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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향교 慶州鄕校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24. 10. 6. 19:43
경주향교 우물 총명수, 향교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던 신라시대 우물로 분황사 우물에 버금가는 규모다. 원효와 요석이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은 요석궁(瑤石宮) 자리이며 설총이 이 물을 마시고 대학자가 되었다고 총명수(聰明水)라 하였다.
대성전
명륜당
월령교에서 본 경주향교(慶州鄕校), 경주시 교동에 있으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이다. 창건연대는 불확실하고 신라 신문왕 때 국학(國學)-고려때 학원(學院)-조선에 향교로 이어졌다. 나주향교(羅州鄕校)와 함께 향교 건물 배치의 표본이 된다. 임진란 이후 여러 중수과정을 거쳤다.
내물왕릉(奈勿王陵), 신라의 제17대 왕. 356년 4월 내물왕대부터 912년 4월 제52대 효공왕대까지 556년간[9] 이어지는 경주 김씨 왕조의 시작점이 되는 왕이었고, 신라 왕조의 중시조에 해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왕 칭호인 마립간(麻立干)을 처음 사용하였고, 김씨의 왕위 세습과 성골이 확립되었으며, 고구려의 내정간섭과 백제, 가야, 왜의 침입을 겪는 난관 속에서 국가 보전에 성공해 향후 신라가 중흥을 이루는 기반을 마련했다. 신라에서는 奈 자를 나로 발음했기에 나물이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인왕동고분군
계림의 왕버들
계림비각, 계림은 원래는 시림(始林), 구림(鳩林)이었다가 김알지閼智 탄생설화 이후 숲 이름과 지명이 되었다. 삼국사기 탈해왕9년(65)에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이튿날 신하인 호공(瓠公)을 보내 살폈는데, 금궤에 나뭇가지가 걸려 있고 그 아래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그 안에 자태가 빼어난 사내아이가 있으므로 왕은 하늘이 보냈다고 여겨 거두어 길렀다. 총명ㅎ하고 자략이 뛰어나 알지라 부르고 김씨라 하였다. 알지는 아이의 뜻이다. 탈해는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알지는 파사(婆娑)에게 양보하였다. 이후 알지의 7대손이 왕위에 올랐으니 미추왕이고 이후 내물왕부터 멸망때까지 알지 후손이 다스렸다. 손조3년(1803)에 세운 김알지탄생기록비가 전한다.
조선 중기 성리학자이자 동아시아 7년전쟁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신 관란(觀滿) 이승증(李承曾, 1515~1599)선생의 서원유적지다. 왼쪽 소나무 아래 임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격문을 돌린 공으로 창의비(倡義碑)를 세웠고, 정효각(旌孝閣)이 있으며, 오른쪽이 문호사(汶湖社) 건물이다. 관란서원은 조선 중기 성리학의 거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효종 10년(1659)에 지방 유림들이 세웠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01년 재건하였다. 서원 안에는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안인사(安仁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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