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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고운 다솔사(多率寺)문화 culture/불교문화 Buddhist culture 2018. 1. 7. 16:14
봉황이 내려왔다가 울고간 봉명산(鳳鳴山) 다솔사(多率寺)에서 일주문도 없고 천왕문도 없이 처음으로 맞딱뜨린 건물은 대양루(大陽樓)이다. 조계종 범어사의 말사로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혹은 이명산, 방장산) 아래에 위치한다. 다솔은 병사(혹은 소나무)를 많이 거느린 절이란 뜻이 있다는 등의 불분명한 유래를 가지고 있다. 정말 솔숲에서 불어오는 솔향에 취해 숨을 크게 들이쉬며 오르는 길이 매력적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14교구 본사인 범어사(梵魚寺)의 말사이다. 만당의 근거지이므로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이기도 하다. 신라 지증왕4년(503) 때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다 하니 천년고찰이다. 충숙왕13년(1326)에 나옹(懶翁)이, 조선 초기에 영일 · 효익 등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686년(숙종 12) 복원하였다. 1748년(영조 24) 당우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758년 명부전 · 사왕문 · 대양루 등을 중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대양루를 제외하고 1914년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재건한 것이다. 부랴부랴 12월 3일 결혼한 막내가 며느리의 고향에다 살림을 차리면서 '토끼전' 설화의 고장인 비토(飛兎)섬도 알게 되고, 이번엔 만해 한용운과 김동리의 인연이 숨어 있는 다솔사를 알게 되고, 다음에 찾아볼 이병주문학관의 정보도 얻게 되었으니 두 사람의 인연이 고마울 뿐이다.
다솔사 오르는 길은 솔숲이 좋다. 이 솔숲에는 자연석에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 쓴 표석이 있는데 아무도 이곳에 무덤을 쓰지 말라는 임금의 지시가 있었던 모양이다. 안내문에는 다솔사가 명당 터이므로 세도가들이 사사로이 묘를 쓰려고 하였고 이에 스님들이 상소를 하였고 결국 임금이 묘자리를 금한다는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다. 1890년의 일이니 고종임금 때 진주관아 곤양읍성에서 세웠다. 숭유억불의 시대이니 명당을 차지하기 위한 세도가들의 횡포가 짐작이 가련만, 이 정도의 일에도 임금이 나서지 않았다면 천년명찰 다솔사가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라 생각하니 씁쓸하다. 짧은 오후햇살에 발이 닿아 솔숲의 정취와 향을 숨쉬지 못하고 자동차로 쑴뻑 올라온 아쉬움을 탄식하면서 보니 대양루의 왼편으로 멀찍이 해우소가 단정하다.
오른편으로는 영악사중건비가 보이는데 커다란 용두를 버거워하고 있다. 다솔사는 신라 지증왕4(503년) 연기조사(緣起祖師) 창건시에는 영악사(靈嶽寺)였으며, 선덕여왕5년(636) 때 타솔사(陀率寺)로 불리다가 문무왕16년(676)에 의상(義湘) 대사가 영봉사(靈鳳寺), 신라 경문왕과 헌강왕(875) 때 신라 말기 도선(道詵) 국사가 중건하고, 19c이후 다솔사로 부르게 되었다는 복잡한 내력을 가진다.
이 대양루 현판은 오통상(吳統相)이 쓴 것으로 되어 있으나 통상은 이름이 아니라 오(吳) 씨 성을 가진 수군통제사의 통상(統相)이란 벼슬을 가진 사람으로 해석된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83호인 대양루(大陽樓)는 다솔사의 강당인데 1749년(영조 25) 건립된 2층 맞배집으로서, 건평 106평의 큰 건물이다. 1658년에 중건하고, 1986년과 2000년에 다시 보수를 마쳤다. 지금은 다솔사 茶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다솔사와 관련있던 역사적 인물도가 진열되어 있다. 국가문화재인 국보는 물론 보물도 한 점 없는 다솔사를 찾게 된 연유는 첫째 일제강점기에 항일 승려인 만해 한용운과 최범술, 다솔사 야학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소설 〈등신불〉을 쓴 김동리 때문이고, 둘째 다솔사라는 이름이 갖는 음성학적 이끌림과 분명 소나무숲길이 잇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 '다반향초(茶半香初)'가 걸렸는데 송나라 시인 황산곡의 시구(詩句) ‘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 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 에서 따왔다. 즉 '고요히 앉은 곳에서 차를 반나절이나 마셔도 향기는 처음 같고, 미묘한 작용을 할 때 물이 흐르듯 꽃이 핀다.'는 뜻이며, 글씨체가 낯설다 싶은데도 낙관을 보니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 어느 고맙고 고마운 분의 지적이 있어 살펴보니 얼핏 '脘堂'을 '阮堂'으로 착각하였으니 추사의 글씨가 아닌 것으로 수정합니다.
두 번째로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한용운과 김동리의 사진이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은 불상(佛像)을 전혀 모셔놓지 않고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말한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 성파 하동주의 제자인 김정의 글씨이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은 통도사(通度寺), 상원사(上院寺), 봉정암(鳳頂庵), 법흥사(法興寺), 정암사(淨巖寺)의 것을 말한다.
적멸보궁 / 박현수
적멸보궁은
언제나
적막 꼭대기에 세운다
돌층계마다
고요가
한 계단씩 높아진다
언덕 위엔
새 발자국만 한
집 한 채 얹어 놓았다
투명한 사리
몇 알 낳으시고
부처님은 출타 중이시다
적멸보궁 법당 안에는 열반에 들기 직전의 부처모습인 와불(臥佛)이 봉안되어 있다. 1978년 대웅전(大雄殿) 삼존불상 개금불사(改金佛事) 때 후불탱화 속에서 진신사리 108과가 나온 이후 뒤에 보이는 사리탑을 건립하면서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바뀌었다. 부처의 진신사리가 도대체 몇 개야? 의문하면서 주련 4개를 살피는데 글씨는 농암 이병희의 것이다.
적멸보궁 뜰에 핀 베렛브라우닝(Barrett Browning) 수선화가 남녁땅인 줄을 어찌 알고 대양루를 등진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다솔사 응진전(應眞殿), 신라 선덕여왕 5년(636)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으나 임진란 때 소실되어 1680년(숙종6)에 죽파대사와 1960에 한용운이 중건하였다. 1930년 한용운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응진은 아라한(阿羅漢) 혹은 나한이라고 하며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로 존경받을 만한 불제자를 가리킨다. 문화재자료 149호이다.
역시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다솔사 극락전과 무량불(無量佛)로써 중생제도의 대원(大願)을 품은 금동아미타여래좌상, 임진란 때 소실되어 1942 중창하였다, 문화재자료148호
적멸보궁에서 내려다보이는 몇 년 전까지 종무소로 사용했던 요사(寮舍). 사찰 내에서 전각이나 산문 외에 승려의 생활과 관련된 건물을 통틀어 이르며 요사채라고도 부른다. 심검당(尋劍堂), 적묵당(寂默堂), 설선당(說禪堂), 향적전(香積殿), 염화실(拈花室) 등이 이에 속한다.
요사 기둥에는 방장산 다솔사를 비롯하여 죽로지실(竹爐之室) 편액이 눈에 띤다.
예산의 추사고택에도 걸려 있는 竹爐之室은 필획으로 보나 결자(結字, 한 글자의 짜임새)로 보나 장법(章法, 전체적인 어울림)으로 보나 흠잡을 데가 없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죽로지실은 대나무 화로가 있는 방이란 뜻인데 초의선사로부터 곡우차를 선물받고 그 답례로 써 주었다는데 과연 초의가 죽로를 소장하고 있었던 것일까? 절 주위에서 재배되는 죽로차(竹露茶)는 반야로(般若露)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명차이다. 이에 대해 전북대 김병기는 최근 '죽로지실'이 추사와 초의와 다산과 아암 등 당시 대흥사와 관련이 있던 인물들의 교류와 우정과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상징하는 매우 의미가 깊은 말이라는 증거를 찾게 되어 현재 《秋史「竹爐之室」'竹爐' 意味考》라는 논문을 집필 중에 있다고 밝혔다. 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410636
그래서 '무철이네방'에서 빌려온 다솔사의 요사 안심요(安心寮).
요사(寮舍)란 불교에서 승려의 생활과 관련된 부엌과 식당, 잠자고 쉬는 공간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이곳은 만해(萬海) 한용운이 12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항일 비밀 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의 근거지로 요사채 마루에 한용운 초상이 걸려 있다. 만당은 1930년 결성되었는데 한국불교의 자주화와 대중화를 위해 일본 도쿄까지 지부를 설치하여 식민불교정책에 대항한 항일조직이다. 1909년 만해는 이곳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여 백담사(百潭寺)에서 탈고하였다고 한다. 조선불교유신론은 당시 불교의 부흥을 위하여 일대혁신을 단행하여야 한다는 취지를 개화된 문장체인 국한문병용체로 작성한 선구적 혁명적 논문이 다솔사 안심요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동리가 2년간 광명학원의 교사로 있으면서 한용운과 김동리의 형인 김범부와 주지인 석란사(石蘭師)가 나누던 우리나라 스님의 소신공양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서 명작 '등신불'을 집필하였다. '등신불'은 1961년 11월 '사상계(思想界)'를 통해 나왔는데 만적이라는 스님이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이룩된 불상 이야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김동리의 본명은 시종이고 필명이 동리이다. 김동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학적 모티프를 제공해 준 곳이 다솔사인 것이다. ‘황토기’의 장사와 절맥설 모티프, ‘당고개 무당’의 당고개, ‘황토기’와 ‘산제’의 주산, ‘바위’의 다솔사 앞 장군석과 문둥이 마을 등 그의 작품의 주요 모티프가 된 것이 바로 사천 다솔사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읽은지 수십 년이 지나도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는 이 등신불 이야기의 탄생지를 꿈엔들 잊으리오. 작품은 액자구조와 시간이동 방법을 사용하여 인간의 고뇌와 종교적 구원을 사상적 문학적 차원에서 형상화한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문학세계에서 가장 뚜렷한 흐름을 이루고 있는 것은, 토착적 한국 인의 삶과 정신을 깊이 있게 탐구하면서, 그것을 통하여 우주 속에 놓인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의 궁극적인 모습을 이해하려는 끈질긴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천시가 주최하고 등신불축제가 행해지고 있다.
현재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는 대양루 좌측 건물. 이 외에도 살펴보지 못한 보안암석굴(普安庵石窟)이 있다. 인공으로 마련된 대지위에 판형의 사암질 자연석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분묘형 석굴로 안에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석조여래좌상과 16나한상이 봉안돼 있다.
다솔사에 머물렀던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의 '다솔사'.
"1934년부터 1937년까지 나혜석이 벌인 ‘전쟁’, 그녀는 그 싸움의 패배자였다. 현실은 그녀에게 패배를 선언했다. 하지만 나혜석의 정신은 패배하지 않았다. 자신을 가혹하게 처벌한 세상을 비참하게 유랑하면서도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삶이 부끄럽지 않고 정당함을 믿었다. 그녀는 그 어디로도 도피하려 하지 않았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그녀는 ‘도저한’ 세속주의자였다." 고등학교때 사랑하는 애제자인 방민호 교수의 글이 있어 소개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1012041015&code=960100
나혜석은 다양한 국가를 여행하면서 야수파 형식의 그림을 그렸고 귀국 후에는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이상적 부인'이라는 글을 쓰고, 미술교사를 하던 중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되는 등 진보적 성격의 페미니스트였다. 나혜석은 1937년(42세) 수덕사, 다솔사, 해인사 등으로 돌아다녔다. "다솔사"는 이 때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생활고에 시달려 각지를 돌아다니다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신지식인이며 신여성이다.
다솔사에 뜰에 앉아 / 진관 스님
다솔사 뜰에 잃어버린 사상의 벽을 바라보고 앉아 있으니
만해가 다솔사에 와서 차를 마시며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했다고
하는 방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한숨이 심장을 멈추게 한다.
지금은 텅 빈 사상의 허약한 도랑이 되었다고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뒷산에는 꽃들이 만발해
온 산은 불바다가 되어 한 장의 그림이라도 그리며
한편의 시라도 써 무너질 것 같은 잠장 벽에라도 붓이면
한편의 벽시가 될 수도 있는데 나는 그러한 용기가 나지 않아
나의 육신이 이미 마멸된 거북이등 같은 몸이 되었나 보다
지나간 사연들이 일시에 무너진 탑 같은 사연을 안고
차밭에 손가락을 붙일 힘이 없어진 다솔사에는
김동리 소설가도 얼굴이 보이고 최범술 선사도
나를 바라보면서 미소를 보일 뿐이다.
마룻바닥에 앉아서 역사의 옷을 벗어 버리자구나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아픔을 노래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피리를 불고 설법을 하였던 다솔사
지금은 파도가 지나간 고요한 바다같이
미역남세가 코를 찌르는구나
한참 폭풍우가 지나간 마당 같은 울타리에는
산 까치가 먹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법당 뒤에는 초사흘 달이 불사리 탑을 감싸고
소원을 빌어 보아도 응답이 없을 것 같은 밤
그래도 지난 인연의 기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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