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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박물관문화 culture/역사 전통 history tradition 2024. 7. 20. 22:01
오늘은 완전 날궂이를 하였다. 연산에 이르러 집중호우를 만났는데 얼마나 맹폭을 하는지 비상등을 켜고도 겁이 덜컥 날 수밖에 없는 것이 동행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연대훈련할 때 터트린 연막탄 속을 가는 느낌이었다. 도로에서 만났으니 대피할 곳도 없을 뿐더러 앞에도 차량 뒤에도 차량인지라 멈춰 있을 수도 없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5분여가 지나자 안개비로 변하였다. 흐유, 간 떨어질 뻔 하였네. 야외전시장에 놓인 받침돌은 기어가는 거북이다. 장마 무더위에 지치고 힘들고 갑갑한가 보다. 등껍질에 잔뜩 나 있는 깃털을 보면 날고 싶다는 얘기다.
장방형 반듯하고 거대한 석조를 보다가 백제 때 석조를 보면 귀엽고 이쁘고 얽매이지 않아 편안하다.
부여 당유인원기공비(扶餘 唐 劉仁願 紀功碑), 보물 제21호.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부소산에 세웠던 비석이다. 당 고종에 발탁된 이후의 활동상이 기록되어 있다.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부흥운동을 평정한 이후의 행적은 지워져 일수가 없다.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명이 당나라로 압송된 사실과 부흥운동의 주요 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다.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보물 제107호. 고려시대 임천에 보광사(普光寺)를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圓明國師 王澄儼, 1090- 1141)의 공적을 새긴 비다. 그는 숙종과 명의왕태후 유씨의 셋째 아들이며, 예종의 친동생이다. 몸돌(碑身)만 남아 있는데 앞면은 건립당시인 공민왕7년(1358)에, 뒷면은 조선영조26년(1750)에 새겼다. 19세에 등과하여 선원사에서 뜻을 펴오다가 공민왕 원년(1351)에 입적하였다. 제자들에게 탑을 세우지 않도록 지시하여 사후 6년이 지나서야 비가 세워졌다. 이 비석은 보광사중창비라고도 하며, 고려후기의 간략화된 석비 양식이라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비석 받침, 고려 11-13세기, 서천 군사리에서 출토되었는데 아래 이빨 하나가 빠져 있는 해학적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난다.
부여 석조 (石槽) , 보물 제194호. 본래 석조는 장방형 또는 원형의 돌 내부를 파내어 물을 저장하는 용도로 쓰던 석조물이다. 백제인의 간결화면서도 소박한 미감을 살린 형태나 세부 표현기법으로 보아 백제 왕궁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 표면에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탑신에 새겨진 것과 같이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호자(虎子), 호랑이 모양을 한 남성용 변기로.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도록 호랑이 등 부분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 호랑이라고 이름을 붙였거나 말거나 내 눈에는 다리 달린 물개로 보인다. 중국 호자와 구성과 기능이 유사하나 머리를 왼쪽으로 돌린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 둥글게 벌어진 입 위로 눈과 코가 간결하게 묘사된 점에서 백제 특유의 우아함이 느껴진다. 중국의 고대 기록에 황제가 행차할 때 시중을 드는 하인이 이 호자를 들고 뒤따랐다는 내용이 전해져 오고 있어 호자는 상위계층이 사용했던 남성용 변기로 추측된다. 부여 군수리 출토.
연통형 토기와 뚜껑,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부여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국보 제288호. 가장 오래된 사리장치로 능산리사지의 목탑심초석(心礎石) 위에서 발견되었다. 감실 앞면 좌우에는 각각 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백제 성왕13년(567)에 왕의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한다는 내용이다. 창왕은 위덕왕의 휘(諱)로 사비를 천도한 성왕의 아들로서 554년 왕위에 올랐다. 왕의 누이인 공주가 공양한 사리감이 목탑자에서 발견됨에 따라 이 절의 성격이 왕실의 원찰(願刹) 특히 신라와의 전쟁에서 정사한 성왕을 추모하고 바로 옆에 위치한 왕릉을 관리하던 절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국보 287호. 전체높이 64cm, 지름 20cm. 1993년 부여 능산리(陵山里) 고분군에서 출토. 사진은 국가유산청에서 차용.
금동광배金銅光背, 부여 능산리 출토, 광배는 불상의 머리나 몸체 뒤쪽에 있는 원형 또는 배 모양의 장식물이다. 부처의 몸에서 발산하는 진리와 지혜의 빛을 상징화한 것으로 덩굴무늬와 꽃봉오리가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복원한 광배는 지름 1미터에 달하므로 불상도 대형이었을 것이다.
부여 능산리 절터 출토 연꽃무늬 기와, 백제
사택지적비扶餘 砂宅智積碑. 백제귀족 사택지적(砂宅智積)이 세운 비석으로 부소산 남쪽 관북리에서 발견되었다. 비석 앞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칸을 치고 그 안에 남북조풍의 해서체로 총56개 글자를 새겼다. 비의 오른쪽 측면 위에는 둥근 원안에 봉황이 새겨져 있다. 문장은 중국 남북조시대의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이며, 사택가문을 비롯한 백제 귀족들이 향유했던 문화으 한 단면을 보여준다. 세월의 덧없음, 늙어가는 것에 대한 탄식과 불교에 의지하는 백제인의 정서를 읽을 수 있다.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해설, 보물 제794호. 복제품
금동보살입상, 보물 제330호, 백제, 부여 군수리사지 출토
정지원이 새겨진 금동삼존불입상, 보물 제196호, 백제, 부소산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 국보 제128호, 백제, 부여 규암면 출토
납석반가사유상[蠟石半跏思惟像], 백제, 부여 부소산 출토. 蠟石은 보통 곱돌이라 부른다.
금동광배[金銅光背], 백제, 부여 부소산성 발굴, 뒷면에는 “何多宜藏法師”라는 여섯 글자를 새겼는데, 이는 불상 제작을 발원한 승려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무늬전돌(塼乭), 보물 343호. 외리 출토 무늬전돌의 도상을 보면 연화·와운·반룡·봉황무늬는 원형, 봉황산수·산수인물·연대귀형·산수귀형은 사각형 구도를 취하고 있다. 이를 두고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고대 동아시아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내옥의 논문에서. 산수무늬 전돌은 중국을 포함해서 7세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산수화, 그것도 인물을 곁들인 산수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늬 전돌 세트 중에서도 백미라 할 수 있다. 이 전돌을 보면 하단에 물, 중앙에는 산과 나무, 그리고 윗부분에는 하늘을 그렸다. 하늘(천)과 땅(천)을 표현한 것인데, 결정적으로 인물이 보인다. 즉 오른쪽 하단부에 스님인지, 도인인지 모를 신비의 인물이 암자로 보이는 팔작기와 건물을 향해 걷고 있다.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그림에 천, 지, 인이 다 들어가 있는 셈이며, 산수에 인물이 곁들여진 산수인물화”라고 평가한다.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12290600001
청동소탑편(小塔片), 백제, 부여 전(傳) 천왕사지)天王寺址) 출토. 청동으로 만든 탑의 일부로 실제 건축물이 남아있지 않은 백제건축의 단초를 제공하는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높이가 5.2㎝ 정도 밖에 안되는 공예품이지만 백제시대 공포(拱包·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 같은 데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들)를 짐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유물이라 사료적 가치가 크다. 백제말기인 6-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건축양식을 살펴볼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출토됐다. 현재 탑신부(塔身部)와 옥개(屋蓋)가 남아 있는데, 당시 건축양식을 살펴 볼 수 있을 정도로 건축부재의 표현이 잘 되어 있다. 탑신에는 양쪽 우주(隅柱)와 각 면에 탱주 2주씩이 각출되었고, 옥개는 상면에 기와골을 정연하게 나타내고 있다.
상자모양 벽돌, 백제, 부여 군수리사지 출토
치미(鴟尾), 부소산 출토, 鴟는 소리개이므로 소리개의 꽁지를 닮았다는 뜻이다.
서까래기와, 부여 금성산 출토, 처마밑 연목과 부연에 부착하는 기와로 건물의 외관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동시에 건축부재인 서까래가 썩는 것을 예방하는 기능을 한다. 연목와와 부연와는 중앙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연목와는 원형이고 부연와는 방형이다. 백제의 서까래기와에는 모두 수막새와 비슷한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지름 20cm 에 달하여 건물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부여 정림사지의 연꽃무늬수막새(상)와 서까래기와(하)
암막새(平瓦當), 부여 금강사지 출토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扶餘 王興寺址 出土 舍利器), 국보 제327호. 목탑지의 심초석 남쪽 중앙 끝단에 마련된 장방형 사리공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가장 바깥에 청동제의 원통형 사리합을 두고 그 안에 은으로 만든 사리호, 그리고 보다 작은 금제 사리병을 중첩하여 안치한 3중의 봉안 방식을 취하였다.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가장 귀한 재질인 금, 은, 동을 순서대로 사용한 백제 사리장엄의 면모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청동제사리합에는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神化爲三' 즉, 정유년(丁酉年, 577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百濟王昌)(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가 장시(葬時)에 신(神)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비석머리, 보령 성주사터, 통일신라. 용이 새겨져 있어 이수(螭首, 蛟龍, 뿔없는 용)라 한다. 당나라때 확립되어 통일신라 직후 귀부(龜趺), 몸돌(塔身), 이수로 이루어진 비석을 만들었다. 중국의 이수는 비신과 함께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구산선문의 하나인 보령 성주사터에서 발견된 비석머리는 반룡(蟠龍, 승천하지 못한 용) 들이 서로 얽힌 모습이며 비석의 이름을 적는 제액(題額)이 원형이다. 성주사터에는 888년 입적한 무염의 비석이 남아 있고, 이수의 구성과 제액의 형태가 변형된 것으로 보아 성주사에 주석하였던 선사의 비석머리로 추정된다.
폭우 멈추더니 폭풍에 흔들리는 궁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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