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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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海美邑城)문화 culture/역사 전통 history tradition 2023. 4. 12. 21:52
해미읍성 진남문(鎭南門), 조선초 태종17년(1417)-세종3년(1421)에 서해안 방어를 위해 축성되었으며 충청병마절도사가 지휘하던 곳이다. 고창읍성, 낙안읍성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읍성이다. 왜구를 막기 위해 성이지만 1,000여 명의 천주교 신도들이 잡혀와 고문 받던 순례지로 더 유명한듯 하다. 사적 116호. 조선시대 병장기 잘 가꾼 단풍나무 해미읍성 회화나무. 기념물172호, 충청도사투리로 호야나무, 선비를 상징하는 학자수(學子樹), 수령3백년 추정. 1790-1880년대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의 동쪽끝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사줄이 박혀 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폭풍에 부러진 곳이 부패되어 외과수술을 거쳐 보호되고 있다. 옥사(獄舍) 민가(民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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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樂安邑城) 민속마을문화 culture/역사 전통 history tradition 2022. 10. 3. 16:45
낙안읍성 낙풍루(樂豊樓), 낙안읍성 동문에 해당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태조 6년(1397) 낙안 출신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 김빈길(金贇吉, 고성김씨)이 흙으로 성(토성)을 쌓았고, 세종 6년(1424) 석성(石城)으로 개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총길이 1410m, 높이 4~5m, 성벽 상단 폭 2~3m로 원형훼손이 가장 적은 읍성으로 알려진다. 지방의 정치·경제·문화·교육의 중심지요, 군사적 기능을 가진 읍성은 왜적 출몰이 잦은 충청·전라·경상도 해안 인접지역 58개소와 내륙의 요충지에 축조하였고, 전국에 179개소나 되었다. 그러나 경술국치(1910) 때 조선총독부령 제1호에 의해 관아와 함께 대부분 헐렸다고 한다. 낙안의 '진산'으로 일컫는 금전산(670m) 자락에서 흘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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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마을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12. 12. 3. 13:51
5월에 찾은 양동良洞 마을 입구에서 본 전경.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민속마을이다. 한국의 씨족 마을은 조선시대(1392년~1910년) 초기에 형성되어 조선후기에는 전체 마을 중 약 80%을 차지하였다. 그중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양동은 손씨의 선조인 손소(孫昭)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살던 장인인 풍덕유씨 유복하(柳復河)의 상속자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월성손씨(月城孫氏)의 종가를 지어 번성하게 되었다. 풍덕유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문중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손씨의 딸은 이 마을의 여강이씨(驪江李氏) 번(蕃)에게 출가하여 조선시대 성리학 정립의 선구적 인물인 이언적(李彦迪)을 낳아 번성하게 되면서 현재는 월성손씨 40여 가구, 여강이씨 70여 가구가 마을을 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