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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과 대전 도산서원(道山書院)
    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19. 11. 18. 14:13

    도산서원(陶山書院) 전경,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1561년(명종 16)에 우선 도산서당이 완성되었고 퇴계가 죽은 지 6년 후(1576)에 퇴계의 위패를 모시고 도산서원이 지어진다.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시작하여 1576년에 완공되었다. 위패를 상덕사(보물 제211호)에 모셨다. 사적 제 170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위치한다. 한국의 서원 https://ktk84378837.tistory.com/8712

    그런데 도산서당을 지어준 이는 사찰, 정확히는 두 승려의 공이다. 스스로 평면도를 그린 퇴계는 안동 용수사의 법연(法蓮) 스님에게 서당 건립을 부탁한다. 그런데 건물이 완성되기 전에 법연 스님이 입적을 하자 그의 제자인 정일(淨一 ) 스님이 마무리한다. 두 스님은 공사를 총괄한 대목이었을 것이다1972년 봉정사 극락전 해체 보수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에는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지정23(공민왕 12, 1363) 예안의 용수사 축담 스님이 중수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밖에 퇴계와 용수사와의 인연도 작용했을 것이다. 1500년경 서울에 있던 퇴계는 고향에 있던 아들에게 이번에는 용수사에서 있는 기제사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편지를 보낸다용수사는 퇴계 집안의 기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젊은 시절 용수사는 퇴계의 공부방이기도 했다. 이런 인연이 서당(서원) 건립에 절이 앞장섰던 이유다. -[성보유전] 5. 사찰과 서원 / 이상근 

     

    전서체의 추로지향비(鄒魯之鄕碑) 맹자는 추인(鄒人)이고, 공자는 노인(魯人)이다. 즉 홍유석학(鴻儒碩學)이 살고 있던, 성인이 배출되는 고장이라는 뜻이다. 1980년 공자의 77대 종손인 대만 국적의 공덕성(孔德成)이 도산서원 원장으로 추대되어 남긴 비석이다.

     

    도산서원의 서쪽 절벽인 운영대(雲影臺)는 주희의 '관서유감(觀書有感)'에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 하늘빛 구름 그림자가 같이 어울려 돌고)'에서 유래한다. 동쪽 절벽 천연대(天淵臺)는 '시경(詩經)'에 '연비려천 어약우연(鳶飛戾天 魚躍于淵, 하늘에는 새가 날고 물에는 물고기가 뛰어 논다)'에서 유래한다.

     

    도산서원 시사단(試士壇). 정조 때 퇴계의 학문과 위업을 기리기 위해 이곳 송림(松林)에서 도산별과를 시행(1792년 정조 16년)하였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1796년에 세웠다. 당시 송림은 안동댐 공사로 수몰되어 사라졌다.

     

    도산서원 농운정사(瀧雲精舍).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하였는데 마루에서 안동호가 내다보이는 풍취를 자랑한다. 정사는 시습재와 지숙료, 관란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공부를 뜻하는 공(工)자 형 배치로 구성되어 있다. 보물 2106호.

     

    도산서당. 군더더기를 허용하지 않는 가장 알맞은 집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이 10년을 머물면서 큰 학문을 이루어내고 쟁쟁한 제자들을 길러낸 집이다. 제자 한 사람이 그 모습을 「도산서당영건기사」라는 글에 적기를 “당은 3칸이며, 마루는 암서(巖栖), 방은 완락(玩樂)이라 하고 합해서 편액하기를 도산서당이라 하였다. (중략) 삼면에 퇴주를 세우고 동면은 익첨을 덮었는데 매우 수려 하였다. (방에는) 고서 천여 권을 좌우로 서가에 나누어 꽂았으며, 화분 하나, 책상 하나, 벼루 하나, 지팡이 하나, 침구, 돗자리, 향로, 혼천의를 두었다. 남쪽 벽 위에는 가로로 시렁을 걸어 옷상자와 서류를 넣는 상자를 두었고 이밖의 다른 물건은 없었다”라고 했다. 이황은 나이 50에 접어들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공부에 전념하기로 작정하고 거처할 집을 마련하기 위해 애썼다.- 문화재청

     

    완락재(玩樂齋, 도산서당의 방)  퇴계이황

    主敬還須集義功(주경환수집의공) 공경을 주로 함은 의리를 길러 모으는 공력이 있네.

    非忘非助漸融通(비망비조점융통) 돌보지 않고 돕지 않아도 점점 화하여 알리라

    恰臻太極濂溪妙(습진태극렴계묘) 주렴계의 태극의 묘리를 깨우쳐 이루게 되니

    始信千年此樂同(시신천년차락동) 천년 이어내린 즐거움이 이와 같았음을 알겠노라.

     

    암서헌(巖栖軒, 도산서당의 마루) / 퇴계이황

    曾氏稱顔實若虛(증씨칭안실약허) 증씨는 안연더러 실하면서 허한 듯이

    屛山引發晦翁初(병산인발회옹초) 병산(유자휘)은 회옹에게 가르치던 처음이라

    慕年窺得巖棲義(모년규득암서의) 바위에 깃드는 뜻 늦게서야 엿봤으니

    博約淵氷恐自疎(박약연빙공자소) 박약공부 연빙자세 성기었음 두려웁소

     

    도산서원 동광명실(東光明室). 1819년(순조 19) 세운 장서고(藏書庫)이다.

     

    도산서원(陶山書院) 전교당(典敎堂). 보물210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액은 한석봉의 글씨이며 사액이다.  1570 퇴계 사후 도산서당은 도산서원으로 바뀐다. 흥미로운 부분은 퇴계를 모신 서원이 조선 시대에 31개나 됐으니 중심은 당연히 도산서원이 돼야겠지만 시기상으로 첫 번째 서원은 도산서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금 의외지만 영천의 이산서원이 퇴계를 모신 첫 번째 서원이다. 그 배경에는 이산서원 운영에 퇴계가 깊숙이 간여하며 이산서원 원규를 정하기도 했고 한편으로 이산서원이 제향할 인물을 정하지 못해 따로 향사하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산서원은 1573년에 사액을 받음으로써 퇴계를 모신 첫 번째 서원이 됐다. 보물 2105호.

    도산서원의 강당인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는 1574년작이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이 되었으며 영남 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전교당을 중심으로 동재인 박약재(博約齋)와 서재인 홍의재(弘毅齋)를 둘러보았다. 1615년(광해군 7)에 사림이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퇴계는 중종 명종 선조의 존경을 받았고, 일본의 유학 부흥에도 일조하였다.

     

    늦가을비가 어깨를 적시니 처연한 마음이 밀려온다. 단양군수 부임하면서 만났던 관기(官妓) 두향(杜香)이란 기생을 사랑하였다. 퇴계가 48세, 두향이 18세였다. 9개월 만에 풍기군수로 전보발령하면서 이별을 하게되자 두향을 이별을 읊으며 도수매(倒垂梅=능수매,수양매)를 선물하였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제
    어느 듯 술 다 하고 님마저 가는 구나
    꽃 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두향이 선물한 매화를 끌어안고 퇴계 또한 그리움의 답시를 한 편 보냈다

     

    黃卷中間對聖賢(황군중간대성현)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속식)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막향요금탄절현)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을 말라

    두 사람은 1570년 퇴계 선생이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두향이 선물한 매화를 가리키며 세상을 하직하였다.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두향은 퇴계의 하직소식을 듣고 풍기를 다년간 후 남한강에 몸을 던졌다. 퇴계 종가(宗家)에서는 두향이 묘(墓)에 벌초하고 그녀의 넋을 기린다. 어느 봄날 두향매를 보러 와야겠다.  ktk84378837.tistory.com/8342

     

     

    대전 도산서원

    대전의 도산서원(道山書院)은 탄방동에 위치한다. 도산서원을 찾은 것은 눈이 소복한 2012년 한겨울이다. 마을 뒷산이 도산이란 이름으로부터 유래한다. 강당으로 사용한 명교당(明敎堂), 유생들의 숙소인 지선재(止善齋), 시습재(詩習齋)와 권득기, 권시 두 분을 모시는 함덕사(涵德祠)가 있다. 권득기(權得己)는 조선중기 예조좌랑을 역임한 문인이다. 광해군의 영창대군 살해후 야인생활을 하였다. 탄옹(炭翁) 권시(權諰)는 권득기의 아들로 한성부부윤을 역임하였다, 이첨의 사위로 총명하여 안자(顔子)에 비견되는 평을 받았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1868)으로 헐렸다가 1968년, 1973년 중건되었다.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3호.

    한국의 서원 https://ktk84378837.tistory.com/8712 갈산서원 ktk84378837.tistory.com/7990 노강서원 ktk84378837.tistory.com/8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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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 퇴계 이황(李滉, 1501~1570)

     

    1

    이런들 엇더하며 뎌런들 엇다하료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러타 엇더하료

    하물며 천석고황(泉石膏肓)을 고텨 므슴하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랴

    시골에 묻혀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이렇게 산다고 해서 어떠하랴

    더구나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고질병처럼 된 버릇을 고쳐 무엇하랴)

     

     

    2

    연하(煙霞)로 지블 삼고 풍월(風月)로 버들 사마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병()으로 늘거가뇌

    이 듕에 바라는 이른 허므리나 업고쟈

     

    (안개와 놀의 멋진 자연 풍치로 집삼고 밝은 달과 맑은 바람으로 친구삼아

    태평스런 세상에 자연과 더불어 늙어 가네

    이렇게 살아가는 중에 오직 바라는 바는 잘못이나 저지른 일이나 없었으면)

     

     

    3

    순풍(淳風)이 죽다하니 진실로 거즈마리

    인성(人性)이 어지다 하니 진실로 올흔 말이

    천하(天下)애 허다 영재(許多英才)를 소겨 말슴할가

     

    (예부터 순박한 풍속이 이미 사라졌다 하니 이것은 참으로 거짓말이다

    인성이 본디부터 어질다고 하니 이는 참으로 옳은 말이다

    천하의 많은 슬기로운 사람에게 이렇게 확실한것을 어찌 속여 말할 수 있으리)

     

     

    4

    유란(幽蘭)이 재곡(在谷)하니 자연(自然)이 듯디 됴해

    백운(白雲)이 재산(在山)하니 자연이 보디 됴해

    이 듕에 피미일인(彼美一人)을 더옥 닛디 몯하얘

     

    (그윽한 난초가 골짜기에 피어 있으니 듣기 좋아

    흰구름이 산마루에 걸려 있으니 자연의 경치가 보기 좋구나

    이 중에 우리 임금님을 더욱 잊을 수가 없구나)

     

     

    5

    산전(山前)에 유대(有臺)하고 대하(臺下)애 유수(有水)로다

    떼 만한 갈며기는 오명가명 하거든

    엇더다 교교백구(皎皎白鷗)는 머리 마음 하난고

     

    (산 앞에 높은 대가 있고, 대 아래에 물이 흐르는구나

    떼를 지어 나는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는데

    어찌하여 백구(어진 사람)는 나로부터 멀리 마음을 두는고)

     

     

    6

    춘풍(春風)에 화만산(花滿山)하고 추야(秋夜)에 월만대(月滿臺)

    사시가흥(四時佳興)이 사람과 한가지라

    하믈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야 어내 그지 이시리

     

    (봄바람 부니 꽃은 산에 가득 피어 있고 가을밤 달빛이 누대에 가득하구나

    사계절의 아름다운 흥취가 사람과 마찬가지로다

    더구나 물고기 뛰놀고 솔개 하늘날고 구름 그늘짓고 태양 빛나는 자연의 모습 어찌 다함이 있으랴)

     

     

    7

    천운대(天雲臺) 도라드러 완락재(玩樂齋) 소쇄(瀟灑)한듸

    만권생애(萬卷生涯)로 낙사(樂事) 무궁(無窮)하얘라

    이 듕에 왕래 풍류(往來風流)를 닐러 므슴할고

     

    (천운대를 돌아서 들어가니 완락재가 맑고 깨끗하게 서 있는데

    거기에서 많은 책에 묻혀 사는 즐거움이 무궁무진하구나

    이렇게 지내면서 때때로 바깥을 거니는 재미를 새삼 말해서 무엇하리)

     

     

    8

    뇌정(雷霆)이 파산(破山)하여도 농자(聾者)는 못 듯나니

    백일(白日)이 중천(中天)하야도 고자()는 못 보나니

    우리는 이목(耳目)총명(聰明) 남자로 농고(聾瞽)갇디 마로리

     

    (우레가 산을 깨뜨릴듯 삼하더라도 귀머거리는 듣지를 못하며

    해가 떠서 대낮같이 되어 있어도 소경은 보지를 못하는 것이니

    우리는 귀와 눈이 밝은 사람되어 귀머거리나 소경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

     

     

    9

    고인(古人)도 날 몯 보고 나도 고인 몯 뵈

    고인(古人)을 몯 뵈도 녀던 길 알페 잇네

    녀던 길 알페 잇거든 아니 녀고 엇뎔고

     

    (옛 성현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도 또한 옛 성현을 뵙지 못했네

    옛 성현을 뵙지 못해도 그 분들이 가던 길이 앞에 놓여 있네

    가던 길(진리의 길)이 앞에 있는데 나 또한 아니가고 어떻게 하겠는가)

     

     

    10

    당시(當時)에 녀던 길흘 몃해를 바려 두고

    어듸 가 다니다가 이제야 도라온고

    이제나 도라오나니 년듸 마음 마로리

     

    (그 당시에 학문에 뜻을 두고 실천하던 길을 몇 해나 버려두고

    어디(벼슬길)에 가서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왔는가

    이제라도 돌아왔으니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으리라)

     

     

    11

    청산(靑山)은 엇뎨하야 만고(萬古)애 프르르며

    유수(流水)는 엇뎨하야 주야(晝夜)애 긋디 아니난고

    우리도 그치디 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호리라

     

    (푸른 산은 어찌하여 항시 푸르며

    흐르는 물은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는가

    우리도 저 물 같이 그치는 일 없이 저 산 같이 언제나 푸르게 살리라)

     

     

    12

    우부(愚夫)도 알며 하거니 긔 아니 쉬운가

    성인(聖人)도 몯다 하시니 긔 아니 어려온가

    쉽거나 어렵거나 듕()에 늙는 주를 몰래라

     

    (어리석은 사람도 알며 실천하는데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성인도 다 행하지 못하니, 그것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쉽거나 어렵거나 학문 수양의 생활 속에서 늙는 줄을 모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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