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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안읍성(樂安邑城) 민속마을
    문화 culture/역사 전통 history tradition 2022. 10. 3. 16:45

     

    낙안읍성 낙풍루(樂豊樓), 낙안읍성 동문에 해당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태조 6년(1397) 낙안 출신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 김빈길(金贇吉, 고성김씨)이 흙으로 성(토성)을 쌓았고, 세종 6년(1424) 석성(石城)으로 개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총길이 1410m, 높이 4~5m, 성벽 상단 폭 2~3m로 원형훼손이 가장 적은 읍성으로 알려진다. 지방의 정치·경제·문화·교육의 중심지요, 군사적 기능을 가진 읍성은 왜적 출몰이 잦은 충청·전라·경상도 해안 인접지역 58개소와 내륙의 요충지에 축조하였고, 전국에 179개소나 되었다. 그러나 경술국치(1910) 때 조선총독부령 제1호에 의해 관아와 함께 대부분 헐렸다고 한다. 낙안의 '진산'으로 일컫는 금전산(670m) 자락에서 흘러내린 개천을 보완한 해자(垓字)가 있었다. 넓이 3.5m~4m, 깊이 1.5m~2m로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는 낙안읍성 해자는 처음엔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흘렀으나 당시 낙안 군수 애첩이 서문 쪽에 살았는데 비가 많이 내리면 집이 물에 잠기곤 해서 물길을 막아버렸다는 얘기가 내려온다. 현재 남아 있는 해자 길이는 동쪽, 남쪽 합해서 596m 정도.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 중시조인  오태석(吳太石, 1895-1953) 생가. 가까이 스승인 동편제의 거장 국창 송만갑(宋萬甲,1865-1939) 생가가 이웃해 있다.

     

    임경업장군 비각. 숭정(崇禎)은 중국 명(明) 숭정제(崇禎帝)의 연호로 원년 즉 1628년(인조6)에 군수 임경업을 기리기 위해 비각과과 비를 세웠다. 임경업(1594-1646)은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인조4년(1626)에 낙안군수로 부임해왔다. 인조6년3월에 내직으로 옮겨갈 때까지 낙안읍성을 쌓는등 어진 다스림을 베풀었으며,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 지역은 임장군을 신봉하여 정월보름에 큰 제례가 이어지고 있다. 비각은 앞면옆면 각1칸이며 팔작지붕이다. 앞면과 옆면의 기둥사이에는 붉은 막대를 세웠고, 뒷면은 길게 널판을 끼워 벽을 이루게 하였다. 바각 앞면엔 전군수임장군비각영건표적비, 비각앞면 윗부분에 차임장군비각판상운(1893,신병우)과 비각문관중건기(1952,김상언)이라 새긴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어, 영조24(1748)에 비각을 세운 후 1893년과 1952년에 보수하였을 알 수 있다. 비는 거북받침을 위로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신 앞면 중앙에 군수임공경업선정비라는 비명을 세로로 새겼고, 왼쪽 아래부분에 건립연대가 적었다. 이 기록을 통해 임경업이 군수를 마치고 낙안읍성을 떠나던 인조6년(1628)에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어민들이 안녕과 만선의 수호신으로 임경업장군을 모신 황금산사는 서산 황금산 정상에 위치한다. 황금산의 코끼리와 임경업 :: 시사랑꽃사랑 (tistory.com)

     

    낙민루 앞의 느티나무 보호수 두 그루. 도기념물133호. 1980년 지정. 수령400년. 높이25m. 둘레4m. 나주목사가 각 군을 순회할 때 아홉번째로 들러 쉬며 머물렀다 하여 구정(九停)뜰이라 한다. 낙안읍성 낙민루(樂民樓),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로서 동란시 소실되었다가 1984년 복원. 정면3칸, 측면2칸의 2층 누각건물이다. 1층은 12개의 사각형 돌기둥을 세워 동헌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고, 2층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고 원형기둥을 세워 팔작지붕을 받게 하였다. 중앙에는 낙민고를 설치하였으며 연등천장으로 내부 본부는 모로단청하였다.

     

    낙안읍성 동헌, 이 거물은 지방관아건물로 감사, 병사, 수사, 수령 등이 지방행정과 송사를 처리하면서 동수령, 서관리, 중마루는 송사를 다루던 곳으로 사용하였다. 지금의 동헌(사무당 使無堂)은 1990년 정면5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형태로 복원되었다. 사무는 농어 안연편에 지방수령이 송사까지 책임을 지고 있어 더러 백성의 피해가 많아 권력을 남용하거나 백성을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를 낙안읍성 당호에 담고 있다.

     

    객사

     

    정겨운 돌담길 이야기 샘솟는 납작초가 담장을 덮은 큰닭의덩굴

     

    낙안읍성 남문 쌍청루, 西문인 낙추문과 전망좋은 그곳 높은 성곽길에서 읍성을 내려다 보지 못하고 나왔다. 사진촬영의 명소인데...

     

    낙안읍성 옥사(獄舍).  역대 굿누들이 선정을 베풀어 다른 지역과는 달리 흉악법이 없엇을 것으로 여겨진다. 옛 지방관아에 딸린 부속사로 죄를 지은 사람을 격리수용하던 시설. 2002년 복원하였으며 좌는 여름옥사, 우는 겨울옥사로 설계되었다. 주변 담장도 어는 담장보다 높게(2.5m) 쌓았으며 관아옆에 있는 일반 옥사와 달리 멀리 떨어져 있다. 이는 낙토민안의 고장으로 역대 군수들이 선정을 배풀어 흉악범이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옥사 주변에 연지를 두어 죄수의 탈주를 막아주는 역할도 측측해 볼 수 있다 .

     

    연지

    성벽

    제비콩,  편두

     

    낙안읍성 안내도.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조선 시대의 읍성. 형태는 사각형이며 길이는 1,410미터에 달한다. 성안은 전통적인 마을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사적 제3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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