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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문화 culture/역사 전통 history tradition 2022. 11. 3. 16:46

    홍살문(홍전문=紅箭門, 紅門) 왼쪽 길은 향로(香路)라 하여 제향시 향과 축문을 들고 들어가는 길이며, 오른쪽 길은 어로(御路)라 하여 제향을 드리러온 왕이 걷는 길을 가리킨다. 따라서 어로를 이용하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法度)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홍살문은 왕릉과 같은 묘지나 향교, 서원, 궁궐 및 관아 등의 정문으로 설치되었다. 드물게 용주사나 동학사처럼 절에 있는 것도 있고 대구 약령시, 안동 시청 전정에 설치한 경우도 있다.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붉은 색과 창(枝槍) 모양은 벽사와 경의(敬意)의 의미가 있다.

    홍살문은 인도의 스투파 입구에 세우는 토라나(torana)에서 비롯되었으며, 중국의 패방(牌坊), 산문전(山門殿), 일본의 토리이(鳥居), 베트남의 땀 꾸안(Tam quan), 태국의 사오칭차(Sao Chingcha)로 변화하였다.

     

    여주 영릉(英陵)은 세종(1397~1450)과 소헌왕후(1395~1446) 심씨의 합장릉이다. 방책이 둘러져 들어갈 수 없으므로 정면 사진을 촬영할 수가 없다. 이웃해 있는 영릉(寧陵)은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영면한 효종대왕(1619~1659)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인데 십여년 전엔 공사중이라 허탕쳤는데 이번에는 마감시간에 쫒겨 빼먹었다.

     

    영릉(英陵, 세종대왕) 비각, 비각은 능 주인의 자취를 기록한 신도비나 표석을 세우고 비바람 따위를 막기 위하여 그 위를 덮은 집이다. 영릉 비각 안에 있는 표석은 영조21년에 세웠으며, 표석 앞면의 글 '朝鮮國 世宗大王 英陵 昭憲王后 祔左(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헌왕후 부좌)'는 조상경(趙尙絅, 1681-1746)이 썼고 뒷면의 글은 이학(李壆)이 썼다. 

     

    정자각(丁字閣). 건물 바닥 평면이 ()자처럼 생겨 붙인 이름이며 제사용 건물이며 정청과 배위청으로 구획이 나누어져 있다. 정자각, 수라간, 수복방 이 세 건물은 제향 봉행(祭享奉行)의 중심건물이다. 정자각에서 올려다 본 영릉

     영릉의 정자각정자각(丁字閣), 일행 중의 누군가가 잡상이 다르다며 관심을 보였다.

     

    세종 영릉의 (구)재실.

    십여년 전 대왕의 몸은 푸른 녹이 온몸을 덮었는데 오늘 보는 모습은 도금을 했을까 황혼을 머금어 더욱 금빛 찬란하시다.

    능의구성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능의역사

    1446(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예종 1)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이와 달리 효종영릉(寧陵)의 재실은 보물 15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은 문화재청.

    효종영릉. 사진은 문화재청.

                                                                               능의구성

    영릉은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과 비 인선왕후의 동원상하릉이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언덕에 같이 있는 경우 대개는 봉분을 나란히 두는 쌍릉의 형식을 택하는데, 영릉은 특이하게도 왕릉과 왕비릉이 상하로 조영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 생기가 왕성한 정혈을 비켜가야 하기 때문에 좌우 쌍릉을 쓰지 않고 상하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는데 동원상하릉 중에서는 영릉이 조선 최초이다.
    왕릉의 봉분 주위로는 곡담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왕비의 능에는 곡담이 없어 두 능이 한 영역 안에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이 없으며 난간석의 기둥에 방위를 표시하는 십이지를 문자로 새겨 놓았다. 이는 간소화된 능제로서, 세조 광릉 이후 사라졌던 조선 초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이 성종의 선릉에서 다시 나타났다가, 이곳 효종의 영릉에서부터 없어진 것이다.

                                                                              능의역사

    효종이 1659년(효종 10)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이 해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1673년(현종 14) 병풍석에 틈이 생겨 광중에 빗물이 스며들었을 우려가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천장론이 불거졌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인 세종의 왕릉 영릉 동쪽으로 입지를 정하고 능을 열어보았는데, 그동안의 우려가 무색하게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영릉은 천장하였으나 이에 연루된 자들은 면직을 당해야 했다.
    영릉 천장 다음 해에 인선왕후가 승하하여 효종 왕릉 아래에 인선왕후의 능을 조영하였다.

    세종대왕유적관리소 능이야기 (cha.go.kr)

     

    세종대왕유적관리소 능이야기

    좌측메뉴 영릉이야기 17대 효종(孝宗) 능호 영릉(효종과 인선왕후) 위치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 문화재의 종류 사적 조성시기 1673년(현종 14) 능의구성 영릉은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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