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주 신륵사(神勒寺)문화 culture/불교문화 Buddhist culture 2022. 11. 3. 11:49
일주문이 좀 불안하다. 코끼리 국화탑이 불이문 앞에 떠억! 해탈문이라고도 불리는 불이문은 모든 것이 평등하고 차별이 없음을 불이(不二)라 하며, 불이문은 이러한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상징한다.
신륵이라는 말이 이목을 끈다. 첫째 신륵(神勒)이라는 말은 신이한 미륵(彌勒)보살의 줄임말이다.
둘째 고려 고종 때 건너 마을에 사나운 용마가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자, 인당(印塘)대사가 신력으로 고삐를 잡아채 다스렸다고 한다. 륵(勒)은 말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셋째 고려 우왕 때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懶翁, 1320~76)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용마(龍馬)에 신비한 굴레를 씌워 다스렸다고 한다.
넷째, 신륵사 삼층석탑 중수비문에 목은 이색의 부친인 한산군 이곡이 절벽의 모양새가 굴레와 비슷하다 하여 신륵이라 하였다.
신륵사 은행나무보호수. 수령600년, 높이22m. 둘레3.1m. 고유번호 여주-66. 지정연도 1982. 안내문에는 은행나무에 오신 관세음보살님 - 고려말 공민왕사 나옹스님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며 불법승 삼보를 상징하듯 세 줄기의 가지로서 모습을 갖추었고, 관세음보살님이 대자대비로써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발원으로 신륵사 은행나무에 나투신 것처럼 보인다. 고 소개하고 있다.
극락보전으로가는 입구의 전면은 구룡루(九龍樓)이며, 후면은 봉미산신륵사(鳳尾山神勒寺) 현판이 걸려 있다.
여주 신륵사 범종각
신륵사 목어 / 임영조
어디서 누가 낚아왔을까
神勒寺 누각 대들보에 매달린
물고기 한 마리가 강바람에 마른다
머리는 용 같고 몸은 잉어 비슷한
생김새 참 희안한 나무물고기
옥빛 여의주를 입으로 희롱하니
여주 들녘이 온통 화답하듯 푸르다
저 놈의 전생은 무엇이었길래
속은 몽땅 누구한테 빼주고
휑한 몸뚱이만 허공에 떠 한가할까
웬 젊은 스님 하나 그 속으로 들어가
마른 북어 패듯 신나게 두들긴다
속 없는 놈은 맞아야 싸다는 건지
무엇을 실토하라는 건지, 혹시
술 생각 나서 그러는 건 아닌지
매맞는 목어 울음소리가 살아서 튄다
생전의 죄업이 얼마나 깊고 크길래
구천까지 사무치는 울음을 보시하는가
아연 강물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내 허리가 갑자기 욱신욱신 아프다
이젠 입으로만 읽지 말고
눈으로 듣고 귀로 읽어 보아라!
나뭇잎들 퍼렇게 질려 손사래치고
서녘 하늘 붉게 취해 모로 눕는다
속 비워 가뿐한 목어 울음소리가
멀리 인천 앞 바다로 흘러간 강줄기를
상류로 상류로 다시 끌고 오는지
넉넉한 물비늘이 울먹울먹 빛난다
방생한 물고기도 저 소리로 크는가?
신륵사 다층석탑(多層石塔) 보물225호. 극락보전 앞에 있는데 2단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을 쌓아 통신과 여초의 일반적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부터 돌을 한 장씩 쌓는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하였다. 바닥돌 윗면엔 연꽃을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은 두꺼워 안정감을 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는 꽃모양이 새겨진 기둥이 있고 각 면에는 용무늬가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각 지붕볻 밑면받침은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에에서 가볍게 추켜 올라가고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밑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아래까지만 옛모습이 남아 있다. 각 부분 아래에 굄을 둔 점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특징이 일부 드러나지만, 세부적으로는 벗어나 있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우아하게 보이게 하며 전체적으로 국보2호인 원각사지 삼층석탑과 돌의 재질과 조각기법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1472년(성종3)에 중창했는데 이 탑도 이때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 극락보전(極樂寶殿) 유형문화재128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으로 1678년(숙종4)에 지어진후 1797년 중수하여 1800년(정조24)에 완성되었다. 앞면3칸,옆면2칸,지붕은 팔작이다.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사이에도 있는데 이를 다포라 한다. 안쪽에는 불단 위에 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삼존상(보물1791호)이 모셔저 있고 그 위에는 화려한 닫집과 1773년(영조49)에 제작한 범종 및 후불탱화가 있다.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나옹이 쓴 천추만세 현판이 있는데 입체감 있게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보이는 점이 특이하다. 조선 후기에 크게 수리하였으나 부분적으로 조선 중기의 건축기법을 간직하고 있다.
신륵사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 보물1791호. 주존인 불상을 좌상으로 하고 협시상을 입상으로 한 구성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전통이다. 불상과 보살상들은 모두 상호와 상체가 긴 편인데, 특히 불상의 육계는 유난히 길게 조성되어 이색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 불상의 큼직큼직한 나발과 단순하게 처리한 법의 자락은 조선초기부터 내려오던 특징이다. 불상의 눈언저리에 보이는 다크서클 같이 처리한 음영 기법이나 아래 입술을 도톰하게 만들어 처지게 표현한 것 등은 조각승 인일(仁日)과 수천(守天)의 조형 미감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다. 보살상들은 조성발원문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조선시대 1610년에 조성되었는데, 1620년의 약수선원 보살입상(현 동국대박물관 소장)과 전체적으로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들 보살상 중 좌협시보살상은 천의식으로, 우협시보살상은 대의식으로 법의를 착용했다. 좌협시보살상의 양쪽 어깨 위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의 표현법과 하반신 중앙에 타원형을 그리는 화려한 장엄, 우협시보살상의 보발이 귀 밑에서 정리되는 표현법 등은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물론 우협시보살상의 보발 장식은 경기도 광주 수도사 보살상과 서울 보문사 관음보살상과 유사하다.
문화재청에 게제되어 있는 신륵사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 보물 1791호와 약간의 차이가 있어 보인다. 교체되었나?
신륵사 극락보전 삼장보살도(極樂寶殿 三藏菩薩圖) 유형문화재 278호. 천장보살(天藏菩薩),지지보살(持地菩薩),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해당 권속들의 모임이 통일감 있고 안정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개별묘사도 뛰어나지만 적색 녹색 두가지 색을 주로 사용하면서도 많은 인물들을 잘 드러나게 표현한 수준 높은 작품이다. 1735년(영조11)에 봉선사괘불도를 제작한 각총(覺聰)을 포함한 20여 명의 화승이 참여하여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한 불화다.
이 삼장보살도를 그린 각총은 1735년(영조11) 봉선사 괘불도의 제작을 주도하였으며, 오관은 1759년(영조35) 가평 현등사의 아마타회상도와 지장시왕도, 치악산 영원사의 비로자나불회도와 감로도를 그리는 등 18세기 중반 경기지역과 강원지역 일대에서 활약하였고, 인일이라는 새로운 조각승의 이름이 확인되어 향후 조선시대 불상 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작이 될 것이다.
신륵사 향나무 보호수, 수령600년, 높이5m. 둘레1.3m, 지정연도 1982년. 지정번호 여주-65
명부전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건물로,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 뒷벽 중앙에 지공을, 그 좌우에는 무학과 나옹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보이며, 낮은 기단 위에 앞면 1칸·옆면 2칸으로 세웠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다포 양식이라 한다. 앞면은 6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고, 옆면은 앞 1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조선 전기의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담한 건물이다.
신륵사 조사당. 보물180호.
신륵사 조사당의 삼화상진영. 유형문화재167호. 삼화상진영은 신륵사의 중요 인물인 나옹화상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작품으로 현재 전국 사찰에 전하는 1,000여점의 진영 가운데 데 삼화상 진영은 매우 드물어 자료적인 측면에서는 희귀하나, 조사들의 성품을 부각시키는 전신성이 약하고 제작연대도 불분명하다.
신륵사 조사당의 건륭 38년명 동종. 유형문화재277호. 1773년(영조49)에 만든 종으로 높이93.6cm 폭66.2vm이다. 용뉴는 쌍룡이며 조선후기 범종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르면서도 범자를 연곽과 보살상 사이에 배치하거나 하대의 연화덩굴무늬를 중간에 배치하는 등 독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 문화재자료 134호. 명부전과 조사당 사이 서쪽언덕에 있으나 명문이 새겨져 있지 않아 누구의 사리탑인지 알 수 없다. 둥근 공 모양을 한 탑신 위에 옥개석이 올려져 있어 원구형 승탑이라 부른다. 기단부에는 사각의 지대석 위에 중대석과 상대석이 올려져 있다. 상대석에는 연꽃이 중대석에는 연주문형 기둥이 새겨져 있다. 옥개석은 기왓골이 선명하고 용머리 4개사 사방으로 나타난다. 상륜부는 가로로 구슬을 꿰멘듯 연결시켜 만든 무늬 위에 2단의 보륜과 1개의 1ㅗ주가 올려져 있다.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아름다운 문양이 비교적 세밀하게 새겨져 있어 중요자료로 평가된다.
신륵사 팔각원당형 승탑. 유형문화재 195호. 팔각형 탑신 위에 옥개석이 있어 팔각원당형이라 부른다. 신륵사 조사당 뒤쪽 언덕에 있던 것을 1966년 현위치로 옮겼다. 탑신부 안쪽에서 사리함이 나왔지만 명문이 없어 주인은 알 수 없고 문비형과 범자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기단부에는 하대석에는 연꽃무늬, 중대석은 둥근 모양, 상대석엔 위로 향한연꽃무늬 차례로 올렸다. 탑신 위 옥개석 용머리 끝에는 8개의 귀꽃을, 상륜부에에는 복발 보륜 보주를 새겼다. 여말선초의 형식으로 추정되며 승탑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신륵사 보제존자(普濟尊者塔, 1320∼1376) 나옹의 석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보물 228호.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워 두었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문경 대승사 묘적암 나옹화상 영정-문화재청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 보물 231호. 신륵사 서북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飛天像)과 이무기를 조각했다.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 고려 우왕 5년(1379)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 보물 229호. 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절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워두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신륵사 삼성각
신륵사 강월헌(江月軒)은 보제존자 나옹의 호를 딴 정자이며 삼층석탑은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에 언급되어 있는데, 기록으로 볼 때 나옹스님을 장례 한 장소가 전탑과 삼층석탑이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수습된 사리로 부도를 조성하고,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통적인 가람 배치법에 의해 건립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기념탑이면서 여강의 지세를 바로잡기 위한 비보탑의 성격을 갖는 고려 후기 석탑이다.
신륵사 다층전탑. 보물 226호.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경기도와 안동지역에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층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옥개석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 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 전탑과 달리 옥개석에 비하여 상층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신륵사 대장각기비(神勒寺 大藏閣記碑) .보물230호.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기록을 우왕 9년(1383)에 세웠다.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거북 모양의 비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는 예다.
여주팔영(驪州八詠) 중 여강(驪江) / 사숙재(私淑齋) 최숙정(崔淑精,1433~1480)
강에 오던 비 잠깐 맑게 갰는데 / 江雨乍晴霽
강물은 갑자기 불어났구나 / 江水忽已滿
바람 부니 주름무늬 길게 퍼지고 / 風回縠紋長
해 뜨니 고기비늘 흩어지누나 / 日出魚鱗散
세상의 때는 아직 못 씻었으나 / 世累雖未湔
때 묻은 갓끈이나마 씻을 수 있네 / 塵纓聊可澣
하얀 갈매기는 본래 일 없어 / 白鷗本無事
무리 지어 맑고 따스한 하늘 노니네 / 群飛戱淸暖
어찌하면 얽매임을 벗어 버리고 / 何當謝拘束
호호탕탕 너희들과 벗이 될거나 / 浩蕩爲爾伴
- 손성필 역. 2019. 한국고전번역원. 원전: 동국여지지
신륵사 주차장 주변 여주자기매점
여주 신접리 지석묘. 향토유적 14호. 지석묘는 큰돌을 몇 개 둘러 세우고 그 위에 넓적한 돌을 덮어 놓는 선사시대의 무덤이다. 이 지석묘의 고임돌(굄돌)은 동서에 있으며 덮개돌은 화강암으로 가로195cm, 세로185cm, 두께35cm이며 신접리에 있었으나 천송동297-20으로 옮긴 북방식(탁자식) 고인돌이다.
원호(元豪·1533~1592)장군 임진전승비, 징비록1권에 여주 구미포(龜尾浦)에서 왜적을 섬멸시켰으며 충주 여주 지평 양근의 백성들이 왜구의 칼날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춘천의 왜적을 치러 갔다가 복병에 의해 피살당해 강원도에서는 왜적을 막아낼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서왕가(懶翁和尙西往歌) / 나옹화상
나도 한때는 속세사람의 자식이었으니
사람이 오래 살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니 모든 것이 허망하도다
부모가 주신 얼굴은 죽은 후에는 아무 소용없이 어찌할 방법이 없다
잠시동안 생각하여 속세의 일들을 모두 다 내동댕이치고
부모님께 하직하고 표주박 하나만을 차고 반벌 누더기옷에
명아부 지팡이차림으로 명산을 찾아 들어가서
불경을 아는 훌륭한 스님을 직접 만나뵈어 마음을 밝히리라
부처님의 교법과 교리를 하나하나 묻고 찾아서 내 것으로 만들리라
여섯가지의 도적을 잡으리라 허공마를 빗겨타고
마야검을 손에 들고 오온산에 들어가니
제산은 첩첩하고 사상산이 더욱 높다
육근 문언저리에 자취없는 도적은
나며 들며 하는둥에 번뇌신을 없애 버리고
지혜로 배를 만들어 삼계바다를 건너리라
염불중생을 배에 실어두고 삼승은 돛대에 달고
일승은 돛을 달고 춘풍은 순히 불고
백운은 뒤섞이는데 인간을 생각하니
슬프고 서럽다 염불하지 않는 중생들아!
몇 생을 살려고 속세의 일들만 탐내고 집착하여
애욕에 잠겼느냐? 하루도 열두시간이요
한달도 서른 날인데 어느 날에 한가할 것인가?
청정하고 자비로운 부처님의 성품은 사람마다 가졌은들
어느 날에 생각하며 항사공덕은
본래 구족한들 어느 때에 내어 쓸까?
극락세계는 멀어지고 지옥은 가깝구나
이보시오 어르신네! 권하노니 종제선근을 심으시오
금생에서 한 공덕은 후생에서 과보를 받으니
백변을 재물을 탐하는 것은 티끌이요
삼일을 한 염불은 백천만겁에 부족함이 없는 보배로다
아아! 이 보배는 천겁을 지나도 낡지않고
만세를 지나도 언제나 지금이다
맑은 하늘이 넓다고 한들 이 마음에 미치지 못하고
해와 달이 밝다고 한들 이 마음에 미칠 수 있겠는가
삼세의 부처들은 이 마음을 알으시고
육도의 중생들은 이 마음을 저버리시네
삼계윤회를 어느 날에 그칠까?
잠깐동안을 생각하고 마음을 깨쳐먹고
태허를 생각하니 산은 첩첩이고 물을 졸졸 흐르고
바람은 쓸쓸하게 불고 꽃은 밝고 소나무와 대나무는 떨어지는
화장바다를 건너 저어 극락세계들어가니
칠보금지에 칠보망을 들렀으니 구경하기 더욱 좋네
구품연대에 염불소리 자자하고
푸른 학과 흰 학과 앵무새와 공작새
금빛 봉황새와 부른빛봉황새가 하는 것은 염불이다
맑은 바람이 부러오니 염불소리 아련히 들여오네
아아! 슬프다 우리도 인간에 나왔다가
염불발고 어이할까? 나무아미타불
청산가(靑山歌) / 나옹선사(懶翁禪師)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문화 culture > 불교문화 Buddhist cul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악산 금산사(金山寺) (0) 2022.11.08 능가산 내소사(楞伽山 來蘇寺) (2) 2022.11.07 여주 고달사지(驪州 高達寺址) (2) 2022.11.03 식장산 개심사(開心寺) (0) 2022.10.28 식장산 식장사(食藏寺) (0) 2022.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