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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스카데라(飛鳥寺)문화 culture/해외 foreign travel 2016. 2. 2. 00:05
에도시대[江戸時代]에 재건된 강당(講堂). 이 강당 안에 석가대불이 안치되어 있다.
본당 측면에 걸린 연기설화.
범종.
사방 200m의 거찰이었음을 나타내는 아스카데라지의 빈터.
담장 밖에서 본 일본 최초의 본격적 사찰은 법흥사(法興寺)로 간고지(元興寺), 아스카데라(飛鳥寺)를 거쳐 지금은 안고인(安居院)이라 부른다.
596년 도래인으로 알려진 소가노 씨사로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세워진 법흥사(法興寺)라는 사찰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아스카지는 순전히 백제에서 파견된 건설 토목 기술자, 와박사, 확, 승려가 지은 사방 200m의 거찰이다.
처음에는 1탑1금당의 백제식 가람배치로 구상하였는데 595년 고구려승 혜자가 오면서 1타13금당의 고구려식으로 바뀌었다.
쇼토쿠태자에 의해 관사로 세워진 사찰은 아스카데라보다 앞선 시텐노지(四天王寺)인데 스이코천왕 원년(593년)에 세워졌다.
아스카데라 인근 농가. 텃밭을 가꾸는 할머니, 개를 산책시키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평화롭다.
나라현에 있는 아스카는 592년 스이코(椎古) 천황 즉위 후 118년간 도읍으로 일본 고대문화 발상지이다.
중국대륙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부터 일본에 온 도래인 중에는 선진지식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많아 왜(倭) 입장에서는 호의적이었다.
5세기에 백제에서 이주한 궁월군(弓月君)은 양잠과 기직(機織)을 전하였다. 이후 하타씨[秦氏]라는 가바네[姓,성씨]를 하사받았고 그 자손들이 미개척지인 교토[京都]를 개척하여 그곳에 정착하였다. 박사(博士) 왕인(王仁)이 논어와 천자문 등의 유교와 한자를 전하였고, 왕인의 후손 후가와치노후미씨[西文氏]는 한문과 학술이 뛰어나 후히토씨[史氏]라는 가바네를 하사받고, 후히토베[史部]로서 공무(公務)의 기록, 재정의 출납, 징세 사무,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업무에 종사하였다. 6세기까지 일본 열도에서 한문을 해독하고 문장을 작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상당수가 도래인이었다.6세기에 도래한 금래한인(今來漢人, 4세기와 5세기에 걸쳐 이주했던 옛 도래인과 구분하기 위하여 6세기에 이주했던 도래인)들은 그 이전에 이주한 옛 도래인들을 압도하면서 소가씨[蘇我氏] 가문이 정권을 잡았던 6세기 후반부터 활약하였다. 백제에서 파견한 오경박사(五經博士)가 유교를 전하였고 함께 전해졌던 의학, 역학, 불교는 7세기 아스카문화[飛鳥文化]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종이와 묵, 그림도구를 전달한 것도 7세기 경이다. 이와 같은 한자와 학술이 일본에 전해 지면서 성장한 역량을 바탕으로 6세기 중반에는 대왕의 계보인 《제기(帝紀)》와, 조정의 설화와 전승을 담은 《구사(舊辭)》도 편찬되었으나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 현재 전해지지는 않는다.6세기 중엽 이후의 도래인은 백제인이 단연 많은데, 이는 당시 백제가 고구려와 신라를 상대로 대치하고 있었던 상황 때문이다. 백제는 일본에 문물을 전해주는 대신에 고구려와 신라와 대적할 수 있도록 일본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이끌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백제의 요청으로 군사를 파견하거나 식량, 말, 무기 등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백제와 일본은 서로의 필요에 따라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5세기에서 6세기 다양한 이유로 일본에 건너간 도래인들은 선진기술과 학문을 일본에 전파하여 일본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당시 일본 문화가 형성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래인[渡來人]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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