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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양 선림원지(襄陽 禪林院址)
    문화 culture/불교문화 Buddhist culture 2022. 11. 29. 15:08

    단풍으로 유명한 흘림골을 가기 위해서는 미천골을 거쳐야 한다. 미천골 중간쯤 왼쪽 돌담 끄트머리로 벌써 해는 기울어 그늘이 덮쳐오는데 빼꼼 석탑이 이목을 끈다. 선림원지(襄陽禪林院址)라고 알려져 있는데 어디선가 사림사터(沙林寺)라고도 했다, 양양군 서면 서림리 424번지. 선림원은 9세기 초 순응(順應)법사가야산 해인사 伽倻山 海印寺 :: 시사랑꽃사랑 (tistory.com)에 의해 창건된 후 홍각선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전한다. 순응법사는 신림(神琳)의 지도를 받다가 766년에 당 유학 후 돌아와 802년 해인사를 창건한 분이다. 신라 애장왕 왕후의 등창을 배나무로 고쳐주어 해인사 중창불사에 왕의 도움을 받았으며 이때만해도 화엄종인 해인사에서 입적하였다. 경문왕 때 홍각선사(洪覺禪師)를 거쳐 헌강왕 때 홍각이 중창하면서 선종사찰로 바뀌었다. 1948년 동종(804) 출토되었는데 상원사 범종(725), 에밀레종(771)과 함께 통신 범종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유물. 월정사에 옮겨 보관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일부 파편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춘천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삼층석탑(보물444호)과 부도(보물 447호), 석등(보물445호), 부도비(보물446호)가 있다. 1985년 동국대학교의 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절터가 완전히 매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림원지삼층석탑(襄陽 禪林院址 三層石塔) 보물444호. 양양 선림원지 삼층석탑은 기단(基壇) 두 단 위에 탑신(塔身)을 세 층 올린 전형적인 통일 신라 시대의 석탑이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이어받았으나, 기단 부분의 짜임이나 각 부분의 조각 기법으로 보아 신라 후기인 9세기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돌 여러 장으로 탑의 토대를 만들고, 아래층 기단을 올려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다. 위층 기단 역시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는데, 한 면을 둘로 나눈 뒤 팔부중상(八部衆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탑신은 몸돌 한 개, 지붕돌 한 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 몸돌은 높은 편이지만 2층 몸돌은 높이가 반으로 줄고 각 몸돌의 모서리에는 기둥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넓은 편이고, 지붕의 경사가 급하게 내려오다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약간 들려 있으며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탑의 머리 장식으로는 노반(露盤)이 있고, 철제 찰주(擦柱)를 꽂았던 구멍이 있으며 그 위에는 보주(寶柱) 모양의 돌이 있으나 원래의 형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팔부중상(八部衆像)은 불교의 여덟 수호신으로 팔부신장(八部神將). 팔부신중(八部神衆)이라고도 한다. 노반(露盤)은 탑의 꼭대기 층에 있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이다. 찰주(擦柱)는 불탑 꼭대기 장식의 중심을 뚫고 세운 기둥이며, 보주(寶柱)는 탑이나 석등 따위의 맨 꼭대기에 얹은 구슬 모양의 장식을 말한다.

    선림원지 석등(禪林院址 石燈), 보물445호. 선림원지 석등은 선림원 터 서쪽 언덕 위에 있으며 높이는 약 3m이고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다. 같은 절터에 있는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보물)와 함께 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받침돌을 쌓고,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얹는다. 이 석등은 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팔각 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이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밑받침돌의 귀꽃 조각은 돌출되어 있고, 그 위로 가운데 받침돌을 장구를 세워 놓은 모습으로 기둥처럼 만들어 화려하게 장식했다. 기둥의 양끝에는 구름무늬 띠를 두르고 홀쭉한 가운데에는 꽃송이 모양으로 마디를 조각했고,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 조각 띠를 둘러 모두 세 개의 마디를 이루게 하였다. 화사석은 팔각으로 빛이 새어나오도록 창을 네 곳에 뚫었고, 각 면 아래의 작은 공간에 새긴 무늬는 일반적인 석등과는 다르다. 지붕돌은 팔각의 모서리 선이 뚜렷하며, 추녀에는 밑받침돌과 같은 모양의 귀꽃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경사진 면은 가파르지 않고 부드러워서, 귀꽃 조각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꼭대기에는 연꽃이 새겨진 머리 장식의 작은 받침돌만 남아 있다. 귀꽃은 석등이나 돌탑 따위의 귀마루 끝에 새긴 꽃 모양의 장식을 뜻한다.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禪林院址 弘覺禪師塔碑) 안내. 보물446호. 홍각선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탑비로, 통일 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남아 있는 비석의 파편과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따르면, 홍각선사는 경서를 잘 알고 수양에 힘써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탑비는 비석 받침인 거북 모양의 귀부(龜趺)와 비문을 새기는 비석의 몸체, 그 위에 얹는 비석의 머릿돌로 구성된다. 이 탑비는 귀부와 머릿돌만 온전히 남아 있고 몸체는 파편만 남아 있었는데, 2008년에 몸체를 복원했다. 원래 몸체의 파편은 현재 국립춘천박물관에 있으며 파편에는 김원(金薳)이 짓고 운철(雲澈)이 왕희지(王羲之, 321∼379년)의 글자를 집자(集字)하고 혜강(慧江)이 새긴 비문 일부가 남아 있다. 이 비문은 신라 후기에 왕희지의 글씨가 보급되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자료이다. 받침의 거북은 등에 육각형의 무늬가 있는데, 머리는 거북 대신 용이 목을 꼿꼿이 세운 모습으로 바꾸어 조각했다. 등에 붙어 있는 네모난 돌은 몸체를 세우는 자리로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 있다. 머릿돌에는 전체적으로 구름과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고, 전면 중앙의 직사각형의 제액(題額)에는 弘覺禪師碑銘(홍각선사탑비) 여섯 글자를 2행으로 전서 양각(篆書陽刻)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홍각선사비문에 홍각선사는 합천 영암사에 여러 달을 머물며 선정을 닦았다는 기록과 증시적연국사자광지탑비에 적연국사가 입적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영암사 창건주로 거론이 되기도 한다. 황매산 영암사지 :: 시사랑꽃사랑 (tistory.com)

    선림원지 승탑(襄陽 禪林院址 僧塔) 보물447호, 양양 선림원지 승탑은 일제 강점기에 완전히 파손되었던 것을 1965년 11월에 각 부분을 수습하여 현재의 자리에 복원한 것이다. 탑이 만들어진 방식이나 절터에 남아 있는 다른 유적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9세기 무렵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원래의 위치는 뒷산 중턱쯤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바닥돌과 받침돌만 남아 있으나 2015~2016년 발굴 조사에서 승탑의 지붕돌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었다. 네모난 바닥돌 위로 밑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위받침돌을 두었다. 밑받침돌은 2단으로 바닥돌과 같은 돌인데, 아래는 사자 한 쌍씩을 네 면에 새겨 장식하였으며 위의 단에는 연꽃잎을 돋을새김하였다. 가운데받침돌과 위받침돌 역시 같은 돌인데 위받침돌에는 밑받침돌과 비슷한 기법으로 연꽃잎을 두 겹 큼직하게 새기고, 그 위에 몸돌받침을 두 단으로 두껍게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은 거의 둥그스름한데 여기에 돋을새김한 용과 구름무늬는 매우 정밀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선림원지 출토 금동보살입상. 2015년 발굴되어 5년간 보존처리 끝에 공개되었다. 높이 38.7cm, 대좌 14.0cm, 무게 약 4.0kg, 대좌는 약 3.7kg. 역대 최대크기. 화려하게 조각한 대좌(臺座,불상을 놓는 대)와 광배(光背,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빛을 형상화한 의장)도 그대로 남아있다. 804년(애장왕5) 동종이 제작되는 등 선림원이 활발히 운영되던 시기인 7~9세기 추정된다. 사진은 historylibrary에서 차용.

    쑥부쟁이

    갯쑥부쟁이

    솔보굿에 뿌리를 내린 일엽초

    이끼가 끼지 않는 선림원지 앞 미천골 흰바위

     

     

    선림원지(禪林院址)에 가서 / 이상국

     

     

    선림(禪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오랜 폐허를 지나가면

    거기에 정말 선림이 있는지

     

    영덕, 서림만 지나도 벌써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닭죽지 비틀어 쥐고 양양장 버스 기다리는

    파마머리 촌부들은 선림 쪽에서 나오네

    천년이 가고 다시 남은 세월이

    몇 번이나 세상을 뒤엎었음에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농가 몇 채는

    아직 면산(面山)하고 용맹정진하는구나

     

    좋다야, 이 아름다운 물감 같은 가을에

    어지러운 나라와 마음 하나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소처럼 선림에 눕다

    절 이름에 깔려 죽은 말들의 혼인지 꽃들이 지천인데

    경전(經典)이 무거웠던가 중동이 부러진 비석 하나가

    불편한 몸으로 햇빛을 가려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 해가 걸렸구나

    선승들도 그랬을 것이다

    남설악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 그리움 때문에

    이 큰 잣나무 밑동에 기대어 서캐를 잡듯 마음을 죽이거나

    저 물소리 서러워 용두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엔들 등급이 없으랴

     

    말이 많았구나 돌아가자

    여기서 백날을 뒹군들 니 마음이 절간이라고

    선림은 등을 떼밀며 문을 닫는데

    깨어진 부도(浮屠)에서 떨어지는

    뼛가루 같은 햇살이나 몇 됫박 얻어 쓰고

    나는 저 세간의 무림(武林)으로 돌아가네

     

    -이상국 시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8-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 이상국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 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이상국 시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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