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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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각(普信閣)과 청계천 광통교문화 culture/역사 전통 history tradition 2022. 4. 24. 16:02
보신각(普信閣)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에 있는 전통 2층 한옥누각으로 보신각종을 걸어 놓기 위해 지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구조다. 1396년(조선태조5년) 창건했다가, 1869년(고종6년), 1979년 재건했다. 보신각 터(普信閣 터)라는 명칭으로 1997년 서울시기념물 제10호로 지정. 보신각종은 본래 세조때 주조하여 원각사에 있다가 광해군 때 종각복구하면서 이전한 것이다. 1895년(고종32)에 보신각이란 편액이 걸린후 보신각종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래의 종을 보존하기 위해 1985년에 새로운 종을 주조하여 지금에 이른다. 매년 1월1일 밤12시를 기해 33번 종을 치는 제야의종 타종행사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새해맞이 행사이다. 제야 / 김영랑 제운밤 촛불이 찌르르 녹아버린다 못 견디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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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이순신순국공원과 충렬사문화 culture/역사 전통 history tradition 2021. 9. 17. 22:18
이충무공전몰유허비 이충무공사당 관음포 냄새가 고약하기로 소문난 계요등 노량대교는 학익진을 재현한다는 설명이 있다. 임진왜란 최후의 대규모 해전으로 이순신이 전사한 마지막 싸움이다. 1597년 명량해전에서 크게 패배한 일본은 11월 왜장 고니시 등이 이끄는 500여 척의 왜선이 노량수로와 왜교 등지에서 공격해 왔다. 200여 척의 배밖에 보유하지 못했던 이 전투에서 200여 척의 일본수군이 격파되고 패잔선 50여 척만이 관음포 방면으로 달아났다. 이순신은 도주하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격파하여 포위되었던 명의 장수인 진린을 구하고 적을 추격하다가 왜적의 흉탄에 맞고 쓰러졌다. 이순신의 유언으로 그의 죽음은 노량해전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에야 알려졌다. 노량해전의 승리는 정유재란을 끝내는 데 중요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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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척화비(斥和碑)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15. 12. 3. 15:56
옥천 척화비 역시 충북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어 삼양리 산4-2 에 위치하고 있다. 격세지감(隔世之感), 상전벽해(桑田碧海). 창상지변(滄桑之變), 천선지전(天旋地轉)이라 해야 하나.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겪은 흥선대원군이 쇄국의 결의를 다지고,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외세 침입을 경계하도록 하고자 1871년 4월에 서울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 세운 비석이다. 척화비는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발하면서 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가고 비로소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상당수 철거되거나 땅에 묻었다. 척화가 가져온 한반도의 역사적 의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