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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계 김장생고택, 종가, 묘소
    문화 culture/역사 전통 history tradition 2022. 10. 8. 18:15

    사계고택 현판, 현대서예가인 김응현(如初金膺顯)이 썼다.

    사계고택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이 55세 되던 1602년(인조35)에 건립하여 정부인 순천김씨와 살았던 집이다. 고택은 안채와 사랑채, 안사랑채, 별채, 곳간채, 광채, 문간채, 행랑채 등이 있으며 원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이 중에 사랑채인 은농재(隱農齋)는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처음에는 초가형태였으나 지금은 기와로 지붕을 올렸다.  정면4칸과 측면2칸의 평면으로 구성하였고 배치도 당대 양반가의 일반적인 방법을 잘 따랐다. 그 후 사계의 8자인 규(두계공, 1606-1677)의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집이다.

    체험관. 허씨부인 설화. 김장생의 7대조 할머니 양천허씨는 조선 태조때 대사헌을 지낸 허웅의 딸인데, 광산김씨인 김문(金問)에게 시집을 왔다. 김문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 한림원의 벼슬을 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허씨부인은 불과 17세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친정부모는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된 딸을 불쌍히 여겨 재가를 시키려 하였다. 이를 안 허씨부인은 그 길로 개성을 떠나 시댁이 있는 연산 고정리까지 5백리를 걸어서 내려왔다. 연산으로 내 려올 때 산길에서 호랑이가 나타나 지켜주었는데 시댁에 도착하자 홀연히 사라졌다. 허씨부인은 시부모를 모시며 유복자인 김철산(金鐵山)과 어린 손자를 훌륭히 키웠다. 부인은 78세에 세상을 떠나 고정리에 묻혔는데 이를 안 세조가 정려(旌閭)를 세워주었다. 김철산은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金國光), 김겸광, 김정광, 김경광 4형제를 낳아 이곳에 광산김씨가 번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이, 송익필 - 김장생 - 김집, 송시열, 송준길, 유계, 이유태, 윤선거 등...

    안채

    영당(影堂) 자리에는숭정(崇禎4년(1631) 음력8월3일 사계선생이 돌아가시자 출상(出喪)하기 전 이곳에 시신을 모셨던 곳이다. 당시 왕은 150일 후에, 사대부 양반은 90일 후에 출상하는 제도로써, 사계선생은 이곳에서 78일간 모셨다가 10월19일에 출상하여 진잠 성북산에 안장하였다가 숭정14년(1641) 음력10월9일 연산면 고정리로 이장묘하였다.

    성례당 퇴마루

    별당

    행랑채

    구광정(九光亭)

     

    사계고택 답사를 마치고 연산에 있는 사계 종가를 찾았다. 종가 앞에 왕당(尤堂) 김용승(金容承) 각제기사비(却祭紀事碑)가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비 이름이 하 어려워 이리저리 찾아보니, 일제가 우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비집안제사에 총독부가 보낸 제물을 가지고 와 참석하였다. 사계 불천위제사 때도 참례를 왔는데 왕당 김용승이 당장 물러가라고 꾸짖어 돌려보냈다. 이 일로 문초를 받는 등 고초를 겼었는데 1971년 김윤동 민태식 등 11명이 발의하고 박인규가 짓고 김순동이 써서 비를 세웠다. - 사계종부 홍용기

     

    종가 운영에 도움을 얻기 위해선지 찻집  '동행' 운영중이란 팻말은 걸려 있으나 이쪽 저쪽 문은 모두 잠겨 있고 사람의 기척은 없는데 목줄 맨 강아지마저 무덤덤히 쳐다보다 고개를 코에 박는다.

    마치 열병이라도 하듯 맨드라미가 줄지어 서 있는데 철이 지나 이울고 있다.

    사계고택을 감싸고 있는 대추나무밭.

     

     

    종가 위쪽에 있는 김장생 묘소. 김장생은 호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文元),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대사헌 김계휘의 아들로 어려서는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1578년(선조11)에 턴거로 관직에 나아가 1602년(선조35)에 청백리가 되었지만 바로 낙향하여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아들 김집, 문하생 송시열, 송준길과 함께 문묘에 모셨졌다. 묘소 앞에는 문인석, 무인석, 상석, 혼유석, 망주석 등이 있다. 비석 중에는 김겸광과 김장생의 신도비가 대표적이다. 김겸광신도비는 1492년(성종23)에 세워졌는데 앞면은 홍귀달, 뒷면은 강흔이 지었으나 비문과 전액(篆額, 전서로 쓴 비석이나 현판 글씨)을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다. 김겸광(金謙光, 1419-1490) 묘소. 자는 위경(撝卿). 호는 서정(西亭). 시호는 공안(恭安). 김약채(金若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김문(金問)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 김철산(金鐵山)이며, 어머니는 대도호부사 김명리(金明理)의 딸이다. 서석 김국광의 동생으로, 중종 때의 훈신 김극핍의 아버지이자 김명윤의 할아버지이다.

    김장생 묘역 오르는데 오른쪽 논과 산자락이 맞닿는 지점에 커단 비석이 보이기에 쫒아갔다. 김국광(1415~1480)은 김철산의 아들로서 호는 서석(瑞石)이고 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판관·지평 등을 역임하고 오랑캐의 침입 때 함경도 경차관으로 적을 비유했다. 그 후 병조참판·우부승지·호조판서·병조판서·우참찬·우찬성 등을 지내고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난을 평정, 적개공신 2등에 좌찬성이 되고 광산군에 봉해졌다. 우의정이 되고 성종 때 좌의정에 올라 좌리공신이 되고, 광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經國大典』 편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광산 김씨로서 최초로 상신에 오른 인물이다. 아들 극뉴(克忸)의 묘소는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는데 전국 8대 명당 중의 하나라고 한다. 김국광의 묘는 사계고택 인근에 위치한다.

    김장생 묘소에서 내려다 보이는 종가와 멀리 양천허씨를 모신 영모재가 눈에 들어 온다.

     

     

    무덤 / 유홍준

     

     

    볕 잘 들고 물 잘 빠지면 명당, 아무 데나 끌어 묻으면 된다 아무데나, 뽀얗게 서리 내린 봉분에 아침햇살이 내린다 풀덤불에 묻혀 있다가도 벌초를 하고 나면 나타나는 무덤들, 늦가을이면 그 무덤들이 잘 보인다 무덤 없는 언덕은 드물다 무덤 없는 언덕은 산세가 좋지 않은 언덕이다 무덤 위에 올라가 사람의 마을을 내려다보는 무덤이 있다 조심해야 한다 서리 내린 무덤은, 잘못하다간 쭈르륵 미끄러진다 무덤은 죽지 않고 살아 숨을 쉰다 갈수록 내 표정은 무섭고 내 두눈은 더 깊다 살아서 이미 유령인 나는 무덤 위에 올라가 인간의 마을을 내려다보는 습관이 있다

     

    ㅡ『시인동네(2020,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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