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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 하회마을
    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18. 6. 28. 23:49

    하회마을 입향조인 공조전서 풍산유씨 류종혜(柳從惠)기적비. 종혜는 서애 유성룡의 6대조이다. 하화마을은 고려 중엽부터 형성되었으나 고려말 풍산유씨 류종혜(柳從惠)가 입향하면서 유씨집성촌으로 정착되었다. 하회(河回)는 마을을 끼고 물이 도는 지역에 형성되어 풍광이 아름답고 공기가 맑고 사람들이 좋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엘리자베드 영국여왕이 다녀간 바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대한민국 최고의 전통가옥보존마을이다.

     

    양진당으로 향하는 골목 어느 매점은 안동의 상징인 하회탈이 주렁주렁 포도송이처럼 걸려 있다.

     

    하동고택 예천 용궁현감을 역임한 유교목(柳敎睦)이 1836년(헌종 2)에 건축국가민속문화재 제177호. 본채와 달리 대문간채는 초가로 되어 있다.

     

    정겨운 흙돌담과 강렬한 태양 아래 접시꽃

     

    자나는 나그네가 궁금했는지 홍안의 낭자가 담장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양진당(養眞堂) 보물306호, 풍산류씨 겸암파대종택, 풍산유씨 족보를 최초로 완성한 양진당 柳泳(1687-1761)이 지은 집이다. 서애 유성룡의 형인 겸암(謙唵) 유운룡(柳雲龍,1539-1601)의 부친인 유중영(柳仲郢)의 호를 딴 입암(立巖)고택은 하회마을에서 보기 드문 남향집. 양진당은
    마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하회 류씨 대종택이며 서애 류성룡의 맏형인 겸암 류운룡 종가이다. 입향조인 류종혜가 처음 터를 잡은 곳이며 겸암 생전에 지은 집으로 흔치 않은 조선 전기 주택이다. 하회에서는 드문 정남향집이며 보물 3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침은 ㅁ자형 안채와 그 북쪽에 위치한 일자형 사랑채, 그리고 동쪽으로 역시 ㅁ자형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세 건물은 평면상 모두 연결되어 있다. 솟을대문으로 들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사랑채, 그리고 6칸의 대청도 있는데, 정면에는 석봉 한호의 글씨로 사랑채 당호인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고 씌어있는 편액이 걸려 있다. 6칸의 대청에 사랑방이 2칸이 붙어있고, 그 왼편과 서쪽에 각각 방 2개를 두었다. 대문의 안쪽에 행랑채가 있고, 맨 오른쪽과 동쪽 끝은 온돌방이며, 그 다음이 외양간인데, 대문에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와 마루로 연결되어 서쪽으로 안채가 있다. 안채는 전형적인 ㅁ자형 집으로 사랑채 바로 옆으로 난 중문을 통해서 들어간다. 안마당에 들어서면 역시 막돌을 번듯하게 쌓은 기단 위에 집을 지었는데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규모가 큰 상류주택임을 알 수 있다.
    양진당에는 특이하게도 사당이 두 채가 있다. 류중영과 류운룡을 불천위로 모시는데, 부자를 한 사당에 모실 수 없다 하여 류운룡을 별묘로 모셨기 때문이다.

     

    충효당(忠孝堂). 유서애 성룡(1542-1607)의 종택으로 손자와 제자들이 지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뜻. 보물414호. 충효당은 양진당 길 건너에 류성룡의 종가이며 남촌을 대표하는 충효당이 있다. 양진당과 충효당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고 하지만 정면으로 맞대고 있지는 않고 서향하고 있다. 본래 단촐한 살림집이었던 것을 서애의 문하와 후인들이 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중수하였다고 하는데 서애의 증손 의하가 다시 확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대청이 보이고, 충효당이라고 전서로 쓴 편액이 걸려 있는데, 조선 중기의 명필가로 꼽히는 미수 허목의 글씨이다. 다른 종가의 사랑채들이 대개 기단을 높이 쌓거나 누마루처럼 띄워서 권위적인 입지를 취하는데 비해 이 충효당 건물은 기단이 낮아 눈높이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왼쪽 2칸은 온돌이고, 가운데 2칸은 트인 마루이며, 나머지 오른쪽 2칸은 판벽을 쳤다.
    안채는 왼쪽 구석진 자리에 부엌을 두었고, 부엌 오른쪽에 큰 안방을, 그 곁이 대청이다. 안대청 오른쪽 뒤에 작은 방이 하나 있고, 그 앞에 작은 마루, 그리고 방 2칸이 나란히 있다. 사랑채와 통하도록 되어 있으나 방이나 마루로 연결되지 않아 신을 신고 후원 문을 통해 드나들었다. 정면 7칸 측면 7칸으로 거의 정방형이다.
    사당채는 몸채 방향과 달리 남향인데, 삼문이 세워져 있어 의정부 영의정 사당답게 위용을 떨치고 있다. 사당 옆에는 서애 기념관인 영모각이 시멘트 냄새를 풍기고 서 있다. 문간채는 일자형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대문이 있다. 대문 왼쪽에 방 한 칸과 마루 한 칸이 있는데, 이것은 이 집의 사랑채이고, 대문 오른편의 방 한 칸은 문간방이다.
    대문간으로 독립건물인 행랑채는 솟을대문과 같이 붙어 사랑채와 나란히 두었는데, 류성룡의 8대손인 류상조가 병조판서를 제수 받고서 불시에 닥칠 군사들을 맞이하려고 급조한 건물이다. http://weekly.hankooki.com/lpage/nation/200610/wk2006102315094037070.htm

     

    북촌댁은
    양진당과 더불어 하회 북촌을 대표하는 북촌댁은 중요민속자료 제 84호이다. 모두 54칸으로 하회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살림집이다.
    경상도 도사를 지낸 류도성이 1862년에 창건하였는데 ㅁ자형 몸채와 별당과 사당, 대문간인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남향한 대문간으로 들어서면 사랑채가 마주한다. 그 가운데로 난 중문을 통해서 안마당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집 전체는 동향으로 ㅁ자형 몸채는 서북쪽으로부터 부엌, 안방, 대청, 웃상방이 나란히 있다. 방들 앞으로 쪽마루가 있어 통로 구실을 한다. 부엌, 광 등 시설 공간이 많아 '아흔 아홉 칸집'으로 불렸던 북촌댁의 경제력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랑채는 부엌을 사이에 두고 큰사랑과 작은사랑으로 나뉘어 있다. 큰 사랑방과 대청 앞쪽으로 반 칸폭 툇마루를 내고 숫대살로 된 난간을 달았다.
    별당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규모가 큰 건물이다. 접객용 이어서인지 굴도리에 두리기둥을 써 살림집치고는 장식적이다. 대개 막돌로 가지런히 쌓은 기단과는 달리 반듯하게 자른 사고석을 층층이 질서 있게 쌓아 단정하면서도 엄격한 인상을 준다. '북촌유거'와 '수신와'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남촌댁은
    충효당과 함께 남촌을 대표하는 남촌댁은 중요민속자료 제 90호이다. 1797년에 형조좌랑을 지낸 류기영이 건립하였는데 1954년에 불타 현재는 문간채와 별당, 사당만 남아있다. 남은 것 가운데 담장 밖에 뚝 떨어져 벽돌로 쌓은 큰 굴뚝이 보인다. 현재 그 몸채가 전하지 않아 잘 알 수는 없으나 굴뚝의 규모로 보아 집의 규모도 작지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몸채와 떨어진 별도의 공간에 별당채가 있다. 본래 큰 대청만 있던 건물이었는데, 후대에 개조해서 부엌이 달려 있다.

    이외에 규모가 있는 살림집으로 작천고택, 주일재, 하동고택들이 모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집들이다. 한편 이들 기와집들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면 초가집들이 있는데, 이는 종가집에서 부리던 사람들이나 소작인들이 살던 살림집으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이 이런 구분을 지어냈음에도 마을 안에서 잘 조화되어 있다.

     

    겸암정사(謙菴精舍). 부용대(芙蓉臺) 서쪽에 위치한 겸암정사는 겸암 유운룡(柳雲龍)이 1567년에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지었다. 퇴계 이황이 쓴 현판이 있다. 부용대 동쪽에 겸암 유운룡의 동생인 서애 유성룡이 지은 중요민속문화재 제88호 옥연정사(玉淵精舍)가 있는데 징비록(懲毖錄,국보 제132호)을 집필한 곳이다.

     

     

    태백산맥의 끝자락이라는 부용대(芙蓉臺), 하회마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그 유명한 겸암정사, 옥연정사 외에 화천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본 하회마을이 연꽃 같다고 해서 부용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강바람에 몸을 맡긴 기생꽃이 군무를 추자 덩달아 하회마을 양반들도 흥이 돋는양 도포자락 휘날린다.

     

    담연재(澹然齋)는 맑고 편안한 집이라는 것인데 연예인 류시원의 생가로 알려져 있고, 인간문화재인 도편수 신응수가 지은 전통가옥으로 유명한 곳이다. 담장 사각석에 낸 작은 구멍은 그 속에 돈을 넣어두고 가난한 선비나 나그네들이 욕심부리지 말고 적당한 양만 꺼내 쓸 수 있도록 해둔 장치라고 한다.

     

     

    원지정사(遠志精舍). 국가민속문화재 제85호로 부용대(芙蓉臺)를 바라볼 수 있도록 북향으로 지었다. 이 정사는 유성룡(柳成龍)이 부친 사후 낙향하여 서재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 34세 때 은거하였고, 병환 중 요양하던 곳이다. 하회마을 서쪽의 원지산(遠志山)에서 나는 원지(遠志)는 소초(小草)라 하며 애기풀을 가리킨다. 거담작용과 마음을 다스려 정신을 맑게 하므로 유성룡이 차로 만들어 즐겨 마셨다고 전한다. 정사의 이름도 여기서 비롯되었는데 비사두도초(非師豆刀草), 아지초(阿只艸)라고도 하며 애기풀과 비슷하다.

     

     

    원지정사 아래 소나무 보호수

     

    양반집 능소가 춘풍을 이기지 못하고 목을 길게 기웃거리는 고샅은 뜨겁다.

     

    하회뚝방길

     

    만송정(萬松亭) 솔숲, 부용대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해 겸암 유운룡이 1만그루 소나무를 심었다는 솔밭으로 천연기념물 제473호.

     

    만송정 숲에서 보는 부용대.

     

    작열하는 태양 아래 문화재답사하시느라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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