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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 비림박물관과 대안탑(大雁塔)문화 culture/해외 foreign travel 2025. 6. 21. 22:43
서안비림박물관(西安碑林博物館), 송 나라 때 건축된 공자 사당 즉 공묘였던 곳에 중국의 희귀한 비석, 묘지명, 석각 등 1천여 점을 모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다.
경운종(唐景云钟), 중국에서는 “천하 제일종”이라 한다. 당 예종 경운 연간에 만들었기 때문에 경운종이라 부르며 청동으로 주물한 것이다. 높이 2.47m, 직경이 1.65m이고 무게가 6톤이다. 종 입구는 6개의 물결선으로 되어 있고, 종의 몸체에는 학, 비천, 용, 봉황, 맹수의 머리(兽首), 만초(蔓草), 채색구름 도안이 있다. 종뉴는 한 마리 맹수 머리로 하여 ‘포뇌(蒲牢)’라 한다. 종의 중앙에는 293자의 명문이 주물되어 있는데 당 예종 이단(李旦)의 친필이다. 명문 내용은 도교와 종소리에 대한 찬미이다. 중국 CCTV에서 울리는 새해의 종소리가 바로 이 종소리란다. 서안의 종루(鍾樓)에 걸려 있던 종이 바로 경운종의 복제품이다.
석대효경비(石台孝经碑), 청 장군 임칙서의 글씨다. 그런데 비(碑) 자의 획이 하나 부족하다. 임칙서는 1840년 아편전쟁 당시 서안에 왔다가 광동성으로 가는 중에 비림 현판을 남기며 전쟁에서 승리하면 다시 와서 점을 찍겠다고 했다. 그러나 영국의 승리로 끝나고 남경조약이 체결된 뒤 그는 신강에서 죽었다. 한 획이 없는 상태 즉 피휘결획(避諱抉劃) 글자는 '民'자의 마지막 획을 긋지 않았으며, '治'자의 마지막 획을 긋지 않은 것이다.
석대효경비 전액(篆額)에는 '大唐開元天寶聖文神武皇帝注孝經臺'
대관성작지비(大觀聖作之碑)는 1108년에 송 휘종 조길(趙佶)이 직접 짓고 쓴 것이다. 내용은 새로 도입한 과거제도에 관한 것이다. 당시 이 비를 모각하여 전국 각 주현의 학교에 두루 세웠다. 섬서성 건현 문묘에 있던 것이 지금 서안비림에 보존되어 있다.
공자상-청옹정12년(1734) 서안비림 제4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는 당(唐) 건중(建中) 2년(781년)에 장안 서녕방(西寧坊)의 대진사(大秦寺)에 세워진 경교(景敎)의 중국 전래를 전하는 비석이다. 검은색 석회석으로 높이는 귀부(龜趺)를 제외하고 270cm, 폭 평균 100cm, 두께 약 28cm이다. 제액(題額)에는 大秦景教流行中國碑라 쓰여 있고 십자가가 음각되어 있다. 비문은 32행 각 62자씩 약 1900자가 새겨져 있다. 서역인 승려 경정(景淨, 서역명 아담)이 찬(撰)하고 글씨는 여수암(呂秀巖)이 쓴 것으로 격조가 높다. 한자 외에 당시 전도에 쓰였던 에스트란게로(Estrangelo)라 불리는 시리아 문자로 경교 승려 70인의 이름을 새기고 그에 상응하는 한자명도 기록되어 있다.
경교(景敎)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년 ∼ 451?년)를 시조로 하는 기독교의 일파를 말한다. 7세기에,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유입되어 교세(敎勢)를 확장하다가 9세기 중엽에 중국에서 자취를 감춘 동방 시리아 그리스도교를 한문으로 나타낸 명칭이며, 네스토리우스파 (Nestorianism) 교회라 하였다. 9~12세기에 동방 시리아 교회는 중앙아시아와 몽골리아 초원의 투르크계와 몽골계 부족들에게 전파되었고, 이들은 혼인 관계를 통해 몽골제국에 편입되었다. 동방 시리아 사제는 에르케운(也里可溫)이라고 불렸다.
唐大興善寺大辨正廣智三藏國師之碑(당대흥선사대변정광지삼장국사지비)
구마라십과 구마라십 사리탑
흉노
선비
돌궐
유연
회골
철륵
復唯識記(복유식기)
시안 비림박물관 金石淵(=渊)藪(=薮)翰墨津梁(금석연수한묵진양) 西安碑林在保存和传承书法艺术及文化经典方面的重要作
비림박물관 입구에 문방점을 둘러보았다. 족제비가 명필로 태어나기 위해 목을 맸다. 점빵에서 아이슼크림 하나씩 사서 더위를 식히고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자은사로 간다. 대안탑을 보기 위해서다.
대자은사(大慈恩寺). 시안시 남동쪽 교외에 있는 사찰로, 삼장법사 현장이 천축(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곳이다. 당 태종의 태자 이치(李治)가 정관(貞觀) 22년(648년) 모후인 문덕황후(文德皇后) 장손씨의 명복을 위해 절을 세워 자은(慈恩)이라 하였다.
대자은사 대안탑(大雁塔)은 현장 법사가 인도로부터 가져온 불상과 경전을 수장하기 위해 영휘(永徽) 고종3년(652년)에 건립, 측천무후떄 704년 재건하였다. 절 북쪽에 번경원(飜經院)에서 제자인 규기(窺基)와, 신라 유학승 원측(圓測)도 한역에 참여하였다. 현장이 규기를 자은대사(慈恩大師)라 불렀다. 큰 기러기雁 무리가 날아가다가 한 마리가 떨어져 묻은 자리에 대안탑이 들어섰다는 전설이 있다. 높이 64m의 7층 전탑이다. 시간이 빠듯하여 7층 내부 오르기를 포기하였다. 소안탑(小雁塔) 은 이보다 작은데 의정(義淨)이란 승려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번역 보관하기 위해 세운 높이 43m 13층짜리 전탑이다.
대안탑 내부에서 시안 시내를 담아온 김희정 씨의 사진이다.
모단원(牡丹園)의 모란정(牡丹亭), 대자은사는 모란의 명소로 알려져 있고 그것을 읊은 많은 한시가 알려져 있다. 모단원에는 70여종의 모란이 식재되어 있다. 봄에는 살구꽃이, 여름에는 연꽃이, 가을에는 단풍이 장안의 볼거리였다고 한다. 모란정에서 쉬며 대안탑을 보노라니 귀하디 귀한 처진소나무가 한 그루 눈에 들어온다.
대안탑 앞에는 현장 법사의 커다란 동상(銅像)이 있다. 현장(玄奘, 602~664)은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의 모델이다. 본명은 '진위'이며 대대로 학식이 높은 유학자 집안 출신이다. 10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형을 따라 출가(出家). 수에서 당으로 넘어가는 혼란한 시기에 56개의 나라를 거쳐 인도로 가는 도중에 산적(山賊)과 약탈자들을 마주치기도 하고 고창국(高昌國) 왕의 국빈회유와 구류협박에 단식투쟁으로 벗어났다. 고국을 떠난 지 18년 만인 645년 천축국(인도)에 도달해 산스크리트어 불경 640개를 가지고 가져와 감동한 당태종의 장관 제시도 거부하고 평생 한문 번역에 힘썼다. 뿐만아니라<大唐西域記> (대당서역기)라는 삼장법사 현장의 인도 및 중앙아시아 구법 행적 즉 지리, 풍속, 종교, 언어 등을 현장이 구술하고 제자 규기(窺基)가 정리하여 646년 7월에 대역사가 완성되었다.
저녁을 먹고 살살 나왔다. 당시의 장안(長安)은 당(唐)의 수도로써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착지로 세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일백만 인구의 세계최대도시로 흥청망청 화려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으므로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아 대당불야성(大唐不夜城)이라 하였다. 그 때도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더니 오늘도 하루가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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