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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공주박물관
    문화 culture/역사 전통 history tradition 2024. 1. 11. 20:37

    무령왕의장례 특별전, 올해는 백제의 무령왕武寧王(재위501~523)이 62세로 돌아가신 지 1500년이 되는 해이다. 무령왕은 기울어 가던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포한 왕이었다. 왕의 죽음은 나라의 위기와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뒤를 이은 아들 성왕聖王(재위523~554)은 흔들림 없이 왕위를 안정적으로 이어나갔다. 그 첫걸음은 바로 아버지 무령왕의 장례를 빈틈없이 치르는 것이었다. 성왕은 무령왕이 돌아가신 523년 5월 7일부터 왕릉에 모시는 525년 8월 12일까지 3년 동안 정성을 다해 장례식을 주관했다. 장례 기간 동안 성왕은 후계자로서 권위를 다져가고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특별전시는 성왕이 치른 3년 동안의 장례식을 소개한다. 최고의 국가 행사를 치러내며 더 강한 백제로 나아가고자 한 성왕의 마음을 전한다.

    묘지석( (墓誌石, 국보제163호)은 죽은 사람의 이름, 사망일, 매장시점 등을 기록한 글이다. 글자는 53자이며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이 62세 나이로 523년에 돌아가신 후 525년 장례를 치렀다는 내용이다. 성왕이 유교적 장례의 핵심인 3년상(27개월)을 치르면서 무령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묘지석인 것이다. 묘지석 뒷면에는 방향을 나타내는 간지도(干支圖)를 새겼다. 묘비(墓碑)는 무덤 앞에 세워 이승 사람을 위한 기록이고, 묘지(墓誌)는 무덤 속에 놓아 저승 사람을 위해 기록한 것이다. (복제품)

    무령왕의 사망기록을 삼국사기에서는 왕(제후)의 죽음을 뜻하는 훙(薨)으로, 묘지석에는 황제(천자)에게만 사용하는 붕(萠)으로 썼다. 묘지석에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으로 소개하였으므로 직급니 맞지 않는다. 장례식을 황제의 격식으로 치르면서 자신의 위상까지 드높이고자한 성왕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22대 문주왕은 즉위 3년만에 도적에게 살해되고, 23대 삼근왕은 2년만에 죽었다.

    동성왕은 23년간 재임하였으나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25대 무령왕은 즉위원년에 백가를 처형하고 지방통치에 힘써 왕권을 안정시켰다. 26대 성왕은 선왕들의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고 무령왕의 노력이 헛되이 되지 않기 위해 무령왕의 장례식을 성공적으로 치러내야 하는 첫번째 국가행사였다.

    매지권(買地券),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란 기록 때문에 왕릉의 주인공이 무령왕임을 알게 된 것이다. 매지권은 토지신들에게서 무덤터를 사들인 내용을 돌에 새겨 증명한 문서 즉 토지구매계약서다. 매지권을 묻는 풍습은 중국 후한대의 도교적 장례문화에서 영향받은 것이다. 무령왕의 매지권은 일만문(一万文, 오수전 한 꾸러미)을 지불하고 남서방향의 땅(神地)를 사들인 내용이다.(복제품)

    철오수전*鐵五銖錢), 무령왕릉의 널길 묘지석 위에 90여 개의 오수전이 놓여 있었다. 오수전五銖錢은 중국 한대漢代부터 통용되기 시작하여 수대隋代까지 900여 년간 계속 유통된 동전이다. 초기에는 동銅으로 만들었으나 양 무제梁武帝 4년(523)에는 철鐵로 만들었다. 당시 1수銖는 약 650mg으로, 5수는 약 3.25g이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철제 오수전은 523년 양나라에서 발행한 것으로, 524년 사신을 통해 장례식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도량형으로는 약 4g이다.

    연꽃무늬벽돌-무령왕의 무덤방을 쌓은 연꽃무늬 벽돌이다. 연꽃무늬로 채워진 무덤방은 무령왕의 업적이 죽어서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연꽃, 사격무늬벽돌(斜格文塼), 무령왕릉

    동전무늬벽돌, 무령왕릉연꽃무늬가 아닌 동전무늬 벽돌로 채운 것은 무덤터를 사들이기 위한 상징적 금액인 오수전 꾸러미를 대신 한것으로 추정된다. 무덤방 네면 벽에는 4마리의 신수도 그려져 있는데 백제왕실무덤조성에 도교적 장례풍습이 깃들어 있다는 증좌다.

    청동방격규구신수문경(方格規矩神獸文鏡), 국보제161호, 무령왕릉 출토, 거울걸이를 중심으로 사각의 구획이 있고, 그 주위에 신수를 표현됐다. 의자손수대경(지름 23.45cm, 문양과 글씨가 적절하게 새겨져 있는 반면, 방격규구신수문경은 글씨보다는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머리에 상투를 튼 신선이 동물을 사냥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무령왕의 昇仙도구. 상방에서 만든 거울은 참으로 좋아 옛날 선인들이 늙지 않았고 목마르면 옥샘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대추를 먹고, 쇠 돌과 같이 긴 생명을 누렸다(尙方作竟眞大好上有仙人不知老渴飮玉泉飢食棗壽(如)金石兮

    청동거울, 왕비, 무령왕릉, 중국후한-위진남북조, 국보 161호, 왕의 의자손수대경과 비슷하지만 돌기가 작은 편이다. 3개의 큰원으로 구획되었고 가운데 거울걸이를 중심으로 9개의 작은 돌기를 돌리고 그 바깥으로 원을 구회했으며 그 둘레에 큰돌기 7개를 배치하였다. 주변에는 원모양 무늬를 소용돌이처럼 2개씩 돌리고 그 사이에 사신과 동물을 새겼다.

    의자손수대경, 국보 161호,  동경 뒷면의 중심에는 둥근 형태의 뉴가 있고 그 주위에는 주위에 봉긋 솟은 유(乳) 9개가 있다. 뉴와 유는 모두 끈 같은 것을 끼는 곳이다. 뉴와 유 사이에는 짐승의 형태를 가진 무늬가 7개가 있고, `의자손(宜子孫)`이라는 글씨가 있다.

    기와널과 글씨가 있는 토기 병, 여수 죽림리 출토분이며, 병에는 土王土父母 建을 거꾸로 새기고 아가리는 일부러 깨트린 모습이다. 토왕, 토부모는 무령왕릉 매지권에서 확인되는 토지신들로 무덤터를 거래한 증명을 토기에 새긴 것이다. 웅진백제 중앙왕실의 매지권 제작전통이 지방에까지 퍼져나갔음을 알 수 있다.

    송천사(松川寺) 주지 세현(世賢, ?-1143)의 무덤에서 나온 매지권(買地券), 토지매매문서로 사신관념, 도교적 내세관, 풍수지리설이 담겨있다. 백제때 전통이 고려까지 이어진 것이다 불교의 극락정토가 아닌 신선이 보살피는 도교적 사후세계로 가고자한 인물이 개성의 유명사찰 주지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돌아가신 이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의 신과 땅의 신 사직에게 12邊(변)을 매입하니 묘전의 둘레가 1頃(경)이다. 

    *지금의  邊境(변경)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송천사(松川寺) 는 개경의 흥왕사(興王寺)와 가까이 있던 절로, 전라도 광양(光陽)의 송천사와는 다른 곳이다.  

    동청룡, 남주작, 서백호, 북현무에 이르며, 上天, 下黃泉에 이르니 사방이 분명하므로 당일 돈을 나누어 천지신명에게 바쳤다, 보증인은 張陸신선과 李定度신선이며, 知見人(배석자)는 東王公과 西王母이고 書契人(작성자)는 石切曺이며, 讀契人(낭독자)은 金主簿이다. 서계인은 하늘로 오르고 독계인은 저승으로 들어가 율령에 따라 지체없이 행하라.는 내용이다. 중앙박물관,

    왕효(王侾)묘지명, 고려(1161), 고려의 묘지명은 백제의 유교적 상장의례에서 비롯되어 불교와 도교사상이 융합하여 발전해왔다. 숙종의 아들 왕효(1093-1161)는 불교도이면서 도교에 조예가 깊었던 왕효의 정신세계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유뷸선사상의 연합은 고려 왕실무덤 조성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연꽃무늬수막새와 벽돌, 중국남조(南朝), 신영수 기증

    1. 왼쪽벽돌에 士 壬辰年作(임진년에 만들다). 2. 중앙 벽돌에 梁官瓦爲師矣(양나라 관영 공방의 기와를 본보기로 삼았다) 혹은 梁宣瓦爲師矣(양나라 선이 총사로서 무덤의 축조를 관리하였다). 3. 우측 벽돌에 造此建業人也(이것을 만든 이는 양나라 수도 건업 사람이다)

    무늬 없는 벽돌無文塼, 공주교촌리 출토, 백제웅진도읍기.

    무령왕의 무덤방을 쌓은 연꽃무늬와 글자(申方, 急使)가 있는 벽돌이다. 연꽃무늬로 채워진 무덤방은 무령왕의 업적이 죽어서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곱은 옥과 모자모양 금꾸미개

    2. 무령왕관(王冠)꾸미개, 국보 154호, 높이는 각각 30.7㎝, 29.2㎝이고, 너비는 각각 14㎝, 13.6㎝ 금판을 뚫어서 덩굴무늬를 장식했으며, 밑으로는 줄기가 있는데 아래위로 2~3개의 작은 구멍이 있어 무엇인가에 부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좌우로 벌어진 줄기 중간에는 꽃무늬를 배치하였으며, 줄기가 길게 연장되면서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준다. 무령왕비 관꾸미개는 국보 제155호

    금제뒤꽂이(金製 釵, 국보159호), 금판을 오린 뒤 뒷면을 두들겨서 무늬를 돋아나오게 하는 수법으로 만들었다. 윗면 가운데에는 보주형 돌기가 있는데 마치 새머리 같고, 양옆으로 활 모양을 그리면서 굴곡져 있어 날개처럼 보인다. 옆선은 안으로 부채꼴을 이루며 휘어졌는데 윤곽을 따라 융기선이 1줄 찍혀 있다.

    무령왕 금귀걸이 국보 제156호,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시대의 금귀걸이 한 쌍으로 길이는 8.3㎝다. 왕의 널(관)안 머리 부근에서 발견, 호화로운 장식이 달려있다. 굵은 고리를 중심으로 2가닥의 장식을 길게 늘어뜨렸다. 하나는 속이 빈 원통형의 중간 장식 끝에 금판으로 된 커다란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무늬가 없어 간소하지만, 앞·뒷면에 타원형의 잎을 븥여 변화를 주고 있다. 원통형의 중간 장식에는 금선과 금구슬을 이용해 장식한 마개가 있고, 서로 마주 보게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둘렀다. 다른 한 가닥은 여러 개의 작은 고리로 이루어진 구슬 모양의 장식에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연결하고, 끝에는 금모자를 씌운 푸른 곱은옥을 매달아 금색과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이런 2줄의 귀고리는 경주 금령총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다.

    8. 허리띠고리와 허리띠꾸미개

    한줄 수식 달린 무령왕비 금귀걸이, 길이8.8cm. 11.8cm. 국보 제157호. 중심고리와 노는고리, 드림장식의 모양이 다른 한쌍의 금귀걸이와 비슷하다. 드림장식은 금사슬로 연결하고 나뭇잎 모양 달개를 달았다. 위부분에 청록색 유리구슬을 반구 모양 금장식에 끼웠다. 끝장식은 펜촉 모양이고 누금장식과 새김장식을 돌렸다. 순도 97.0-99.7%

    두줄 수식 달린 무령왕비 금귀걸이, 길이11.8cm. 국보 제157호. 중심고리와 노는고리, 중간장식, 끝장식으로 구성된다. 중심고리는 단면이 반원인 금판을 맞붙여 만들어 속이 비어있다. 노는고리는 두 줄의 드림장식을 달고 금사슬로 연결한 뒤 나뭇잎 모양 달개를 달았다. 짧은 드림장식에는 윗부분에 청록색 유리구슬을 끼우고 아래에 펜촉 모양의 끝장식을 달았다. 끝장식을 따라 누금장식과 새김장식을 돌렸다. 긴 드림장식 끝에는 3cm의 탄환 모양 끝장식을 달았다. 길이12.2cm. 무게39.8g 37.8g.

    용봉문환두대도 (龍鳳文環頭大刀). 왕이 사용한 검의 손잡이에 봉황과 용무늬가 새겨져 있다. https://www.kyosu.net/news/articlePrint.html?idxno=28072&page=quickViewArticleView

    금은제장식 손칼(刀子), 왕비. 목관의 머리쪽과 허리부근과 금동신발 부근에서 각기 1점씩 3점이 발견되었다.

    왕비금목걸이(金製七節頸飾) 국보158호. 왕비 관꾸미개 부근 출토. 7개의 금 막대를 연결하여 7절목걸이라고도 한다. 한 마디 6cm인 금막대는 각이 져 있고 양끝에 고리가 있다. 신라나 가야에서 볼 수 없는 백제만의 특징이며, 9절  목걸이가 서로 겹쳐진 상태로 출토되었다. 순도98.4-98.8%. 무게82.5g

    왕비 금목걸이, 금제구절경식(金製九節頸飾)국보158호. 왕비 관꾸미개 부근 출토. 9개의 금 막대를 연결하여 9절목걸이라고도 한다. 한 마디 6cm인 금막대는 각이 져 있고 양끝에 고리가 있다. 신라나 가야에서 볼 수 없는 백제만의 특징이며, 7절 목걸이가 서로 겹쳐진 상태로 출토되었다. 순도98.4-98.8%. 무게82.5g

    글자를 새긴 용무늬 은팔찌(多利作銘銀製龍文釧), 국보 190호. 왕비 왼쪽팔에서 발견되었는데 명문과 무늬가 똑같이 새겨진 1쌍이다. 내면은 편평하고 외면은 반원이며 팔찌 하나에 용 2마리가 새겨져 있다. 전체적인 형태와 용문은 주조로 만들고 비늘은 정으로 쪼았다. 안쪽에는 새김눈이 표현된 은판을 멋대었다. 17자의 명문 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州主耳가 음각되어 있다. 다리라는 장인이 경자년(520년)에 대부인(왕비)에게 은 230주이(또는 수)를 들여 만들었다는 뜻이다. 왕비 사전에 제작사용한 것을 부장한 것으로 해석된다. 지름8cm, 무게167.2g, 166.0g.

    금팔찌(금제釧), 왕비 오른쪽 팔에서 큰팔찌 2점, 발근처에서 작은팔찌 2점이 출토되었다. 크기만 다르고 모양은 같다. 금봉을 휘어서 양끝이 약간 벌어지게 만들고, 외면에 V자 모양의 새김눈을 장식하였다. 윗면과 아랫면, 새김눈의 튀어나온 부분을 가로방향으로 여러차례 다듬은 흔적이 확인된다.

    은팔찌(은제釧), 순도94.5-94.7&이며, 무게는 82.1g, 82.2g이다.

    왕릉출토직물인 오라(烏羅)와 홍라(紅羅) 재현품. 라직물은 씨실(가로) 한 올에 날실(세로) 네 올을 그물처럼 엮듯이 꼬아서 짠 직물로 가늘고 섬세하며 가볍다. 삼국사기에 백제 고이왕(261년)이 금꽃으로 장식한 오라관을 썼다고 하는데, 무령왕릉에서도 라직물이 출토되어 관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령왕릉 출토 錦(금) 재현품. 금 직물은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금사(絹絲)를 여러가지 색으로 염색한 뒤 옷감을 짤 때 두 가지 이상의 색깔로 문양을 표현한 것으로 귀금속에 견줄 만큼 귀한 것이다. 이 금 직물은 날실(세로)에 문양이 드러나도록 짠 경금(經錦)에 해당하며 이런 기술이 일본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뛰어났다.

    왕비 발치에서 발견된 청동다리미(靑銅製熨斗), 백제 유일의 다리미로 원반 몽양의 몸체와 긴 손잡이를 따로 만들어 붙였다. 평직(平織)한 천조각이 붙어 있어 천으로 감싸서 부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유사한 중국남조 다리미가 일본 오사카부 다카이다야마(高井田山)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금동신발은 중국에서는 발견된 사례가 없고,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출토되었다. 또한 삼국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금동신발이 출토되었다. 시기적으로는 4~6세기에 한정적으로 나타나며, 금동관 및 장식큰칼 [裝飾大刀] 등과 함께 출토되어 무덤 주인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하기 위한 중요한 자료다. 삼국 중 가장 오랜 시간과 넓은 범위에서 사용된 백제금동신발의 기능과 의미 그리고 양식적 변천을 살필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삼국시대 금동신발은 대략 56점(조각 포함)이다. 그 중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된 금동신발은 딱 2점이다. 그것은 전북 고창 봉덕리 1호분과 전남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백제산 금동신발이다. 위 사진은 무령왕의 금동신발, 아래 사진은 무령왕비의 금동신발. [이기환의 Hi-story](28)백제의 금동신발은 누가 신었을까 - 주간경향 (khan.co.kr)

    무령왕 나무발받침(족좌, 足座), 국보 제165호. 왕의 발을 받치기 위한 장의용 나무 발 받침, 윗부분이 넓고 아랫부분이 좁은 사다리꼴 통나무의 중앙을 W자로 깊게 파서 양 발을 올려놓게 만들었다. 전면에 검은색 옻칠을 하고 폭 0.7정도의 금판을 오려 거북등 무늬를 만들었으나 일부는 떨어져 없어졌다. 6잎의 금꽃을 거북등 무늬 모서리와 중앙에 장식하고, 꽃판 가운데에 옛날 부인의 머리장식중 하나인 보요(步搖)를 매달아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무령왕비 베게(두침 頭枕), 국보 제164호). 높이 33.7cm, 길이 44cm, 폭 12cm 크기의 장례용 나무 베개, 위가 넓은 사다리꼴의 나무토막 가운데를 U자형으로 파내어 머리를 받치도록 하였다. 표면에는 붉은색 칠(朱述)을 하고 금박을 붙여 거북등 무늬를 만든 다음, 그 무늬 내부마다 흑색·백색·적색 금선을 사용하여 비천상이나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봉황, 어룡(魚龍), 연꽃, 덩굴무늬 등을 그려 넣었다. 베개의 양 옆 윗면에는 암수 한 쌍으로 만들어진 목제 봉황머리가 놓여 있는데, 발굴 당시에는 두침 앞에 떨어져 있었던 것을 부착하였다. 왕의 머리 받침은 거의 부식되어 두 토막만이 남아 있어 형체를 알 수 없다. 복제품

    무령왕비 발받침(왕비족좌,足座)과 금잎장식쇠막대. 복제품

    옥기(玉器) 漢代 낙랑 두덤인 평양 석암리 출토, 중앙박물관, 시신의 눈 귀 코 항문을 막고, 입에 물린 장례용품이다. 중국 동진(317-420) 도교 경전인 포박자(抱박朴子)에 몸의 아홉개 구멍을 金玉으로 막으면 시신이 부패하지 않는다고. 입에 물린 선형옥함(蟬形玉晗)은 무령왕의 장례과정을 복원하는데 좋은 자료다. 왕릉에서 출토된 구슬도 반함(䈲含)과 관련하여 해석하기도 한다. 위에서 차례대로 눈(안옥 眼玉), 귀(이색 耳塞) 코(비색 鼻塞) 입(선형옥함 蟬形玉晗) 항문(항색 肛塞)이다.

    공주 정자산 유적에서 출토된 제사용 그릇. 공주박물관.

    매납토기(埋納用器), 부영왕릉원 굴식돌방무덤(西上塚) 출토, 부여문화재연구소 소장. 내부에 유기물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20kg 돌뚜껑을 덮은 것으로 보아 진단구(鎭壇具) 혹은 시신보존을 위한 방충제 제습제 용도로도 보인다.

    장례용 그릇, 백제 한성기 천안지역(용원리) 고분군 출토, 공주박물관 소장.

    훼기그릇(毁棄用器) 석촌동 왕실고분군 출토. 한성백제박물관. 형태는 온전하지만 아가리는 일부러 깨뜨려졌다. 동시기 찬안공주의 백제 수장층 무덤에서 나온 온전한 닭머리장식 항아리와 비교된다. 바닥이 닳은 것은 무덤주인공이 생전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성 백제무덤에서 발견되어 백제 장례물품의 훼기전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목관 앞에 네 귀 달린 흑유병(黑釉甁)과 청동잔, 은어 뼈가 발견되었다. 이로 미루어 첫번째 제사상에는 8월에 잡은 은어를 청동접시에 올리고 흑유병, 청자잔, 청동잔 한 개씩을 올려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왕과 왕비를 위한 두번째 제사상, 백제 중국남조시대. 널문 앞에서 청동완(주발 盌) 2점과 귀 6개 달린 청자항아리 2점, 청동숟가락 2점, 제사상 추정 나무편이 출토되었다. 널문을 폐쇄하기전 마지막 제사상으로 추정된다. 그릇과 수가락이 2점씩 나온 것은 왕비를 추가로 안장하면서 다시 차린 것으로 추정된다.

    훼기그릇, 무령왕릉 봉분의 둘레돌 부근에서 절반이 깨진 굽다리접시 출토, 공주박물관, 둘레돌의 형태가 서울 석촌동 연접적석총 매장의례부의 석렬유구와 비슷하고, 의도적으로 깨뜨려 묻은 것으로 보아 봉분 밖에서 의례행위를 하였을 것이다. 이로 보아 성왕은 하장(下裝)을 마치고 마지막 의례를 행한 것으로 추측가능하다.

    大通 銘瓦片(대통면와편)과 大通寺 銘土製硯片(대통사명토제연편), 공주반죽동대통사지에서 석조2기, 대통 혹은 대통사 인장기와, 토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반죽동 일대에 무령왕과 왕비를 우한 추복사찰로 대통사가 있었을 것이다. 공주박물관.

    받침있는 은잔, 높이 15.0cm 왕비의 머리 부근에서 발견. 받침托, 잔盞, 뚜껑蓋으로 구성되어 있다. 잔에는 굽이 있고, 받침 중앙에는 잔을 끼우는 홈이 있다. 받침에는 신선, 용, 사람 얼굴에 새의 몸을 한 인면조신人面鳥身 등을, 잔에는 산악, 연꽃, 봉황, 용, 사슴, 나무 등을 새겼다. 또한, 뚜껑에는 산, 나무, 사슴 등을 새겼고, 연꽃봉오리 모양의 꼭지가 달려 있다. 은잔에 표현된 무늬들은 백제인들이 꿈꾸었던 이상향으로 볼 수 있다.

    진묘수(鎭墓獸 , 국보162호) 높이 30.0cm, 길이 47.3cm 무게는 48.2kg 무령왕릉의 널길에서 발견. 진묘수를 무덤에 넣는 전통은 중국 한대漢代에 유행하였으며, 진묘수는 무덤을 지키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신선세계로 인도하는 승선昇仙 역할을 한다. 돌, 흙, 나무로 만들며, 물소나 돼지 등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 진묘수는 입은 뭉뚝하며 입술에 붉게 칠한 흔적이 있고, 콧구멍 없는 큰 코에 눈과 귀가 있다. 머리 위에는 나뭇가지 형태의 철제 뿔이 붙어있다. 몸통 좌우, ·뒤 다리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날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꼬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배설 구멍이 달려 있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무덤 수호의 관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입과 몸통 일부는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벽사辟邪의 의미로 붉게 칠했다. 각섬석암으로 만들었다.

    나무 널(목관), 무령왕의 나무 널로 13개의 목재로 만들어 졌으며 금으로 장식한 꽃모양 못으로 고정하였다.

    무령왕비 목관. 왕과 왕비의 목관 목재는 일본 자생이라는 금송(金松)이다. 내외부에 옻칠을 한 두꺼운 판재를 결합하고, 뚜껑은 중앙판재를 중심으로 조와판재를 계단식으로 겹쳤다. 뚜껑판 3판, 장측판 4판, 단축판 2판 등 9개 목재로 제작, 널못은 중앙부와 좌우측에 하나씩 박혀 있다. 철로 만든 8-9엽 꽃잎 모양 못 머리에 은판을 씌웠다. 즉 철지은장(鐵地銀裝)이다.

    삼국사기 성왕에 대한 기록. 聖王謂明穠武寧王之子也 智識英邁能斷事 武寧薨繼位國人稱爲聖王 523년5월 성왕 이름은 명농이며 무령왕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일을 잘 결단하였다. 무령왕이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는데 백성들이 성왕이라 불렀다. 삼국사기 권제26 백제본기 제4, 金富軾, 1573년 옥산서원 영인본, 공주박물관. 복제품. 

    유리동자상, 무령왕비 허리부근 출토. 민머리에 합장을 한 모습인데 하나는 하반신이 결실되었다. 벽사의 의미로 허리에 줄을 매달았을 것이다. 이런 장신구는 옹중(翁仲)이라 부르며, 민머리를 제외하면 중국 남조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동물모양 흑옥꾸미개, 무령왕과 왕비 허리부분에서 발굴, 흑옥은 퇴적된 식물이 오랜세월 땅속에서 압력을 받아 화석화된 보석이다. 사자 혹은 호랑이와 비슷한 동물의 모습이다.몸 중간의 구멍은 줄을 꿰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진묘수 (鎭墓獸)

    서혈사지(西穴寺址) 석불좌상, 보물979호, 남북국시대(통일신라) 웅진동 서혈사터 출토. 왼손바닥이 위로 향하여 다리 위에 얹고 오른손은 쿠릎에 올리고 손가락을 살짝 들어올린 항마촉지인이다. 대좌는 8장의 연꽃잎이며 대좌를 받치는 지대석엔 극락천사인 天人과 인간의 얼굴을 한 가릉빈가를 새겼다. 전체적인 자세와 조각수법상 8세기로 추정된다.. 

    공주 반죽동(班竹洞) 301번지 대통사지(大通寺址) 대통사 석조, 보물148호 149호. 물을 담아두거나 행사후 그릇을 씻을 때 쓰는데 흔히 연꽃장식이다. 통일신라의 사각형 석조와 달리 둥근 몸체, 연꽃무늬가 조각된 둥근 받침돌은 백제 특유의 우아한 조형미를 갖췄다. 발견된 장소를 따서 반죽동石槽(높이75c m, 보물149호), 중동석조(높이72cm, 보물148호)로 부른다.

     

    무령왕릉 / 나태주

     

    누가 있어 백제를 사라졌다 그러는가

    한반도의 한 가슴 눈부셨던 한 나라

    고요와 미소의 나라 여기 와서 보시라

     

    공주라 무령왕릉 천오백년 잠을 깨어

    하늘 아래 연꽃으로 둥그스름 피었으니

    임금님 무령 임금님 오늘에도 뵈옵네

     

    불꽃 모자 비단옷 구슬소리 울리며

    세상을 굽어보고 백성들 보살피러

    오시네 저기 오시네 우리 임금 오시네

     

    보소서 보옵소서 우리들 하루하루

    소금 바다 괴론 인생 굽어살펴 주시옵고

    그날의 화평과 사랑 오늘에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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