8702
님 오시는 아침- 선화공주 / 문효치
저 지평선 끝에
일어서서 걸어 오시는 이
옷자락, 물들여 나부끼는
어둠을 털어내고 다가오시는 이
햇빛,
거대한 악기 속을 지나 나오며
부신 선율 만들고
선율,
또한 휘감겨 세상을 밝혀
그 손목 잡고 오시는 이.
우주의 끝에 씻어 두었던
맑은 천년
그 어깨에 날개 달아
날아 올리며 띄워 올리며
가슴 가슴 속에
볕드는 방.
방으로 들어오시는 이.
그 신발 끄는 소리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님 오시는 아침.
탑 / 송병숙
미륵자지를 지나며
중심이 왜 중요한지
알겠다, 팔을 벌려 품을 키워야
높아져도 외롭지 않음을
오늘의 결말이 모두의 정점은 아니어도
탑은
늘 중심을 우러른다 견딘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흔들린 만큼 균열져
허공이 높을수록 두려움도 컸을
한 사람을 알겠다
중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순간들을
빈 항아리처럼 엎어놓고 오래된
바람의 말을 조심스레 쓸어보는 이 곳
한 계단 한 계단 쌓아올린 손길이
마지막 보주를 탑신에 올려놓을 때
번뇌가 몰려와 온몸을 회오리로
휘감을 때 탑은
아랫돌이 윗돌을 견딜 때에만 붙여지는
이름이란 걸
막 빠져나온 모퉁이돌 하나 쏟아지는
허공을 받아 안는다
곁에 있던 작은 돌멩이 하나 출렁
몸을 던져 그 틈을 메운다
휘영청 솟아오른 탑은
한 팔과 한 팔이 걸리는 곳에서 피어나는
이름이란 걸
알겠다, 오래 지켜온 허방의 힘으로
겉은 흔들려도 중심을 버리지 않는,
한 사람을
느리게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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