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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남계서원과 청계서원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24. 5. 22. 21:08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곳 중 아직까지 기회가 없었던 함양의 남계서원을 비로소 이번에 탐사하게 되어 너무 기쁘고 내내 설레었다. 등재된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 남계서원(1552), 옥산서원(1573), 도산서원(1574), 필암서원(1590), 도동서원(1605), 병산서원(1613), 무성서원(1615), 돈암서원(1634)다.
남계서원(濫溪書院),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조선 명종 7년(1552)에 지었다. 명종 21년(1566)에 나라에서 ‘남계’라는 사액을 내려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6년(1603)에 나촌으로 옮겨 지었다가, 광해군 4년(1612) 옛 터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숙종 때 강익과 정온을 더하여 모셨다. 따로 사당을 짓고 유호인과 정홍서를 모셨다가, 고종 5년(1868)에 이는 훼철되었다. 앞쪽 낮은 곳에는 공부하는 강학공간을 두었고 뒤쪽 높은 곳에는 사당을 두어 제향공간을 이룬 전학후문에 배치를 하였다. 누문인 풍영루를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그 앞쪽 양 옆으로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양정재와 보인재가 있다. 재 앞에 각각 연못과 애련헌·영매헌이 있다. 내삼문 안쪽으로 사당이 있어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 밖에 전사청과 고직사·묘정비각 등이 있으며,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으며, 『어정오경백편』·『고려사』 등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정여창을 모신 서원은 전국적으로 9곳에 이르며, 그중 주된 곳이 남계서원이다.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남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풍영루는 문루(門樓)를 겸한 유생들의 휴식처인데, 양산향교의 문루와 사천 구계서원의 문루도 같은 이름이다,
밀양 남계서원(南溪書院)은 영헌공 김지대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김지대(1190∼1266)는 고려 고종 때 문신으로 청도 김씨의 시조이다. 고종 4년(1217)에 거란이 침입하자 병환 중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가 싸워 충과 효를 동시에 이루기도 하였다. 남계서원은 조선 숙종 30년(1704)에 지었다.
풍영루(風詠樓)는 퇴색하고 덕지덕지하다.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이고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던 증점(曾點)의 뜻을 바로 여기서 느낄 수 있다하여 풍영루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는 준도문(遵道門) 으로 유생들이 공부를 하거나 손님이 오면 학문을 토론하고 정담을 나누던 누각이다. 정환필(鄭煥弼)과 기정진이 쓴 ‘풍영루기’ 현액이 걸려 있는데 풍영루에서 내려다본 이 일대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풍영루 후면은 조도문(遭道門)이다. 공부하러 왔다가 도를 얻고 나가는 문인 것이다.
남계서원 왼쪽 묘정비 뒤 가림막은 서재인 영매헌과 보인재인데 행사 현수막에 가려져 있다
묘정비(藍溪書院廟庭碑) , 남계서원에 일두 정여창,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 개암 강익(介庵) 강익(姜翼,1523∼1567) 세 분을 모시고 있으나 이를 찬양하는 송덕비가 없어 안타까워하다가 1779년에 묘정비를 세우면서 정조때 문관 김종후가 지은 글을 새겼다. 지붕동의 채색이 곱다. 옥산서원에 신도비에서 단청을 본 적이 있다.
남계서원 현액이 흥미롭게도 남계(濫溪)와 서원(書院)이 분리되어 있다. 이런 경우를 다른 서원에서는 볼 수 없었으며 남계서원과 청계서원에서만 경험하였다.
서원 내부에는 집의재, 명성당, 거경재 현액이 걸려 있다.
집 모양의 풍경
사당 입구에서 본 경판고(좌)와 남계서원 후면
사당 입구 좌우에서 용틀림하는 배롱나무 고목
사당
사당 담장 밖의 소나무가 연륜과 절개를 상징하는 듯.
청계서원(靑溪書院) 남계서원 우측에 있으며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그의 스승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사건에 연루되어 무오사화로 희생되었다. 글에 뛰어났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였다. 연산군 1년(1495)에는 ‘청계정사’를 세워 유생을 가르쳤고, 광무 10년(1905)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그 뒤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청계서원이라 하였다. 구경재와 동재, 서재, 홍남문, 솟을삼문 등의 건물이 남아 있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탁영 김일손유허비, 광무 10년(1905)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그 뒤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청계서원이라 하였다. 구경재와 동재, 서재, 홍남문, 솟을삼문 등의 건물이 남아 있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병의재(좌) 애락당(중) 동덕재(우) 현액이 보이고 남계서원 현액처럼 청계서원 또한 청계와 서원이 분리되어 있다.
집의재
명성당
거경재
서재인 역가재
동재인 구경재
양정재
홍살문 너머 청계서원의 외삼문인 취도문(就道門)
서원을 나와 일두 정여창묘역으로 향하는 입구에 하동정씨문헌공 종중 재실이 보인다. 경상남도문화재로 선정된 축하현수막이 재실임을 가리키고 있다.
함양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咸陽 昇安寺址石造如來坐像) 승안사지 3층 석탑에서 20m 가량 떨어진 곳의 개천 주위에 있는 불상이다. 오른팔 등에 파손이 있고, 하체가 묻혀 있으나 상체의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머리 부분은 신체와 비례가 맞지 않아 매우 어색한 느낌을 준다. 또한 선각에 가까운 띠주름식의 옷주름은 형식화되었고, 좁은 어깨, 평판적이고 직선적인 신체의 윤곽선 등은 생동감이 없다. 이러한 표현 등에서 당대 거구(巨軀) 불상에 나타난 조형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임이 분명하다.
함양 승안사지 삼층석탑(咸陽 昇安寺址 三層石塔) 보물294호. 고려시대의 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곳곳에 고려 특유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는데, 위층 기단에는 부처, 보살, 비천(飛天) 등의 모습을 새겨두었다. 또한 위층 기단의 맨 윗돌에는 연꽃조각을 새겨 둘러 놓았는데, 이러한 장식은 보기 드문 모습이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고 있다. 2층부터는 몸돌의 크기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는데, 1층의 몸돌에는 각 면마다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여 놓았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고,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지붕의 경사는 급하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며 네 귀퉁이가 거의 들려있지 않아 둔중해 보인다. 탑의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과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가 남아있다. 대체로 통일신라 석탑의 기본을 잘 따르고 있다. 기단과 탑신의 비례가 균형을 잃어잘 다듬은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곳곳에 나타나는 특수한 양식이나 장식에 많은 힘을 기울인 흔적 등 고려 전기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이 탑은 원래의 위치에서 두 번 옮겨졌는데, 1962년 탑을 옮길 당시 1층 몸돌에서 발견된 사리장치를 통해 처음 탑을 옮겨 세운 시기가 조선 성종 25년(1494)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함양 정여창묘역(一蠹 鄭汝昌 墓域) 鄭汝昌(1450-1504)은 조선 성리학사상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하여, 정암 조광조·회재 이언적·퇴계 이황·남명 조식 등과 같은 성리학자들의 배출을 가능케 한 인물이다.그의 묘소는 1504년 서거 직후에 일어난 갑자사화로 인해 부관참시라는 처참한 역사적 현실을 겪었던 곳이다. 묘역 내에는 일두 정여창의 묘와 정경부인 완산이씨의 묘가 자리잡고 있으며 정여창 묘 앞에 선 신도비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려 하자 자결을 시도하여 청사에 이름이 길이 빛나는 桐溪 鄭蘊(1569-1641)이 지은 것이다. 동계 정온 또한 이웃 고을 출신으로 일두 정여창을 사숙하였던 인물이다. 이 비석이 세워진 것은 숭정 기원후 기사(서기 1689년) 3월이며, 각자를 한 사람은 鄭元夫와 僧 三悅이라고 새겨져 있다. 묘소는 조선 전기 사대부의 무덤양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묘역 내 석물들도 우수한 작품으로 그 가치가 더욱 높게 평가된다. 양(羊)으로 추정되는 석물이 때마침 흐드러진 고들빼기 노란 꽃을 탐하는 장면이 흥미롭다. 정여창 묘 위는 부인인 완산이씨의 묘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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