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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중앙박물관
    문화 culture/역사 전통 history tradition 2022. 4. 24. 23:44

    국립중앙박물관 중앙

    월광사월랑선사탑비(月光寺圓朗禪師塔碑), 보물 제360호. 진성왕4년(890)에 신라말 고승 원랑선사(816~883)의 행적을 기록하여 세웠다. 당 유학승인 원랑선사가 입적하자 헌강왕은 대보선광(大寶禪光)이라는 탑을 내리고 김영(金潁)에게 비문을 짓게 하고 글씨는 구양순의 해서체로 하였다. 거북받침 위에 비몸을 올려놓고 그 위에 교룡을 새긴 머릿돌을 얹은 구성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유행하였다. 여기 월광사는 도증(道證, ?~702)이 창건했다는 제천의 월광사임을 알아야 한다.  대가야 월광태자(月光太子)이자 마지막  왕인 도설지(道設智)가 세웠다는 합천 월광사에는 보물 제129호인 월광사지삼층석탑이 있다. 오목 음각기법을 쓴 얼굴 때문에 관람자를 따라 움직이는 듯한 불상이 유명한 문경 월광사도 있다. 2026년 개관예정인 국립충주박물관으로 이전하기 위해 월광사월랑선사탑비와 야외전시장에 전시된 충주 정토사지 흥법국사탑과 흥법국사탑비 세 점이 2023년6-9월에 철거되었다.

     

    경천사십층석탑(현 개풍). 고려 충목왕4년(1348) 대리석으로 고려의 전통과 원(元)의 라마(티베트) 수법을 바탕하여 목조건축양식을 표현하였다. 높이 13.5m. 기단부는 당 현장법사와 손오공이 인도에서 경전을 구해오는 여정을 중심으로 나한과 사자를 그렸다. 이맛돌에 새겨진 '지정8년 무자3월일'이 있어 1348년(충목왕4) 설립으로 계산된다. 1909년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반환되어 경복궁 근정전에 있던 것을 1960년 중앙박물관으로 옮겼다. 13불회도상과 함께 탑의 구조나 형식 자체를 모방하여 120년 후인 1486년에 원각사지(圓覺寺址) 10층석탑이 세워졌고 이는 예전 원각사지인 탑골공원에 전하고 있다. 국보 제86호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현재 남아 있는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황초령비·마운령비는 삼국관계와 신라의 정치상·사회상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당시 신라의 영토 경계는 물론 짐·제왕건호 등의 용어를 통해 신라의 당당한 자존의식을 알 수 있다. 순수(巡狩)란 천자(天子)가 제후의 봉지를 직접 순회하면서 현지의 통치상황을 보고받는 의례를 말한다. 순수비는 이 비문 속의 순수관경이란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진흥왕은 가야 소국의 완전병합, 한강유역의 확보, 함경도 해안지방 진출 등 활발한 대외정복사업을 수행하여 광범한 지역을 영토에 편입한 뒤 척경과 순수를 기념하여 진흥왕16년(555) 북한산 비봉에 세웠다. 이 비는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였고 그 사실을 비문에 기록해 놓았다. 비가 있던 자리에는 모조비를 세웠다. 국보 제3호.

    사진은 문화재청. 단양 신라 적성비는 국보 제198호.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는 국보 제33호

     

    반가사유상, 반가(半跏)는 양쪽발을 각각 다른쪽 다리에 엇갈리게 얹어 앉는 결가부좌(結跏趺坐)에서 한쪽 다리를 내려뜨린 자세이며, 사유(思惟)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 상태를 말한다. 반가사유상은 이처럼 깊은 생각에 빠진 석가모니의 모습이면서 깨달음을 잠시 미루고 있는 수행자와 보살의 모습이기도 하다. 살짝 다문 입가에 번진 미소는 깊은 생각 끝에 도달하는 영원한 깨달음의 찰나를 연상하게 한다. 6세기 후반 날카로운 콧대와 또렷한 눈매 그리고 화려한 장신구와 절제된 옷이 생동감을 주고 옷사이로 드러난 목걸이와 팔장식은 화려함을 더한다. 출처 불명의 이 사유상은 조선총독부가 일인 골동품 수집가로부터 4천원에 매입하고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갔다가 해방되면서 국립박물관이 인수하였다. 국보 제78호였는데 국보 1962-1로 고쳐부르고 있다.

     7세기 전반 단순하고 절제된양식으로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 세 개의 반원으로 이루어진 보관(寶冠)의 형태와 두 줄의 원형 목걸이는 간결함을 더한다. 반면 무릎 아래 옷주름은 물결치듯 율동감 있게 표현되어 입체적으로 흘러내리며 역동성을 보여준다. 양손의 손가락에선 섬세함이 느껴지고 힘주어 구부린 발가락에는 긴장감이 넘쳐흐른다. 일본 고류지(광륭사)에서 목조반가사유상을 만났을 때의 감동이 그대로 밀려왔다. 목조반가사유상과 금각사-일본백제문화답사4 :: 시사랑꽃사랑 (tistory.com) 1912년 이왕가박물관이 일본의 고미술상에서 2천6백원에 구입하고 해방후 국립박물관이 인수하였다.  엄지발가락은 위쪽으로 굽어 있다. 깨달음이 표현된 것이다. 극적인 깨달음의 순간, 그 통찰과 희열이 신체에 물리적 영향을 주어 발가락 동작의 변화로 나타났다.(유창종 유금와당박물관장, 신동아 22년4월호, 국보반가상 굽어진 손발가락의 비밀). 손가락 역시 실제로 동작하기 어렵다. 이 또한 치열하고 극적인 깨달음이 있어야 가능한 자세다. 김홍도의 씨름 우측하단 구경꾼의 바뀐 손가락도 마찬가지다(이광표). 국보 제83호였는데 지금은 1962-2로 고쳐 부르고 있다. 국보 반가사유상, 굽어진 손·발가락 비밀 : 신동아 (donga.com)

     

    반가사유상 / 최찬상

     

    면벽한 자세만

    철로 남기고

    그는 어디 가고 없다

    어떤 것은 자세만으로도

    생각이므로

    그는 그 안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

    한 자세로

    녹이 슬었으므로

    천 갈래 만 갈래로 흘러내린 생각이

    이제, 어디 가닿는 데가 없어도

    반짝이겠다

    [201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리모양 토기. 삼국시대 3~4세기

    목가리개와 판갑옷. 신라 4세기. 

    금새 날개모양 관꾸미개는 황남대총에서 출토되고, 고깔모양 관은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되었다. 신라 5세기. 

    가야시대의 철제 갑옷과 어깨가리개와 투구

    뿔잔(角杯). 5~6세기 굽다리 위에 말 또는 사슴 모양의 장식을 올린 뒤 짐승의 등에 뿔잔을 붙였다. 굽다리가 곡선형이므로 가야 것으로 추정되며 음료나 술을 담았을 것이다.

    사슴장식 구멍 단지. 5~6세기, 단지 아래쪽에 사슴 두 마리가 과장 표현되어 있는 공 모양의 단지. 사슴은 고대 북방아시아에서 여러 민족이 신성시하던 동물로 가야의 에니멀리즘을 엿볼 수 있다.

    토기

    용머리상. 발해시대 8~9세기

    팔부중(八部衆). 불법을 수호하고 민중을 교화하는 아수라와 건달바 신이다. 아수라는 본래 싸움의 신이었으나 부처님에게 교화되어 불법을 지키는 신이 되었다. 건달바는 모두 사자의 머리가죽과 같은 것을 쓰고 있다. 오늘날 건달이란 말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십이지상. 왼쪽의 마상(馬像)은 남북국시대(통일신라) 8~9세기에 곱돌로 제작되었으며 김유신 묘에서 출토되었다.

    백제 위덕왕(577년)이 세운 왕흥사에서 출토된 치미(鴟尾). 소리개(鴟)의 꽁무니를 닮았나? 중국 한(漢)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화재를 방지하고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뜻으로 설치되었으며 지붕 위 용마루 양끝단을 잡아주고 보호하는 장식 역할도 하였다. 부여박물관 탐방 :: 시사랑꽃사랑 (tistory.com)

    금동향로 부여박물관 탐방 :: 시사랑꽃사랑 (tistory.com)

    신라 금관과 허리띠. 금관은 머리띠에 나뭇가지와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세워진 형태다. 금관의 나뭇가지 도안은 통치자이자 국가 제의를 주관하는 최고지배자 마립간과 그 일족의 정체성과 세계관 즉 신성한 왕권을 상징하는 관이었다. 금허리띠는 버클에 해당하는 띠고리, 허리끝에 다는 띠끝꾸미개, 가죽 또는 비단허리띠의 꾸미개, 허리띠에 매달아 드리웠던 띠뜨리개로 구성된다. 띠뜨리개에는 물고기 모양, 손칼, 곱은 옥 등이 매달려 있는데 일생생활에 필요한 연모임을 의미한다.

    금귀걸이

    발걸이. 남북국시대(통일신라). 8~9세기.

    짐승얼굴무늬기와. 남북국시대(통일신라). 8~9세기. 안압지 출토

    청운사명 청동금고. 고려 1301년(충렬왕27). 구리로 만들어 공양이나 예불에 사용되었는데 문씨부인과 향도들이 만들어 청운사에 기증하였다.

    청자철화 모란무늬 매병과 국화넝쿨무늬 매병. 산화철을 안료로 청자의 표면에 그림을 그려넣어 만든다. 붓의 율동감이 느껴지고 색채의 대비가 또렸한다. 철화청자의 전성기에 만들어졌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1241년(고려 고종28)

    청녕4년이 새겨진 청동 청녕4년명종. 1058년(고려 문종12). 청녕(淸寗)은 요(遼)나라 도종 때의 연호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체요절. 1377년 청주의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한다는 기록이 있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2001년 유네스코세계기록물로 등재되었다.

    목판인쇄는 11세기에 초조대장경과 대각국사 의천의 교장, 13세기 전반에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이 대표적이다. 초조대장경은 몽골침입으로 소실되어 인쇄본만 전한다. 재조대장경은 몽골침입을 불심으로 물리치고자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판각하였으며 전해지는 한역대장경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이다. 판각은 해인사에 전하며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려(김부식 金富軾)가 기록한 삼국의 역사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함께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 김부식이 경주 김씨라서 승자인 신라에 유리한 서술을 한 부분도 있다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조선(김종서 정인지 등)이 기록한 고려의 역사 '고려사'. 고려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인물 등의 내용을 기전체(紀傳體)로 정리한 관찬사서로 고려시대 역사연구의 기본 자료이다. 조선 건국 합리화라는 정치적 목적과 아울러 이전 왕조인 고려의 무신정권기∼우왕·창왕기까지의 폐정을 권계하고 교훈을 찾고자 하는 목적으로 편찬되었지만, 사료 선택의 엄정성과 객관적인 서술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동궐도(東闕圖). 조선 순조26-31년(1826-1831). 동아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잇는 국보 제249호의 복제품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궁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이라 부른다. 창덕궁은 선조25년(1592) 임진란으로 소실된 후 1867년 복원되기까지 270년간 경희궁과 함께 대표적 왕궁이었다. 왕궁의 그림을 담당한 관청인 도화서 화원이 그렸다. 일제때 훼손된 동궐을 복원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동아대학교 소장 국보 249호의 복제품이다.

    측우기(測雨器). 보물 843호인 기상청의 관상감측우대(觀象監測雨臺) 의 복제품. 측우기는 세종23년(1441) 세계 최초로 발명되어 이듬해부터 강우량을 측정하기 시작하였다. 

    청계천수표(淸溪川水標). 성종(재위 1469∼1494) 때 돌기둥으로 개량한 것으로 높이 3m, 폭 20㎝의 화강암 사각기둥으로 만들었다. 본품은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있으며 보물838호이다.  

    조선 백자를 대표하는 달항아리. 보물 1437호. 달항아리는 이 땅의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다. 풍만한 곡선과 담박한 색채, 절제된 미감에서 수많은 작가가 모티브를 얻었다. ‘달항아리 작가’라고 할 만큼 집중적으로 달항아리를 그렸던 수화(樹話) 김환기, 자신의 호를 도자기의 샘이라는 의미로 ‘도천(陶泉)’이라고 지은 도상봉이 대표적이다. 김환기 화백은 백자 달항아리를 성북동 집 정원에 놓고 “달 뜬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달항아리의 비밀은 가운데 이음매에 있다. 예전의 기술로는 높이가 40㎝ 넘는 큰 항아리를 물레로 뽑아 올릴 수 없었다. 젖은 태토(胎土)가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발을 포개는 발상의 전환으로 반씩 빚어 이어붙이는 지혜를 발휘했다. 약간 이지러진, 어리숙한 둥근 형태가 편안한 느낌을 준다. 혜곡 최순우는 달항아리를 두고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 1437호

     

    마패(馬牌), 조선시대  출장 가는 관원에게 상서원(尙瑞院)에서 지급한 역마(驛馬) 사용 허가증. 고려시대에는 나무호패였으나 파손이 심해 세종 때부터 금속으로 제작하였다.

    운현궁 화포. 운현궁에서 만든 서구식 대포.

    척화비. 조선 고종8년(1871) 서양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는 비석이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대원군의 쇄국정책 일환이다. 종로에 세웠던 위 척화비는 임오군란 이후 철거되어 묻혔다가 보신각 이전시 발굴되었다. 

    일청한담판도. 일본 1894년작. 종이에 채색. 조선의 민영준(閔泳駿, 나중에 閔泳徽로 개명)과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일본의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공사가 조선주둔병력에 관해 의논하는 장면이다. 일봉공사가 조선과 청의 관리를 윽박지르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 독일인 에케르트(Franz von Eckert)가 작곡하였다. 1890년대말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랭자인(Auld Lang Syne)의 곡조에 배재학당 학생들이 부른 애국가도 잇었다. 1901년 독일인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가 고종 50세 생일에 처음 연주되었으며 1902년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실내전시물을 보고 석물정원으로 나왔다.

    염거화상탑 전 원주흥법사지 염거화상탑(傳 原州興法寺址 廉居和尙塔)은 신라말 가지산문 2대 선사인 염거화상의 사리탑.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는 최초작품이라는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 탑안에서 발견된 금동탑지(金銅塔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신라 문성왕 6년(844)때 이 탑을 세웠음을 알게 되었다. 다른 부도에 비하여 작지만 우아한 기품과 사천왕 등 소박한 조각 솜씨를 보이고 있다. 국보 제104호.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보월능공탑(昌原鳳林寺址眞鏡大師塔), 높이2.3m.  보물 제362호. 신라말 고승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의 부도. 전형적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지만, 표면의 장엄조각은 적은 편이어서 석재의 색조와 수법이 가냘퍼 박력이 적어 청초한 감을 주므로 신라양식에서 새로운 양식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엿보인다.

     

    양평 보리사 대경대사현기탑비(楊平 菩提寺址 大鏡大師塔碑), 라말여초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  862∼930)의 행적을 기록한 높이 3.5m인 탑비. 고려 태조 22년(939년) 건립. 양평 연수리 보리사(菩提寺) 터에 있던 것을 1914년에 경복궁,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 거북받침돌은 구슬을 물고 일어서는 모습이며 머릿돌이 커 부자연스럽지만 구름과 용이 힘차다. 보물 제361호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原州 興法寺址 眞空大師塔 및 石棺). 라말려초 고승 진공대사의 사리탑과 석관. 당유학 후 신덕왕의 스승. 고려태조 23년(940년) 건립 추정. 보물 제365호. 원주 흥법사터에서 경복궁으로 반출되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왔다. 높이2.9m. 석관높이 48cm. 용틀임이 생동감있고 기왓골 암막새 수막새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8각지붕 모양의 보개가 있다. 석관은 불교유물함이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 시사랑꽃사랑 (tistory.com)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忠州淨土寺址弘法國師塔). 라말 신덕왕 때 활동하다 1017(현종8년)에 입적한 흥법국사의 부도. 높이2.5m. 화강암 8각원당형과 달리 탑신석이 편마암 구형이다. 중국 천태산국청사와 상방광사의 송원대 탑이 있다. 려말 회암사지공대사부도와 나옹화상부도 이후 주류가 되었다. 국보 제102호.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비(忠州 淨土寺址 弘法國師塔碑), 당 유학한 후 선(禪)을 일으키고 정토사에서 입적한 홍법국사를 위하여 고려 목종이 자등(慈燈)이라는 탑명을 내려 손몽주에게 비의 글을 짓게 하였다. 고려 현종 8년(1017)에 건립된 비의 앞면에는 대사의 행적이 있고, 뒷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표면의 훼손이 심하다. 거북 받침돌에 용머리를 조각하는 것은 라말여초의 특징이다. 보물 제359호. 2026년 개관예정인 국립충주박물관으로 이전하기 위해 월광사월랑선사탑비와 야외전시장에 전시된 충주 정토사지 흥법국사탑 및 흥법국사탑비 세 점이 2023년 6-9월에 철거되었다.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原州 居頓寺址 圓空國師塔), 고려초 지종(智宗) 원공국사(930∼1018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이다. 원공국사탑비는 고려 현종16년(1025년)에 팔각원당(八角圓堂) 형식으로 건립되었고, 일인에 의해 반출되었다가 돌아왔다. 보물 제190호. 탑비(塔碑)와 지대석이 거돈사지에 있다.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 시사랑꽃사랑 (tistory.com)

     

    개성 현화사석등(玄化寺石燈), 1020년(고려현종11)에 조성. 높이4.2m. 간주석이 장구형인 고복형석등으로 전형적 양식에 비해 화려하다. 고복형간주석은 원기둥 모양으로 중간은 꽃무늬, 상하는 앙련과 복련이다. 하대석 아랫대는 3개의 안상이, 윗대는 8엽의 단판연화문 조각이다. 상륜부는 노반, 보륜, 보개,보주가 놓여있다. 관촉사 석등의 보주와 비슷하다. https://ktk84378837.tistory.com/7086

     

    북묘비(北廟碑). 촉한 장수 관우(關羽)를 제향하기 위하여 고종20년(1883)에 사묘를 서울북쪽에 세우고 1887년에 그 내력을 기록한 비석. 중국에서 무력과 재물을 겸비한 관우를 신으로 섬겼는데 임란 때 명장 진린과 병사들이 1598년에 남묘를 세웠다. 1602년 동묘, 1883년 북묘, 1902년 서묘를 세웠는데 지금은 동묘와 남묘만 남아 있다. 북묘는 서울 명륜동 흥덕골에 고종이 진린을 기념하여 건립하고 비문을 지었으며 글씨는 민영환(閔泳煥)이 썼다. 왕실이 세운 석비답게 높직한 댓돌위에 육중한 빗빗돌의 당당한 풍채와 간결하고 엄숙한 조형미, 또렷하고 질서 있는 해서체 글씨가 돋보여 석비의 품격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

     

    남산쪽

    용산쪽

    국립중앙박물관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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