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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위 팔공산 석굴암(石窟庵)
    문화 culture/불교문화 Buddhist culture 2018. 6. 16. 09:55

    예전에 제2석굴암이라 불리던 군위 팔공산 석굴암 아미타여래삼존석굴, 국보 제109호이다. 

    신라 눌지왕 때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정진한 곳이며 문무왕 때 원효대사(元曉, 617~ 686)가 본존불 및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삼존불을 모셨다.

    국보24호인 토함산 석굴암보다 100여년 앞섰으나 늦게 발견된 연유로 석굴암 타이틀을 억울하게 빼앗겨 버렸다. 

    경북문화재자료 제241호. 이 모전석탑(模塼石塔)의 작자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1949년 탑신부에 자생한 소나무가 쓰러지면서 탑이 무너져 복원하였다. 분황사 모전석탑(국보30호), 의성 탑리모전석탑(국보77호), 영양 산해리모전석탑(국보187호), 의성 빙산사지오층석탑(보물327호), 구미 낙산리모전석탑(보물469호), 제천 장락동모전석탑(보물459호)이 유명하다. 왕궁리오층석탑에서 나온 금제방형사리함(국보123호)도 꼭 이 모양이었다, 

    ≪화엄경≫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불을 봉안한 비로전과 석굴암 전경.

    석굴암 입구의 돌담과 솔숲이 아담하고 정취가 있다.

    군위 팔공산 석굴암 http://ktk84378837.tistory.com/8537 인각사 https://ktk84378837.tistory.com/8538 

     

     

    배꼽 석굴암 / 김형윤 /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2라는 말이 슬쩍 거슬렸다. 그래도 내친김이라 차는 한티재를 거쳐 어느새 팔공산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말로만 듣던 군위 석굴암은 대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석굴암이라고 하면 신라 경덕왕 때 만들어진 경주 석굴암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그보다 1세기 전에 만들어진 석굴암이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에 있다. 군위 삼존석굴은 국보 제109호로 지정된 통일 신라 초기의 석굴암이다. 경주 석굴암이 먼저 발견되어 유명해지는 바람에 제2석굴암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형이 동생이 돼버린 셈이니 군위 석굴암으로서는 억울할 법도 하겠다. 사물의 이름은 대상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삼존석굴에 알맞은 새로운 이름이 붙여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존석굴은 팔공산 비로봉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암벽에 자리하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둥근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기에 그리 크지 않은 모습이다. 그 안쪽으로 그늘진 세 부처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야 석굴로 접근할 수 있는 계단이 막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단으로 올라가 동굴 안을 직접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모전석탑이 있는 아래쪽에서 석굴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부처는 지고의 경배 대상이니 그것이 마땅한 일일지 모른다. 신을 향한 간절함이 석굴을 더 깊어지게 했을까. 알 수 없는 신비스러움이 둥글게 번져간다.

    검색 사진을 통해 본 석굴 내부는 다락방처럼 안온하게 보였다. 중앙에는 엄숙한 표정의 아미타불이 앉아있고,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시립 해 있다. 이 땅에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려고 삼존불이 동굴 회의를 하는 중일까. 세상을 품은 자비로운 기운이 전해진다. 오랜 시간 동안 풍화된 거무스름한 암석에서 부드러운 온기가 느껴졌다.

    멀리 있는 앙증맞은 구멍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눈을 지그시 감으니 어린 시절 시골집이 그려졌다. 울타리를 따라 붉은색 접시꽃이 하늘을 향해 조롱조롱 피었다. 나는 맨발로 마당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잔병치레가 잦았던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 심한 열과 설사로 며칠 동안 앓아누웠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토사곽란이라고 했다. 병원이 멀기만 했던 시절이니 손도 못 쓰고 어머니는 얼마나 애가 탔을까. 사람들은 무당을 부르라고 야단이었지만 당신은 굿을 원치 않으셨다.

    심한 갈증 속 잠결에 물방울이 내 얼굴에 떨어지는 걸 느꼈다. 눈을 떠보니 어둠 속에서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당신의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점차 열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고소한 참기름을 떨어뜨린 흰죽을 내 입에 넣어주었다. 그 후 설사도 멈추고 다시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어머니는 네 아이를 키우며 집안일과 아버지의 일을 돕느라 늘 분주했다. 내가 아플 때만 어머니는 내 차지가 되었다. 배앓이를 할 때, 어머니는 내 엄지손가락을 실로 칭칭 감고서 손톱 위를 콕 따주었다. 검붉은 피가 나왔다. 많이 체한 거라며 따뜻한 손으로 내 배를 동그랗게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 손은 약손, 아기 배는 똥배.”잠들지 못하고 내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으면 호랑이가 나오는 해님, 달님 이야기나 아버지 눈을 뜨게 한 심청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배꼽을 내놓고 자면 안 된다고 발로 차버린 이불을 어머니가 꼭꼭 눌러 덮어주었다. 부드러운 음성이 차츰 멀어지고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기도 전에 나는 어머니 무릎에서 잠이 들곤 했다.

    다시 고개를 드니 카메라 줌인을 한 것처럼 갑자기 동굴이 눈앞으로 쓱 다가왔다. 석굴암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아래로 뻗은 검은 바위가 여인의 허리처럼 미끈해 보였다. 어릴 적 접시꽃 마당처럼 친숙하게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손이 배를 향하였다. 천천히 원을 그리며 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옛날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 그것은 배꼽이었다. 석굴은 안으로 쏙 들어간 배꼽이었다. 배꼽은 태아가 모태로부터 산소와 영양을 공급받는 탯줄의 흔적이다.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 담긴 이름이다. 석굴은 인간과 신을 연결해주는 부처님의 배꼽이었을까. 인간의 정신적 지향점이자 신에게 다가가고 싶은 열망의 상징물처럼.

    멀리서 바라본 석굴의 모습과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오버랩 되었다. 문득 군위 석굴암을 배꼽 석굴암이라 부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 델포이에는 배꼽이라고 부르는 돌이 있지만 아름다운 군위에는 배꼽 석굴암이 있다고 자랑할 수 있지 않을까.

    모전석탑 앞 참배단에서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고 있었다. 갖가지 애틋한 소원과 가족의 안위를 염원하는 기도가 배꼽 석굴암을 향하고 있다. 우리의 힘든 삶을 위로하는 어머니의 사랑처럼 가없는 부처님의 자비가 햇살처럼 온 누리에 퍼지기를 기원하였다. 어디서 왔는지 빨간 잠자리 한 마리가 머리 위에서 동그라미를 그리며 날아다녔다. https://cookcookbummul.tistory.com/7891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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