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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청주박물관
    문화 culture/역사 전통 history tradition 2022. 11. 20. 14:45

    로비에 들어서면 승탑, 비지정문화재이면서 시대와 작가 미상인 승탑이 기단부가 결실된채 반가이 맞는다. 옆에 석인상도 동네 아저씨와 아주머니 같은 친근한 인상으로 다가선다.

    간돌검 (磨製石劍). 길이 37.0cm  검신(劍身)은 날을 양쪽에 세웠고 가운데 능이 있어 단면이 볼록렌즈 모양이다. 날은 매우 예리하며, 검신과 자루의 경계인 검코가 뚜렷하다. 자루는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 있고 끝에서 크게 휘어진다. 간돌검은 실생활용으로서 뿐만 아니라 죽은 이를 위해 만들어 함께 묻는 부장용으로 사용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석기이다.

    청동검

    토기 항아리 (土器壺)

    여러면석기(多角面圓球), 구석기시대, 길이 11.0cm 규질암 자갈돌을 다듬어서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자연면이 대부분 제거되었지만, 자연면이 일부 남아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둥근 모양이며, 능선 부분에 닳아 있는 흔적이 보인다. 여러면석기는 자갈돌의 거의 모든 면을 떼어 내 둥근 공처럼 만든 석기로, 보통 야구공 정도의 크기가 많고, 줄기로 묶어 던져 짐승을 사냥할 때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말 모양 허리띠고리 (馬形帶鉤), 길이 7.7cm/9.5cm 오창. 말모양허리띠고리는 충청 내륙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던 마한 세력의 대표적인 유물로, 상주 등 영남지역에서도 간혹 발견된다. 가죽이나 천으로 된 허리띠의 양끝을 걸어 고정시키는 금속구로, 허리띠의 한쪽 끝을 고정하는 돌기와 허리에 둘러진 띠의 다른 끝을 거는 고리(걸쇠)로 이루어져 있다. 오창과학산업단지 내 송대리 널무덤에서 발견된 말 모양의 이 허리띠고리는 청동으로 주조하여 만들었다. 머리에서 목으로 가는 부분이 부드럽게 연결되었고 귀와 갈기, 꼬리가 표현되었다. 다리 사이의 격판에는 천이 붙어 있는 흔적이 보인다. 걸이쇠는 앞다리와 수직을 이루며 길게 뻗어 있고, 뒤쪽에는 둥근 머리의 돌기가 붙어 있다.

    동관 (銅冠). 신라, 높이 26.5cm 단양 출토. 관테 위로는 앞쪽과 뒤쪽 그리고 양 옆 모두 네 곳에 ‘출(出)’자 모양의 세움 장식을 붙였다. 세움 장식은 모를 죽인 긴 네모꼴의 동판에 동그란 구멍을 세로방향으로 이어서 뚫었고 달개장식을 달았다. 이 동관은 투박하고 달개장식이 드문드문 달려 있는 점 등에서 신라관의 형식이 단순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6세기 중반~7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신라 관의 변화 과정과 당시 신라가 남한강 일대를 점유하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갑옷(短甲), 백제,  높이 44.0cm 음성 출토. 이 갑옷은 철판을 엮어 만든 판갑板甲이다. 가슴부분 3단, 복부 4단 등 총 7단으로 엮었으며, 한쪽 측면에는 열고 닫을 수 있도록 개폐장치를 만들었다. 각 판은 못을 박아 고정시켰다. 어깨와 옆구리 부분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뚫었는데, 이는 판갑 형태의 갑옷이 신축성이 없기 때문에 착용 후 끈을 매는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시대 갑옷의 원형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굽다리접시 (有蓋高杯)

    청동방울(동탁 銅鐸), 청주박물관 소장품 목록에는 ‘대길’이 새겨진 방울(大吉銘銅鐸)이 소개되어 있다.

    호랑이모양 허리띠고리(청동호영대구), 마한, 청주 정중리 출토.

    호랑이모양 허리띠고리(청동호영대구), 마한, 청주봉산리. 충북에서는 말 몽양 허리띠고리가 주로 출토되는데 오송유적지에서는 특이하게 호랑이를 형상화한 것이 출토되었다. 동물모양은 신부을 상징하는 도구로 진한의 영향을 받았다. 꼬리에 새끼호랑이를 태운 듯한 모양은 유일하다.

    호랑이모양 허리띠고리(청동호영대구), 마한, 청주 봉산리 출토.

    금귀걸이(금제이식 金製耳飾), 삼국시대, 제천 교둉 출토.

    청동범종, 고려 후기, 청주수동. 높이 34.8cm 범종은 절에서 의례나 행사의 시작을 알리려고 치는 종으로 나무막대로 쳐서 소리를 낸다. 길고 웅장하게 울리는 맑은 소리는 세속의 번뇌로 어지러운 마음을 정화한다. 음통(音筒)을 감싼 용은 갈기와 비늘이 선명하고 들어 올린 발에 여의주가 있다. 음통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원통형으로, 마디가 없이 주름 장식으로 표현하였다. 음통의 윗부분에는 꽃잎 위에 구슬 장식이 달려 있다. 연곽(蓮廓) 역시 넝쿨무늬를 둘러 장식하였고, 그 안에는 연꽃 받침 위에 돌출된 연뢰를 배치하였다. 연곽 아래에는 연꽃무늬 당좌(撞座)와 구름 위에 서서 합장(合掌)하는 보살상(菩薩像)을 각각 2곳에 배치하였다. 입상화문과 도식화된 음통, 보살상 등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범종(靑銅梵鐘), 고려 후기, 청주 사내사(思內寺) 출토. 높이 30.0cm 작은 크기의 종으로, 음통(音筒)을 감싼 용은 갈기와 비늘이 선명하며 입에 구슬을 물고 있다. 용뉴(龍鈕)에는 둥근 고리에 다시 두 줄로 접어서 연결시킨 철제 고리가 달려 있다. 연곽(蓮廓) 역시 넝쿨무늬를 둘러 장식하였는데, 그 안에는 연꽃 받침 위에 돌출된 연뢰를 배치하였다. 연곽 아래의 당좌는 연꽃 안에 자방(子房)과 연씨[연자(蓮子)]가 있고, 당좌(撞座)의 가장자리에 구슬무늬[연주문(聯珠文)]를 배치하였다. 사내사는 나중에 사뇌사(思惱寺)로 개명되었다.

    금동보살상, 고려시대, 충주 숭선사 출토

    기사가 새겨진 북(기사명청동금고 己巳銘靑銅金鼓), 고려, 청주 운천동. 지름 30.5cm 청동으로 만든 금고는 절에서 사용하는 범음구로, 공양을 알리거나 사람을 모으는 등 단순한 용도로 사용한다. 쇠북의 뒷면에 기사년에 구양사에서 만든 반자(飯子)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금구金口라고도 불린다. 

    의림사가 새겨진 쇠북(의림사명청동금고 義林寺銘靑銅金鼓), 고려 1190년, 충주 의림사. 쇠북의 옆면에 충주목 의림사에서 새롭게 만들어 걸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금고는 절에서 공양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을 모을 때 사용한다. 금고의 옆면에는 충주목 의림사에서 금고를 도난당하자 대중을 모아 1190년(대정大定 30년)에 새롭게 만들어 걸었으며 부호장副戶長 유장보劉張輔가 주관하고 도인道人은 관심冠心과 법명法明이며 주지는 유중惟中이라고 새겨져 있다. 명문의 내용으로 제작 연유와 시기, 제작을 주관한 사람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청동금고(靑銅金鼓), 고려, 청주 흥덕사 출토. 지름 64.5cm 무게 35kg인 대형 금고이다. 앞면은 굵은 돋음 선을 동심원상으로 돌려 공간을 3개로 나누었다. 가장 안쪽 부분에는 연씨[연자(蓮子)]를 가진 자방(子房)과 10개의 잎을 가진 연꽃무늬를 장식하였다. 중간 부분에는 화려한 넝쿨무늬[당초문(唐椒文)]가 있고, 바깥 부분에는 넓은 잎의 연꽃잎을 2줄로 장식한 후 연잎 중앙에 꽃무늬를 넣었다. 뒷면은 공명구(共鳴口)를 포함하여 앞면처럼 3개로 공간을 구획한 다음 바깥 부분과 중간 부분에 각각 연꽃무늬와 넝쿨무늬를 장식하였다.

    금동풍탁(金銅風鐸), 고려 이전, 충주 숭선사지, 숭선사는 고려 광종이 어머니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聖王太后) 유씨(劉氏)의 명복을 빌기 위해 954년에 세운 왕실원찰이다. 탑의 지붕돌이나 절의 전각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 모양의 장식이다.이 풍탁은 숭선사 창건 당시 금당에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31.9cm 너비는 15.4㎝, 두께 1.1㎝, 무게 5,416g로 국내에서 가장 크다. 풍탁은 풍경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보통 철판으로 깍은 물고기 모양의 풍경에 익숙해져 있다.

    (좌)풍탁, 고려, 파주 선유리. (우)풍탁, 고려, 청주 사뇌사 출토.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淸州雲泉洞出土銅鐘), 높이 64.0cm 보물 제1167호. 상원사종上院寺鍾,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과 함께 국내에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 대표적인 범종 중 하나이다. 용뉴龍鈕와 비천상이 새겨진 위치, 당좌의 모양 등은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적인 양식과 같으나 화염보주와 새 꽃무늬 등 새로운 장식은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양식적 변화를 보여준다. 이 동종은 청주 운천동 개인주택 공사 도중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흙속에 파묻힌 동종 안에 금고金鼓, 금동보살입상, 향완 등이 함께 묻혀 있었다.

    청동수각향로(靑銅獸脚香爐), 고려, 사내사 출토.

    거는 향로(靑銅懸香爐), 청주, 사내사 출토. 높이 21.5cm. 작은 크기의 향로이며, 몸체는 주물 틀에 찍어 만들었다. 몸체에 있는 2개의 고리와 연결하여 위쪽 고리가 움직이도록 하였다. 뚜껑은 연꽃잎에 싸인 꽃봉오리 모양의 꼭지가 있으며, 뚜껑 내부에 단을 만들어 여닫기가 편하도록 하였다. 윗면에는 세 잎사귀[삼엽형(三葉形)] 모양 구멍 장식을 3곳에 같은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위쪽 고리는 꽃봉오리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뻗어 있는데, 고리 꼭지의 가운데에 구멍이 있고, 고리의 양쪽 테두리에는 손톱자국 모양의 둥근 선을 연속적으로 배치하여 문양 효과를 나타내었다. 위·아래로 반전(反轉)된 아래 고리의 위쪽은 연꽃 봉오리로 마감하고 아래는 청동 못으로 몸체에 고정시켰다. 몸체는 계란형으로 3곳에 한 줄의 가는 선이 돌려져 있다. 1993년 청주시 사직동 무심천 도로 공사장(청주대교 인근)의 커다란 구덩이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함께 출토된 금고(金鼓), 금강령(金剛鈴), 법종(梵鐘) 등과 함께 고려시대 청주지역의 불교문화와 당시 공예수준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청동수각향로(靑銅獸脚香爐), 고려, 하남 춘궁동 출토.

    청동향완(靑銅香琓), 고려, 사내사 출토.

    사내사(思內寺)가 새겨진 향완(香완)=사내사명청동향로(思內寺銘靑銅香爐), 고려, 사내사. 굽이 달린 발(鉢)에 연꽃봉오리 모양의 꼭지가 달린 뚜껑이 있는 향로. 뚜껑에는 여의두 모양의 향 연기 구멍이 뚫려 있다. 굽 아래에는 '사내사 나한당 향로를 무오년에 만들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청자광명대(靑磁光明臺), 고려, 청주 중앙동 출토, 높이 35.5cm. 고려시대 촛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초를 끼워 사용하도록 원형받침이 있는 촛대와 위가 편평한 원반으로 되어 등잔이나 초를 올려놓을 수 있는 광명대가 있다. 

    버드나무학무늬정병=청자상감유학문정병(靑磁象嵌柳鶴紋淨甁), 고려시대.

    기축(己丑)이 새겨진 아미타불비상(己丑銘阿彌陀佛碑像), 통일신라시대, 689년, 세종 다방리 출토. 이 불비상은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불비상 앞면에는 아미타불과 그 조아우로 보살과 나한 등이 조각되었다. 위쪽에는 화불,보주,영락 장식이 드리워진 극락의 나무 등이 표현되었다. 아래에는 극락세계의 연못이 있고 계단이 있는 난간 위로 두 마리의 사자가 불법을 수호하고 있다. 위 전면 사진은 청주박물관에서 차용.

    계유가 새겨진 천불비상(癸酉銘千佛碑像), 국보154호, 통일신라 673년, 세종 서광암. 이 불비상은 둥근 연꽃 문양 받침 위로 긴 네모꼴 몸체가 이어지며, 아랫부분 중앙에 삼존불이 조각되어 있다. 삼존불의 머리 위로 연꽃 문양이 장식된 둥근 광배가 있다. 화면을 일정한 간격으로 구획하고 그 안에 작은 부처를 가득 채웠다. 발원문에 계유년4월15일에 백제 유민인 신도250명이 국왕대신, 칠세부모, 법계중생을 위해 만들었다고 전한다. 위 전면과 측면 사진은 청주박물관에서 차용.

    생각하는 보살이 새겨진 불비상(미륵보살반가사유상 彌勒菩薩半跏t思惟碑像), 높이 40.4cm 보물 제368호. 통신, 세종 다방리 출토. 이 불비상은 지붕돌과 받침돌을 따로 만드는 다른 비상과 달리 하나의 돌을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지붕돌은 용화수(龍華樹)로 추정되는 나무가 표현되어 있다. 반가사유상은 한 다리를 다른쪽 다리 위에 얹고 앉아서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삼국시대 말부터 통신초까지 유행하였다. 양 측면은 연꽃과 불자 등을 든 보살과 그 아래에 무릎을 꿇고 합장하는 공양상을 표현했다. 뒷면에는 장방형 받침대 위에 세 개의 찰주를 갖춘 보탑이 마치 보궁처럼 묘사되어 있다.  위 측면 사진은 청주박물관에서 차용.

    계유가 새겨진 아미타불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국보 제106호. 이 불비상은 아미타불의 극락정토 장면과 발원문이 남아 있다. 앞면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상, 대세지보살, 천왕을 화면 가득 묘사했다. 양면에는 횡적, 생황, 비파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과 용을 조각하였다. 뒤에는두광을 갖춘 화불을 네 단의 층에 다섯 구씩 표현했다. 연기 비암사에서 출토되었다. 위 측면 사진은 청주박물관에서 차용. 연기 비암사(碑岩寺) temple - :: 시사랑꽃사랑 (tistory.com)

    표주박 모양 병(청자상감연당초문표형병 靑磁象嵌蓮唐草文瓢形甁), 고려시대.

    금동불좌상(金銅佛坐像) 고려후기. 부처의 얼굴은 계란형으로 갸름하면서도 부피감이 있으며, 이목구비는 단정하다. 결가부좌한 자세에 오른손을 들어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阿彌陀九品印의 한 종류로 속칭 돈 내놔 수인)을 취했다. 머리에 중간계주, 속옷인 승각기의 띠매듭과 왼쪽가슴 아래로 드리워진 마름모꼴 금구장식, 왼쪽 팔뚝 위에 겹쳐진 옷주름 등은 고려후기 불상의 특징이다. 통영법륜사와 밀양표충사의 아미타구품도가 유명하다. 석가불은 오른손이 땅을 향하고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다. 비로자나불은 손을 가슴에 모으고 지권인(智拳印)을 취한다. 약사여래는 왼손 위에 약그릇을 들고 약기인(藥器印)을 하고 있다. 미륵불은 서서 시무외인(施無畏印) 혹은 여원인(與願印)을 취한다. 

    석조불좌상(石造佛坐像), 고려시대, 청주 영하리 출토, 높이 128cm. 부처의 얼굴은 살이 올라 볼이 통통하고 입술은 작으며 머리는 곱슬 모양의 나발(螺髮)에 상투와 비슷한 육계(肉髻)가 있다.양 어깨를 감싼 통견식(通肩式) 옷차림에 옷자락은 U자 모양의 주름이 흘러내려 무릎까지 덮였다. 부처의 오른손은 두려움을 없애주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왼손은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여원인(與願印)을 하고 있다.

    철조불좌상(鐵造佛坐像). 고려 후기. 철불은 통신 말부터 남원 실상사를 비롯한 선종사찰에서 주로 조성되었다. 주조과정은 금동불을 제작할 때와 기본적으로 동일하지만 철은 녹는 점이 높고 강도가 강해 쇳물이 굳으면 불상의 표면을 다듬을 수가 없다. 이런 연유로 철불의 표면에는 쇳물이 흘러들어 생긴 분할선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철불 역시 가슴 소매 무릎 등에서 분할선이 확인된다.

    건흥(장수왕 연호)5년 병진년이 새겨진 광배, 고구려, 충주 노은면. 뒷면에 일광삼존불(一光三尊佛)의 광배. 뒷면에 建興五年 歲在丙辰에 佛弟子 淸信女 上部 兒庵이 造釋迦文像하오니 願生生世世에 値佛聞하노이다라 새겨져 있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長壽弘濟好太烈帝 改元建興 장수홍제호태열제(412~491)는 연호를 건흥으로 고쳤다.

    공양탑, 청동탑, 고려시대.

    목조나한상, 조선 후기, 천태중앙박물관 소장,

    목조촛대, 조선 후기, 천태중앙박물관 소장.

    (좌)승려얼굴=석조승형두,높이 14.5cm. 고려, 청주 운천동 출토, 민머리이고 어린 동자의 얼굴 모습인데, 고통받는 자를 구원해주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얼굴로 추정되고 있다. 얼굴은 통통한 편이고, 코와 입이 얼굴의 가운데로 모아져서 작게 표현된 것이 고려 불상의 특징을 보인다. (중)부처얼굴=석조불두(佛頭), 높이 17.8cm. 고려, 청주 수동 출토. 머리는 나발이 표현되어 있고 육계가 위로 솟아있다. 얼굴은 눈, 코, 입, 귀의 윤곽이 뚜렷하여 입체감이 있으며, 온화한 미소가 있는 얼굴표정이 특징이다. (우)석조탄생불,석가가 태어날 때의 모습 형상화, 통일신라, 제천 포천리 출토.

    (좌)금동불입상, 괴산 사남리 출토, (우)금동보살입상, 고려, 청주 운천동 출토. 

    연꽃봉오리장식기와못(금동연봉장식와정金銅蓮峰裝飾瓦釘), 고려, 충주 숭선사 출토. 기와못(瓦釘)은 지붕 끝의 수막새기와나 서까래기와 등을 나무 부재에 고정하기 위해 박는 큰 쇠못이다. 일반적으로 못머리가 빗물이나 햇빛에 부식되지 않도록 청자나 백자로 연꽃 봉오리 모양의 장식을 만들어 씌우는데 비해 숭선사 기와못은 청동으로 만든 후 도금했다. 

    목조업경대, 조선 후기, 천태중앙박물관 소장. 업경대는 業을 나타내는 거을받침대이며 업경륜 또는 업경이라 한다. 예로부터 나무로 제작했고 경륜은 금속 혹은 나무로 만들어 채색하였다. 법당 안에 설치된 업경대는 권선징악의 표본이자 저승(명계)를 대변하는 상징이다.

    목조불좌상. 조선 후기, 천태중앙박물관 소장.

    목조보살입상, 조선 후기, 천태중앙박물관 소장.

    목조보살좌상, 조선 후기, 천태중앙박물관 소장.

    부처를 모신 작은 법당(목조불감), 조선 후기, 불감(佛龕)에 부처를 모신 작은 법당. 감실 내 본존은 불신이 단아하고 나발의 머리 위에 반타원형 중앙계주가 있다. 본존을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위치하고, 문 좌우에 인왕상이 있다. 수행자와 신도들은 사찰이나 개인공간에 불감을 안치하여 의식을 행하고 염원이 이루어지길 기원했을 것이다.

    청동금강저(金剛智杵=견혜저堅慧杵),(상)고려, 청주 금관리 출토. (하)고려, 청주 흥덕사터. 길이 27.5cm 금강저는 마음에 깃든 번뇌를 깨뜨릴 수 있는 불교의식 행사 도구이다. 몸에 지녀서 금강과 같은 지혜로 마음에 깃든 번뇌를 없애는 보리심을 상징한다고 한다. 양쪽 끝에 있는 고鈷는 창 모양의 중심축에 양옆으로 불꽃모양의 장식이 있는데, 이런 형식의 금강저는 삼고저三鈷杵라고 한다.금강저는 원래 제석천이 지닌 무기였다.

    청동금강령(金剛鈴), (좌) 고려,  충주 사뇌사 출토. 몸체에 두 명의 천인과 악귀를 밟고 있는 사천왕이 새겨져 있으며 물고기 얼굴모양의 혀가 특징이다. (우) 고려, 충주 본리 출토. 금강령(金剛鈴)은 손잡이가 달린 작은 종이다. 몸체에는 불법을 지키는 여러 신이 새겨져 있다. 금강령을 흔들어내는 소리는 여러 부처와 보살들을 기쁘게 하고 어리석은 중생들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다.

    흥덕사가 새겨진 쇠북(흥덕사명청동금고(興德寺靑銅金鼓). 고려, 청주 흥덕사 출토. 쇠북의 옆면에 갑인년 5월 서원부 흥덕사에서 금구 하나를 다시 만들었는데 들어간 구리의 무게가 32근이라는 글귀가 있다. 봉업사명청동북이 보물576호, 경선사명청동북이 보물2008호. 은해사 청동금고 역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관내 카페를 찾은 썩덩나무노린재도 커피맛을 알랑가?

    장독대는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의 장류가 담긴 독과 항아리 등을 놓아두는 곳으로, 보통 양지 바르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돌 등을 2-3줄 쌓아 만든다. 가장 큰 독에는 간장, 중두리에는 된장이나 막장을 담아두며, 맨 앞줄의 작은 항아리에는 고추장이나 장아찌류를 담는다. 장창희 기증한 장독대.

    청주박물관 곽응종(郭應鍾, 1903~1987)공적비, 박물관부지 3만평 기증, 우암산 아래 청주시 상당구 명암로 143 국립청주박물관은 1987년 10월 30일에 개관하였고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고 정의한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한옥양식을 살려 설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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