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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산박물관과 왕궁박물관의 국보
    문화 culture/역사 전통 history tradition 2023. 9. 20. 10:07

    익산박물관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舍利莊嚴具) 국보 123호, 금제 방형 사리함과 유리 사리병,

    미륵사지서탑출토 사리장엄구, 보물 제1191호, 사진은 문화재청.

    금제여래입상과 방울.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국보123-4호,

    은제도금 금강경, 왕궁리오층석탑 1층 보관 장엄구, 국보123호, ‘금제사리봉영기’는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 앞·뒷면에 각각 11줄 총 193자가 음각되었다. 내용은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이 봉영기는 그동안 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진 미륵사 창건설화에서 구체적으로 나아가 조성 연대와 주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게 된 계기가 되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그동안 미륵사연기전설의 역사적 주인공은 백제 무령왕이고 민담적 주인공은 서동(薯童)인바 신라 진평왕의 선화(善花)공주와의  이야기는 후대에 꾸며진 허구라는 주장이 있다. 이한상의 발굴이야기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4] 선화공주 로맨스 뒤흔든 미륵사지 사리봉영기 (chosun.com)

    익산미륵사지금동향로 彌勒寺止 金銅香爐, 보물 1753호, 통일신라, 높이 30cm, 지름 29.7cm, 무게 7.15kg 수각형(獸脚形), 뚜껑, 몸체, 다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뚜껑은 반원형으로 높게 솟아 있으며 맨 위에 연봉오리 형태의 굵은 꼭지(손잡이)가 있다. 상단부에 동심원 무늬와 백제 후기 양식의 8엽 연판문(蓮瓣; 연꽃잎 무늬)이 있고, 중·하단부에 4개의 운문(雲紋; 구름 무늬)과 여러 줄의 동심원 무늬가 새겨져 있다. 연기가 배출되는 구멍은 꼭지 상단 중앙에 1개, 연판문 사이에 4개, 운문 안쪽에 4개가 뚫려 있다. 몸체는 둥글넓적한 대야 모양이다. 다리의 윗부분은 괴수의 머리이고 아랫부분은 단단한 발과 발톱이 보인다. 수각형 향로중 출토경위가 확실하고 보존상태가 좋아 가치가 있다.

    보살손(靑銅菩薩手), 고려시대.

     

     

    왕궁리로 가보자!

    왕궁박물관

    어서 오세요

    연가(煙家), 왕궁리유적, 백제세대

    철제 솥, 백제시대, 높이 36.8cm, 입지름 33.0cm, 왕궁의 부엌에서는 철제솥 3점이 출토되었다. 솥은 입 부분이 곧고 몸체에 전을 둘렀으며 둥근 밑바닥에는 돌기가 부착되어 있다. 솥의 형태가 익산 미륵사지, 부여 부소산성, 광양 마로산성에서 출토된 솥과 비슷해서 고대 백제계 솥의 변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벼루(硯)

    변기 모양의 토기, 왕족들의 외출용 변기이며, 조선시대 매화틀 처럼 틀 아래 그릇을 놓고 일을 보고 내용물은 배수로에 버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성용은 부여 군수리사지와 관북리 유적에서 나온 호자(虎子)가 있으며, 여성용은 부여 군수리지와 왕궁의 화장실 위쪽 배수로에서 나온 변기가 있다.

    정사(正史)에는 한성백제, 웅진(공주)백제, 사비(부여)백제만 있을 뿐 금마(익산) 백제는 없다. 익산의 왕궁면 왕궁리는 마한의 왕궁이 있어 생긴 지명이라고 하는데 정작 마한은 사라지고 백제 무왕의 천도설(遷都說) 또는 별도설(別都說)이 등장한다. 삼국유사에 백제 무왕(武王) 또는 무강(武康)으로 표기되는바 비슷한 무광(武廣)도 동일인물로 추정해서 무왕(武王)이 금마로 천도했다고 보는 것이다. 백제왕국은 한성 - 웅진(공주) - 사비(부여) - 금마(익산) 순으로 수도를 옮기며 왕국을 보존하고 번성하려 애쓰다가 멸망하여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것인데 익산 천도설(遷都說)(또는 별도설,別都說)은 여전히 이견(異見)이 분분하다. -[김신묵의 폐사지 답사-28] 익산 왕궁리사지(王宮里寺址), 제석사지(帝釋寺址) 발췌.

    왕궁리오층석탑, 국보289호 마한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진 익산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으나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그 시기가 비교적 뚜렷이 밝혀졌다. 즉,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이 석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유물들은 국보로 일괄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이 탑 밑부분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주목을 끌고 있다. - 문화재청

     

    8구체 향가인 서동요

    삼국유사 양주동 역 홍기문 역 김완진 역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夘乙抱遣去如
    선화공주니믄
    ᄂᆞᆷ 그ᅀᅳ지 얼어 두고
    맛둥바ᄋᆞᆯ
    바ᄆᆡ 몰 안고 가다
    선화공주니ᄆᆞᆫ
    ᄂᆞᆷ 그ᅀᅳ기 얼어 두고
    셔동 지블
    바므란 안고 가다
    선화공주니리믄
    ᄂᆞᆷ 그ᅀᅳᆨ 어러 두고
    서동 방ᄋᆞᆯ
    바매 알ᄒᆞᆯ 안고 가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통정해 두고
    맛둥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 가서
    서동이를
    밤이면 안고 간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짝 맞추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알을 안고 간다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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