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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산서원 독락당 그리고 정혜사지 13층석탑
    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24. 4. 28. 23:42

    거친 참나무를 휘감아 오르는 부드러운 느티나무는 계곡의 구비와 같다

    서원 입구

    옥산서원의 정문 역락문(亦樂門), 논어의 첫 부분 구절인 '벗이 먼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 지었다. 이는 도산서원의 역락서재와 같다.

     

    구인당에서 본 무변루(無邊樓) 1572년 정면 7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로 건립되었다. 위치 변동이 없이 경상도 유림이 힘을 모아 건립하고 그 이후에도 중건 중수를 지속하여 왔다 비 훼철 사액서원의 초기 문루로서 역사적, 건축적 가치가 있어  보물 2171호로 지정되었다. 무변루 좌우에 설치된 뜬구들-온돌(溫突 또는 溫堗, 구들)의 발상전환인 필로티구조인 것이다, 가까이는 옥천의 옥천향교와 김천의 방초정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온돌은 아궁이에서 불을 때 열기가 방바닥을 지나가도록 함으로써 방 전체를 데우는 전통 난방 방식이다. 필로티(Piloti)는 원래 기둥, 특히 종교건축 회랑에 늘어선 열주(列柱)를 의미하는 말이다.  한국에서 필로티 구조를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는 형태는 빌라가옥으로  아래층은 대부분 주차장으로 사용된다. 스위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제창한 건축 양식으로 제자였던 김중업이 설계한 부산대학교 인문관(구 본관)이 대표적이다. 저층부의 기둥을 제외한 벽을 제거하여 개방적으로 만든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가기 직전인 54세(1839년)에 쓴 것. 관지(款識)에, 萬曆甲戌(만력 갑술) 賜額後二百六十六年(사액 후 266년) 失火改書(실화개서) 宣賜(선사)라고 적혀 있다. 즉 만력(명 연호) 갑술년 선조 7년(1574)에 사액 후 266년이 되는 기해년 헌종 5년(1839)에 화재로 소실되고 다시 고쳐 써서 베풀어준 편액(扁額)이란 뜻.

    구인당 안쪽의 옥산서원 현판은 서원 창건 당시(1572년)에 쓴 것으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1539~1609년)의 단단하고 힘찬 글씨이다. 관지(款識)에 옛날 현판 글씨를 베켜 써서 걸었다는 뜻의 구액모게(舊額摹揭)라고 했다.

    구인당(求仁堂), 옥산서원에서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강당을 회재 이언적의 '구인록'에서 따 온 말로 '마음의 덕과 지식의 근본을 구한다'는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년)의 글씨이다.

    구인당(求仁堂)에 걸려있는  偕立齋(해립재) 현판이며, 해립(偕立)은 경의해립(敬義偕立)으로 경건한 마음가짐과 신의로써 사물에 대처한다는 것이다.

    구인당(求仁堂)에 걸려있는 兩進齋(양진재) 현판이며, 양진은 명(明)과 성(誠)을 다 갖추어 '明'으로 도덕을 밝히고 '誠'으로 의지를 성실하게 한다는 뜻이다.

    암수재(闇修齋) 나이 젊은 유생들이 기거하는 서쪽의 闇修齋(암수재)의 闇修(암수)는 주자의 '가만히 조용히 자수한다'는 闇然自修(암연자수)에서 취한 것이다.

    민구재(敏求齋) 나이 많은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쪽의 敏求齋(민구재)의 敏求(민구)는 '仁(인)을 求(구)함에 민첩해야한다'는 뜻이다.

    서원 뒤편에 놓인 거대한 농기구, 이름이 뭐였더라? 맞은 편의 사당은 후년에 준공예정인 보수중이어서 출입금지다.

    경각(經閣) 문서나 책을 보관하던 곳으로, 사당의 서측 편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에 초익공양식을 취하고 있다. 지붕은 홑처마로 마감하였으며, 전면에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정면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신도비(神道碑) 체인묘 사당 왼쪽에 있는 이언적의 신도비 비석이다. 원래 서원 앞 계곡에 세웠는데 물이 불어나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로 서원 안으로 옮겼다.  비각 안의 이수를 채색으로 단청한 것이 이색적이다. 이수에 단청한 예는 여기가 유일할것 같다. 

    누룩뱀이 쥐 한마리를 삼키려 애를 쓰고 있다.

    옥산구곡의 삼곡인 세심대의 작은 소(沼)인 용추. ‘마음을 씻는 대’라는 의미의 세심대는 옥산서원 옆에 있는 계곡의 암반인 너럭바위다. 이곳에는 이황의 글씨를 음각으로 새긴 ‘세심대(洗心臺)’와 ‘용추(龍湫)’를 확인할 수 있다.

    삼곡이라 세심대는 달을 실은 배 하나(三曲心臺月一船 삼곡심대월일선)

    진실로 정일(精一) 전한 지가 천년이네(眞傳精一自千年 진전정일자천년)

    인을 체득해 선천의 학문 알게 되니(體仁會得先天學 체인회득선천학)

    무변루의 바람과 달 더욱 어여쁘네(風月無邊更可憐 풍월무변갱가련)

    계곡의 외나무다리를 건너 숲을 니자 마을을 뚜벅거리며 지나니 마늘밭 저너머 독락당 전경에 이어 솟을대문에 닿는다.

    독락당의 행랑채인 경청재, 회재의 손자와 증손이 옥산별업을 봉수하기 위해 1601년 세웠다 뜨락에 분홍빛 꽃잔디가 너무 밝다.

    역락재, 서원의 정문이 역락문였던가?

    문이 잠겨있는 건물엔 해동명적과 이언적수필본이 보관되어 있다. 여주이씨 옥산문중 유묵-해동명적(海東名蹟)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신공제(1469∼1536) 선생이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글씨가 돌에 새겨 있는 것을 탁본하여 상하 2책으로 묶은 것이다. 2006년 여주이씨 옥산문중 유묵-원조오잠, 사산오대(驪州李氏 玉山門中 遺墨 - 元朝五箴, 四山五臺)로 명칭이 바뀌었다. 보물526호.

    이언적수고본일괄 속대학혹문(李彦迪 手稿本 一括 - 續大學或問).. 회재 이언적(1491∼1553)이 명종 2년(1547-명종 8년(1553)에 쓴 저술이다. 송의 주희가 지은『대학혹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항목을 추가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은 정조때 경연에서 강의되었고, 정조는 친필로 ‘제선정회재속대학혹문권수’라는 제목의 머리글을 써서 내려보냈다.보물586호.

    이언적은 1530년 이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좌천되자 관직을 그만 두고 귀향한 뒤, 이듬해 자옥산 기슭에 독락당(獨樂堂) 등의 옥산정사를 짓고 주위의 승경(勝景)을 명명하였다.소위 사산오대(四山五臺)인데 사산은 동화개산, 서자옥산, 남 무학산, 북도덕산을 가리킨다. 오대는 자계천 주변의 귀영대(歸詠臺) 징심대(澄心臺) 세심대(洗心臺) 탁영대(濯纓臺) 관어대(觀魚臺) 바위 이름이다. 귀영대는 계정 맞은편 병풍바위, 징심대는 탁영대 북쪽일대, 세심대는 옥산서원밖 너럭바위, 탁영대는 계정북쪽 폭포인데 갓끈을 씻는 곳, 관어대는 물고기 노니는곳을 바라보는 곳을 가리킨다,

    옥산정사 독락당(獨樂堂)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이다. 이언적(1491∼1553)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이다. 조선 중종 11년(1516)에 지은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집을 향해 오른쪽 3칸은 넓은 마루인데 앞을 모두 터 놓았으며, 왼쪽 1칸만 칸을 막아 온돌방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원래는 맨 오른쪽 칸도 막아서 방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어, 대청은 가운데 2칸뿐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우고 대청 천장은 뼈대가 모두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그런데 김영랑의 모란은 5월의 꽃이었는데 이젠 4월 꽃이로구나. 

    계정에 양진암(養眞庵) 정혜사(淨惠寺) 승려와 교류했던 이언적이 계정을 찾은 정혜사의 스님이 머물도록 배려한 공간이라고 한다. 퇴계 이황의 글씨다.

    계정(溪亭) 독락당의 별당으로 석봉 한호(15543-1605)의 글씨다.

    숲 곁에서 우는 그윽한 새 소리 기쁘게 들으며(喜聞幽鳥傍林啼 희문유조방림제)

    새로 띠집을 작은 시내 옆에 지어(新構茅壓小溪 신구모압소계)

    홀로 술 마시며 다만 밝은 달 맞아 짝하니(獨酌只激明月伴 독작지격명월반)

    한 칸에 오로지 흰 구름과 함께 깃드네(一間聊共白雲棲 일간요공백운루)

     

    이가순은 이언적이 명명한 지점을 중심으로 구곡을 설정, 성리학적 이상세계로 만들려고 했다. 주자의 무이구곡에 비유하였다. 옥산구곡은 제1곡 송단(松壇), 제2곡 용추(龍湫), 제3곡 세심대(洗心臺), 제4곡 공간(孔澗), 제5곡 관어대(觀魚臺), 제6곡 폭포암(瀑布巖), 제7곡 징심대(澄心臺), 제8곡 탁영대(濯纓臺), 제9곡 사암(獅巖)이다.

    오곡이라 시냇가 정자는 경계가 더욱 깊어(五曲溪亭境更深 오곡계정경갱심)

    꽃에 물 주고 대나무 기르니 원림이 풍성하네(花剖竹園林 화부죽원림)

    종일토록 관어대에서 물고기의 즐거움 깨달으니(臨臺永日知魚樂 임대영일지어락)

    활발한 천기는 성인의 마음과 계합하네(活潑天機契聖心 활발천기계성심)

    계정을 돌아 나오는 길목집 시멘트블록담 아래 흰민들레 방긋!

    독락당은 화려하고, 도산서당은 고졸하다. 암서재는 결기가 흐르고, 산천재는 결기에 차 있으면서도 소박하다. 그러나 가장 편안한 집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윤증고택을 꼽을 것(함성호의 철학으로 읽는 옛집 315쪽). 촬영 목록에 들었으나 빠진 것 하나가 집에 와서야 생각나니 어쩌누, 천연기념물 조각자나무!!!

    경주정혜사지 십삼층석탑(慶州 淨惠寺址十三層石塔)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1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1층 탑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큰 규모로 만들어진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사각형의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안에 다시 보조기둥을 붙여 세워 문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듯 문을 마련해 놓은 것은 열린 공간을 추구하고자 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여진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조각이 아닌 별개의 다른 돌로 만들어 놓았고, 직선을 그리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비교적 옛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1층을 크게 부각시킨 후 2층부터 급격히 줄여나간 양식으로 인해 탑 전체에 안정감이 느껴진다.

    40여년전 신혼여행을 제주로 갔는데 3박4일동안 택시기사는 길안내와 사진가 역할을 동시에 했다. 사진가 기사는 여러 포즈를 주문하고 기억에 남는 장면은 정방폭포 아래 한복 입은 신부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촬영하였는데 선녀인지 팅커벨인지 지금도 혼란스럽다. 공중부양 장면이 가장 만만한 장면 같기도 한데, 기울어가는 피사의 사탑을 넘어지지 않도록 받치는 모습 등 여러가지 창의적 방법을 동원하여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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