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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주 소수서원 紹修書院
    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22. 10. 21. 21:02

    경염정(景濂亭)과 은행나무 보호수. 경염정은 휴식공간으로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로 중종38년(1543)에 백운동서원과 함께 건립되었다. 경염(景濂은 북송의 염계 주돈이를 추모한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오마이뉴스에서는 이를 두고 '사대의 냄새가 스며 있다'고 하였다). 현판 중 해서 현판은 이황의 글씨이고 초서 현판은 이황의 제자인 고산 황기의 글씨이다. 내부에는 이황, 주세붕의 시판이 걸려 있다. 경렴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죽계를 끼고 주변을 조망하기에 좋아 원생이나 유림의 모임은 물론 시화개최, 풍류와 심신 수양의 공간이 되었다. 은행나무 보호수. 지정번호 11-28-8-14 지정일자 1982 수령500년, 소재지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84  부후부(腐朽部)를 방부처리하였다.

    성생단(省牲壇). 제사에 쓸 제물을 검사하는 단. 의식을 적은 笏記에 따라 매년 3월과 9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린다. 省牲儀, 충돌례(充腯禮)로 불리는 품평을 하는데 제관들이 성생단 주위에서 진행한다. 제물의 적합여부를 祝官이 腯 하고 물으면 獻官이 좋다고 充 하면 제물을 잡는다. 원래 소를 잡았으나 도살금지령 이후 돼지로 바뀌었다. 성생단은 보통 사당 근처에 있으나 이곳은 입구에 있다. 

     

    문성공묘(文成公廟).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유교를 도입한 안향(安珦)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보물1402호이다. 제향기능의 사당으로 안향(安珦)을 주향(主享)으로,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 ·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 · 문민공(文敏公) 주세붕(周世鵬)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고 있다. 규모는 정면3칸, 측면3칸의 맞배집으로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좌(柱座)를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에 주두를 놓고, 첨차를 내어 그 위에 소로가 주심도리의 장혀를 받치고 보 방향으로는 쇠혀(牛舌)를 내고 안쪽으로는 보아지 모양을 하여 퇴간의 보를 받치는 초익공식 구조이다. 매년 3월, 9월 초정일(初丁日)날 제향을 올린다. 위패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빌려왔다.

     

    백운동(白雲洞), 1541년(중종36) 풍기군수 주제붕(周世鵬)이 이곳 출신 유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세우고 이듬해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白雲洞)을 세웠다. 백운동은 주자가 세운 백록동(白鹿洞書院)을 본딴 것이기도 하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건의를 받아들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되었다. 경내 건물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명륜당(明倫堂)·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영정각(影幀閣)·전사청(典祀廳)·지락재(至樂齋)·학구재(學求齋)·서장각(書藏閣)·경렴정(景濂亭)과 탁연지(濯硯池)·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 등이 있다. 중심 건물인 강학당(講學堂)은 보물1403호이다. 강학당의 정면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서원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紹修書院) 편액이 걸려 있다. 정면 좌측 3칸은 마루이며, 우측 1칸에는 방 2개, 기단3면(정면, 우측, 좌측)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장서각 앞 정료대(庭燎臺)는 석재 위에 관솔을 피워 서원을 밝히던 조명시설이다. 관세대(盥洗臺, 대야盥, 씻을洗)는 사당을 참배할 때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대야를 올려놓는 받침돌이다. 

    일신재(日新齋)는 대학에 인격도야가 나날이 새로와져라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에서 따왔고, 직방재(直方齋)는 주역에 깨어있음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바른 도리로써 행동을 가지런히 한다는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에서 따왔다. 1804년 원장이던 성언근(成彦根, 1740~1818)이 지은 일신재기에 '학자의 공부는 독서를 우선하므로 지락재가 맨 아래에 있고, 독서를 하여 성현과 같이 되기를 구하는 학문을 하므로 학구재가 그 왼쪽에 있고, 학문하여 성현과 같이 되기를 구하여 날마다 새롭게 하므로 일신재가 그 왼쪽에 있고,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하고서 敬으로 내면을, 義로 외면을 바르게 하므로 직방재가 그 왼쪽에 있게 되었다. 직방재가 된 뒤에 편안한 집에 넓게 거처하면서 천하에 교화를 밝힐 수 있기 때문에 강학당이 직방재 앞에 있는 것이다.' 

     

    전사청(典祀廳), 향사시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마련하던 곳이다. 문성공묘 바로 옆에 배치하여 편리성과 신속성을 도모하였다. 주세붕이 중종37년(1542) 문성공묘를 지으면서 만들었다. 앞면3칸, 옆면 1칸의 기와이며, 1칸은 방이고 2칸은 마루를 두었다.

     

    영정각(影幀閣)에는 허목(許穆, 숙종때 예학에 밝았던 남인의 영수로 송시열, 윤선도, 윤휴와 함께 조선 시대의 대표적 논객 중 한 사람),이원익(李元翼, 광해군과 인조때 초대 영의정을 지낸 실무형관료로 오리 집을 지어 호가 오리(梧里) 영정과

    보물 717호인 주세붕(周世鵬, 중국의 서원과 같이 사묘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창시) 초상과, 이덕형(李德馨, 왜란을 극복하고 당쟁을 조정하는 등 능력과 덕망을 겸비한) 영정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安珦)의 영정이 걸려 있다, 안자(安子)로 불리는 안향 사후12년 후인 고려 충숙왕 5년(1318) 공자의 사당에 그의 초상화를 함께 모실 때, 1본을 더 옮겨 그려 향교에 모셨다가 조선 중기 백운동서원(후에 소수서원)을 건립하면서 이곳에  이전한 것이다. 안향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시대 초상화 화풍을 알 수 있어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소수박물관에 국보111호. 그림의 화면은 상하로 2등분되어 위에는 글이 쓰여 있고 아래에는 선생의 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머리에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왼쪽을 바라보며 붉은 선으로 얼굴의 윤곽을 나타내었다. 옷주름은 선을 이용하여 명암없이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시선의 방향과 어깨선에서 선생의 강직한 인상이 보인다. 소수박물관에 국보111호. 

     

    지락재(至樂齋) 원생들의 거처 겸 공부하던 곳이다. 앞면3칸, 옆면1칸반의 기와집이다. 지락은 구양수의 지락막여독서 지요막여교자(至樂 莫如讀書 至要 莫如敎子, 극한 즐거움은 글 읽는 것 만한 것이 없고 지극히 요긴한 것은 자식 가르침 만한 것이 없다.)에서 따왔다. 앙고재(仰高齋)라고도 한다. 안내문에는 지락막여독서가 구양수의 말로 되어 있으나 검색하면 명심보감(明心寶鑑) 훈자편(訓子篇)으로 나온다.

    학구재(學求齋) 원생들의 거처 겸 공부하던 곳이다. 앞면3칸, 옆면1칸의 기와집이다. 학구는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한다는 뜻이며 동몽재(童夢齋)라고도 한다. 지락재와 연결되어 ㄱ자 모양을 이룬다.

     

    담장밑에는 백일홍이 이울어가며 마지막 아름다움을 처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료관

     

    징검다리를 건너면

    취한대(翠寒臺). 자연을 벗하여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듬해 명종4년(1549)에 경자바위에 터를 잡고 작명을 하였다. 이는 옛시 송취한계(松翠寒溪, 푸른연화산의 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에서 따왔다. 죽계는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소수서원을 휘감아 흐르는 하천으로 안향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안축의 죽계별곡 무대이다. 자연을 벗하여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듬해 명종4년(1549)에 경자바위에 터를 잡고 작명을 하였다. 이는 옛시 송취한계(松翠寒溪, 푸른연화산의 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에서 따왔다. 죽계는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소수서원을 휘감아 흐르는 하천으로 안향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안축의 죽계별곡 무대이다. 敬字巖(경자암) - 주세붕은 敬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새겨 남겼다. 敬은 선비의 덕목을 나타낸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를 학문에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안향을 공경하고 기리는 마음을 후대에 전한다는 뜻도 있다. 敬자 위의 白雲洞은 소수서원 본래의 이름이다. 

     

    취한대(翠寒臺)에서 보는 징검다리

    취한대 앞의 소나무는 올라가면서 연리목(連理木)의 모양을 하고 있다.

    취한대를 사이에 둔 죽계 위 소수서원의 풍광이 고즈넉하다.

     

     

    취한대(翠寒臺) / 배해주

     

     

    성리학의 갈라파고스를 찾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결정된 소수서원이다. 장마가 꼬리를 감추고 대지가 고열에 지쳐 비지땀을 흘리는 8월 첫날이다. 예전에 주마간산으로 들린 곳이지만 세계유산으로 격이 높아지고는 처음이다. 그래서일까? 발걸음에 설렘이 실려있다.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은 이곳 출신으로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 선생의 사표를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 해에는 학사를 건립하여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였다. 그 후 1550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명종에게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공인된 사립 고등교육기관이다. 성리학의 큰 산맥인 퇴계 선생의 많은 제자가 이곳 출신이다. 그리고 4천여 명의 유생들을 배출한 성리학의 보고다. 안동의 도산서원 등 9개 서원이 14번째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그중에 소수서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하늘로 솟은 학자 수림이 먼저 세상의 더위에 지친 길손은 반긴다. 한 줄기 바람이 전하는 솔향은 선비의 기개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서원에는 안향 선생의 초상이 국보 1111호 지정되어 있고, 보물 1403호인 강학당을 비롯한 보물 4, 명종의 어필인 소수서원 현판 등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5점이 있다. 예쁘면서도 마음씨까지 고운 여인처럼 서원의 품격에다가 문화재로서의 가치까지 품고 있는 귀한 곳이다. 서원 안에는 강학당, 장서각, 전사청, 영정각, 직방재와 일신재, 학구재와 지락재, 경렴정, 취한대 등 오밀조밀 어깨를 부딪치듯 배치된 전각이 정겹다. 건물 하나하나가 나름의 의미와 상징성이 있지만, 지남철이 당기듯 나의 시선을 머물게 한 것이 있다. 바로 취한대다. 서원 경내가 아닌 죽계 건너에 혼자 다소곳이 자리 잡았다. 서원 쪽에서 보면 잔잔히 흐르는 죽계에 거울처럼 투영되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취한대는 학문에 심취한 유생들이 잠시 여유를 즐기던 곳이다. 취한(翠寒)은 연화산의 푸른 기운과 반변천의 상류인 죽계의 맑고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이다. 퇴계 선생이 옛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비취 취()와 차가울 한()에서 따서 지은 것이다.

    취한대는 8개의 둥근 기둥 위에 팔작지붕이 주변의 풍경과 어울리며 편안하게 앉아 있다. 정면 3칸에 측면 1칸 반 겹집의 목재 건물로 단청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본연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어 좋다. 바로 화장하지 않은 민얼굴의 순수함이 취한대의 백미가 아닐까?. 서원 경내 쪽에서 보면 단아함에 서기가 서려 있는 듯하고, 취한대에 앉아 죽계 건너를 보면 금방 시 한 수가 떠올라질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마루에는 여성 몇 분의 앉아 담소를 즐기고 있다. 간간이 번지는 그들의 미소와 여유로움에서 지난날의 유생들을 보는 듯하다.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나도 발걸음을 조용히 하며 나름의 여유를 즐긴다. 송림에서는 매미가 여름을 노래하고, 연화산에서는 이름 모를 풀벌레가 더위를 쫓는다. 이에 질세라 죽계의 맑은 물은 조용히 시어를 토해낸다. 순간 폭염도 잠시 잊었다. 분위기가 주는 귀한 선물이다. 잠시 눈을 감으면 500여 년 전으로 돌아가 나도 유생이 되어 있는 듯 환상에 빠진다. 주변 환경이 사람을 만들어 간다는데 이렇듯 고즈넉한 곳에서 글을 읽고 시를 쓰며 학문을 닦았던 유생들은 어찌 충과 효가 깊지 않았으랴. 맹모삼천지교의 깊은 뜻을 이곳에서 다시 음미해 본다.

    그곳이 어디냐에 따라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폭포수 아래에 서면 떨어지는 물처럼 가슴이 요동을 치고, 높은 산에 오르면 자신도 모르게 높은 기개가 가슴에 안겨 온다. 망망대해로 나가면 아무리 큰 배에 몸을 실어도 나뭇잎같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고. 또 한 현란한 조명에 싸이키 음악이 울리는 클럽에서는 평온을 찾을 수 없지만, 풍경 소리 들리는 가람에서 부처님 앞에 엎드리며 방하착(放下着)은 덤으로 얻어진다. 성리학의 서기가 서린 취한대에서 눈으로는 송림의 기개와 민얼굴의 순수를 느낄 수 있고, 조용히 흐르는 죽계의 물소리는 소음에 찌든 귀를 정화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땅과 하늘, 숲과 물이 맑은 곳이다. 맑은 곳에서 맑은 마음이 생기고, 맑은 언어와 맑은 행동이 발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곳은 지그시 눈 만 감아도 자연의 본성까지도 느낄 수 있는 학문의 전당이다, 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충과 효를 실천했던 유생들을 생각하고 몇 날이라도 살아야겠다. 이것이 취한대가 주는 교훈이다. 매미들의 합창을 뒤로하고 조용히 귀를 모으면 죽계의 물소리는 더 청아해진다. 나뭇잎 하나가 물 위로 사뿐히 내려앉아 수류거(隨流去, 흐름에 따라 가다) 한다. 참으로 사위가 맑은 곳이다. 세상이 답답하고 삭막할 때, 조용한 취한대에 앉아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충과 효를 되새김질해 보는 것도 오늘을 살아가는 맛이자 지혜이리라.

    ※ 2019년 대구일보 수필대전 입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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