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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직필(正論直筆) 송건호문화 culture/역사 전통 history tradition 2018. 1. 1. 23:25
추소리의 부소담악(芙沼潭岳).
감입곡류(嵌入曲流), 기암절벽(奇巖絶壁), 연화부수(蓮花浮水), 병풍(屛風)바위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700m 길의의 기암절벽으로 옥천이 자랑하는 3대절경이다. 이원 외가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우암 송시열은 작은 금강산이라 예찬한 곳이다. 1980년 대청댐 건설로 야산이 물에 잠기면서 만들어졌다. 병풍처럼 펼쳐진 병풍바위 왼쪽 봉우리에 추소정(楸沼亭)이 우뚝하다.
이백리 맞은편 추소리 굴다리 앞에 송건호선생생가터 팻말을 보고서야 정론직필(正論直筆)의 대명사인 이 분이 고향 사람이었어? 옛지명이 고리산인 환산(環山)을 등반할 요량으로 갔다가 팻말이 보이기에 개념 없이 추소리까지 와도 보이질 않는다. 그때사 지도를 찾으니 비야리를 가리킨다.비야리(飛也里) 마을유래비
사도(私道)를 낀 생가지 입구의 안내문.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는 한국의 자유언론 수호를 위해 애쓴 진정한 언론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1956년 서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197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송건호의 정론직필(正論直筆)을 유신체제가 백지광고사태를 일으켜 대량해직사태가 일어나자 사직하였다. 이후 “씨알의소리”를 통해 민주화운동을 하였으며,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984년 해직기자들을 모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고 월간지 “말”을 발행하여 군사독재하의 '보도지침'을 폭로하는 등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88년 한겨레신문 사장과 회장을 맡았다. 1990년 고문후유증으로 생긴 파킨슨병으로 투병하다 2001년 사망했다. 민족지성의 탐구,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국현대인물사론 등의 저작을 남겼고, 1994년 호암상, 1999년 금관문화훈장,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청암(靑巖)은 대한민국 철강신화를 일으킨 포스코 박태준 회장(朴泰俊)의 호이기도 하다.
2016년에 세운 참언론인 송건호선생 생가터비
생가 위에 다시 지어진 지금의 집과 주변의 터를 구입해 정돈 복원할 계획이라는 마을 주민의 설명이 있었다.
송건호가 어려서 떠났기 때문에 마을 주민 중에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지금의 집주인도 여기서 살지 않아 폐가가 다 되었다.
입구에선 보이질 않아 사도 중간쯤에서 본 생가터.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과 제7대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김삼용이 지은 정론직필(正論直筆) 언론인 "송건호평전"이 있다. '한국 언론의 사표', '해직기자의 대부', '민족지성' 등 다양한 별칭이 따라다닐 정도로 한국 언론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한길사에서 펴낸 20권짜리 송건호전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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