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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문화 culture/불교문화 Buddhist culture 2022. 9. 25. 14:09
원주 거돈사지 사적168호. 현계산 기슭의 작은 골짜기를 끼고 들이 펼쳐진 곳에 있는 절터로 면적은 25,339m2이다. 발굴조사결과 신라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졌고 고려초기에 확장 보수되어 조선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중문터,탑,금당터,강당터,승방터,회랑 등이 확인되었는데 금당의 규모는 앞면5컨, 옆면3칸으로 2층건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문지 북쪽의 3층석탑(보물750호)은 사찰이 처음 세워질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이는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사찰 뒤편 언덕에는 원공국사 지종(930-1018)의 묘탑인 원공국사승묘탑(보물190호)이 있다. 탑의 동쪽에는 승묘탑과 함께 세운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78호)가 있는데 1025년 최충이 문장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거돈사는 신라말 고려초의 절터로서 보기 드문 일탑식 가람으로 주목할 만한 곳이다.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원주 거돈사지삼층석탑 보물750호. 거돈사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모습이다. 다만 돌로된 축대 안에 흙을 쌓고 그 위에 탑을 세운 점이 특이하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들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였다. 5단의 밑받침을 둔 지붕들은 두꺼우면서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곡선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직선을 이루는데 끝부분에서의 돌림이 경쾌하여 통일신라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이 있고 그 위에는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를 얹었다. 탑의 조성연대는 2단을 이루는 기단구조와 기둥모양의 새김, 5단의 지붕돌 받침 등의 수법으로 보아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탑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 있다.
원주 거동사지 금당터(金堂址). 금당은 부처를 상징하는 불상을 모신 곳으로 사찰의 중심공간이다. 거돈사 금당터에는 전면 6개, 측면 5개의 주춧돌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어 20여칸의 큰 법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초석의 배치로 보아내부는 통층이고 외부는 2층 규모의 웅장한 금당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금당터 중앙에는 부처님을 모셨던 높이 2m의 화강석 불대좌(佛臺坐)가 있다. 불대좌에는 지증대사가 불사한 철불장육상이 잇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근거는 문경 봉암사에 지증대사 탑비에 커다란 철불을 조성하여 기를 눌렀다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 보물190호. 이 승탑은 고려태조13년(930)에 출생하여 현종9년(1018)에 입적한 고려시대 전기의 고승 원공국사의 묘탑으로 고려현종16년(1025) 탑비와 함께 세워진 것이다. 이 탑은 세 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과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졌다. 8각을 이루고 있는 몸돌의 각면에는 앞뒤 양면에 문 모양과 자물쇠 모양을, 좌우양면에는 창문 모양을, 남은 네 면에는 사천왕입상을 새겼다. 지붕돌은 서까래와 기왓골, 막새기와의 모양을 표현해 놓아 목조건축의 지붕 모습을 충실히 본떴다. 꼭대기에는 8각형의 보개(寶蓋, 지붕모양의 장식)가 얹혀 있다. 이곳에 있었던 원래의 탑은 일제강점기때 서울로 옮겨져 일인의 집에 있었다. 그것을 1948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https://ktk84378837.tistory.com/10149) 현재 거돈사에 있는 탑은 200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보물78호. 이 비석은 고려시대의 스님인 원공국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공국사(930-1018)는 법명이 지종(智宗)이고 새속에서 쓰는 성은 이씨인데 비문에는 그의 생애와 행적, 덕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이 작고 머릿돌이 큰 것이 특징이다. 거북의 머리는 괴수 모양의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모양이다. 등에 새긴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우며 육각형 안에는 卍자 모양과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머릿돌에는 구름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일설에는 용은 여의주를 물어야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 이 비의 머릿돌을 옮기려 할 때 수십 명의 장정이 매달려도 움직이질 않아 문막읍 비두리 마을에서 빌려온 소의 혼을 이용하여 옮겼다고 한다. 비석의 머릿돌을 옮겨간 고개라는 비두넘이>비두네미>비두리가 되었다고 한다. 고려 현종16년(1025)에 세운 것으로 당시 해동공자로 불리던 대학자 최충이 글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새긴 글씨는 해서체인데 구양순의 서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여러 비에 새긴 글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중국에 비교하여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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