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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불국사(佛國寺)
    문화 culture/불교문화 Buddhist culture 2019. 11. 13. 22:12

     

    경주 배동 선방사지(禪房寺址)에 석조여래삼존입상(慶州 拜洞 石造如來三尊立像)이 기우는 햇살에 더욱 쓸쓸하다.  국보급문화재가 흔한 동네라서 그럴까 보물 제63호라지만 주변을 보면 달랑 표지석 하나뿐인 홀대접 느낌이다. 상높이는 본존상 278㎝, 좌협시보살상 235㎝, 우협시보살상 292.5㎝. 흔히 배리삼존불로 부르며 삼체석불(三體石佛)이라고도 한다.

    중앙의 본존불은 머리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표면이 매끄럽게 표현되었다. 어린아이 표정의 네모난 얼굴은 풍만하며,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을 통하여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佛性)을 표현하고 있다. 목이 표현되지 않은 원통형의 체구에 손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는데,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올리고 있다. 묵직해 보이는 옷은 불상을 전체적으로 강직해 보이게 하지만, 어린아이같은 표정과 체구 등으로 오히려 따뜻한 생명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왼쪽의 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가는 허리를 뒤틀고 있어 입체감이 나타난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 보병(寶甁)을 잡고 있는데, 보관에 새겨진 작은 부처와 더불어 이 보살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오른쪽의 보살 역시 잔잔한 내면의 미소를 묘사하고 있는데, 무겁게 처리된 신체는 굵은 목걸이와 구슬장식으로 발목까지 치장하였다.

    조각솜씨가 뛰어난 다정한 얼굴과 몸 등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가 풍기고 있는 작품으로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 문화재청

     

     

    사적 제18호인 안압지도 임해루도 첨성대도 10년전 그대로다. 안압지와 임해루는 동궁(東宮)과 월지(月池)로 이름이 바뀌었다. 동궁은 세자가 거주한 왕궁의 일부이고 월지는 달빛이 비쳐보이는 연못이란 뜻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문무왕 14년(674년)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에 이르러 폐허가 되면서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안압지(雁鴨池) 로 불려 왔던 곳이다. 별궁이라고는 931년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초청하여 주연(酒宴)을 베풀고 위급한 정세를 호소하기도 정세의 소용돌이 중심이고 했던 곳이다. 

     

    그러는 사이에 월정교(月精橋)가 살아 돌아왔다. 본래 경주 교동의 월정교는 경덕왕19년(760년)에 형산강 지류인 월성과 남산을 연결하는 목조 교량이었는데 조선시대에 유실되었다고 한다. 2018년에 화려한 모습으로 복원되었는데 길이가 66m 폭이 13m, 높이가 6m이다. 복원직후이니  새것 냄새는 새것대로 멋과 맛이 있겠지만 고도(古都)에 어울리는 냄새가 나고 먼지가 이끼가 돋고 그러러면 우리 후손들의 몫이 되겠지. 아직도 복원이 창창한 황룡사, 신라왕궁, 쪽샘지구, 신라방 등도 복원 정비공사 중이다.

    경북일보에 이런 기사가 있다. "월정교는 경덕왕 19(760)에 일정교와 함께 준공됐다. 삼국사기에 기록이 나온다. 길이 63m, 너비 13m, 높이 6m 규모다. 현재의 월정교는 1984년에 발굴조사에 들어가 2018년에 준공했으니 조사와 복원까지 34년 걸렸다. 삼국유사에는 월정교에 관한 기록이 없다. 세상 사람들이 월정교를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을 맺어준 오작교라고 떠들어 대지만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나기 위해 다리를 건너간 시기는 월정교가 건축되기 약 100년 전 일이고 무엇보다도 그 다리는 월정교에서 19m 하류에 있는 문천교였다. 월정교는 충담사가 경덕왕을 만나기 위해 건너갔던 다리로 추정된다. 왕이 궁궐의 서쪽 출입문인 귀정문에 있었고 3월 삼짇날에 남산 삼화령에서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했던 충담사가 왕을 만나려면 귀정문으로 연결된 월정교를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경북일보  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39070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된 다리는 문천교다. <삼국유사> 4권 의해(意解) 5 ‘원효불기(元曉不羈)’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스님이 어느 날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리겠는가. 나는 하늘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오.”

    사람은 아무도 이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노래를 들은 태종(무열왕)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이때 요석궁(瑤石宮)에 과부가 된 요석공주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해 원효를 찾아 데려가라고 했다. 궁리가 원효를 찾으니,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만났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원효를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 쉬게 했다. 공주는 태기가 있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다.

    문천교는 유교(楡橋)’로도 불린다. 현재 복원된 월정교에서 19m 아래쪽에 다리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안내판이 없어 유구(遺構)를 확인할 수 없다금강신문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636

    코모도호텔에서 맞는 아침햇살에 저 멀리 황룡사9층 모형탑이 눈부시다. 이 9층탑은 동국제강에서 황룡사9층목탑을 현대식으로 지어놓은 황룡원으로 연수원같은 호텔의 일종이다. 황룡사9층목탑은 고려시대 몽골 침입시 소실되었는데 경주 남산 부처바위에 왼편 9층탑 암각화로 전해지고 있다(암각화 사진은 안의사랑님 카페에서 인용하였음). 왼쪽은 더-K호텔, 오른쪽은 경주화백컨벤션센타 건물이다.

     

    黃龍寺 雨花門 / 민사평(閔思平·1295~1359)

     

    연인을 보려는 생각이 있다면 情人相見意如存(정인상견의여존)

    황룡사 문 앞으로 와야 한다네 須到黃龍佛寺門(수도황룡불사문)

    빙설 같은 얼굴은 비록 보지 못하더라도 氷雪容顔雖未(빙설용안수미도)

    그래도 목소리는 어렴풋이 들을 수 있을 테니 聲音仿佛尙能聞(성음방불상등문)

    두 번 세 번 정중하게 거미에게 부탁하노니 再三珍重請蜘蛛(재삼진중청지주)

    앞길을 가로질러 거미줄을 둘러 쳐 주오 須越前街結網圍(수월전가결망위)

    꽃 위의 나비가 자만하여 날 버리고 날아가거든 得意背飛花上蝶(득의배비화상접)

    거미줄에 붙여 놓고 제 잘못을 뉘우치게 願令粘住省(원령점주성건위)

    -소악부(小樂府) 민사평 편찬

    -:볼 도, 蜘蛛: 거미 지, 거미 주, : 허물 건.

     

    한국수력원자력(주)

     

    국보112호인 감은사지 3층서석탑

     

    감포항에서 물회로 점심하고 해풍에 꼬리가 꼬챙이에 꿰어져 거꾸로 매달려 말려지는 생선이 이채롭다  

     

    천연기념물 제536호인 읍천 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 보고 나오면서 뵙는 90세 미역할머니의 건강한 미소

     

    한국원자력환경공단(주)의 특히한 건물구조에 신기해 하면서 불국사로 향한다.

     

    수미산(須彌山)의 중턱에서 불국사 천왕문과 사천왕상. 제석천()을 섬기면서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서쪽에 눈을 크게 부릅뜨고 보탑을 거머쥔 광목천왕(), 화가 난 얼굴로 용을 잡고 여의주를 든 남쪽의 증장천왕(), 북쪽의 다문천왕()은 비파를 들고 부처의 도량을 지킨다. 동쪽의 지국천왕()은 푸른 얼굴에 긴칼을 들고 권선징악을 행하며 서원을 세우고 음악의 신 건달바를 거느리고 있다,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 (慶州 佛國寺 靑雲橋 및 白雲橋), 국보 제23호.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4계단으로 되어 있는 위로는 16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로는 18단의 백운교가 있다.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문화재청

     

    국보 20호인 다보탑. 다보탑과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29m, 10.75m로 비슷하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현재 1마리의 돌사자가 남아있다. - 문화재청

    https://youtu.be/mlAYtfVA8Rg

     

    국보 21호인 삭가탑은 법화경을 설법하는 석가여래와 그것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다보여래와의 만남을 여전히 안고 있다.

    보수가 끝난 석가탑은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1966년 9월에는 안타깝게도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으며, 그해 12월 탑을 수리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16세기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3년 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 문화재청

    https://youtu.be/YbTQEzBTzGw

     

    보물 제1744호인 대웅전과 본존불, 협시보살로는 좌측에 미륵보살(彌勒菩薩)과 가섭(迦葉), 우측에 갈라보살(碣羅菩薩)이 아난(阿難)이 보좌하고 있다. 부처의 손모양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고 하는데 모든 악마를 굴복시켜 없애버리는 모습이라 한다.

    대웅전은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조선 세종 18년(1436)에 중수하였으며, 성종 21년(1490)과 명종 19년(1564)에 중수가 있었으나,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 그 후 효종 10년(1659)에 중창된 후 숙종 3년(1677) 번와 보수, 숙종 34년(1708) 서쪽 기둥 교체, 영조 5년과 영조 6년(1730), 영조 7년에 개와(蓋瓦)를 보수하였다. 조선 영조 41년(1765, 乙酉)에는 대웅전을 중창하고, 영조 41년(1767) 단청이 완료되었으며, 이후 대웅전의 삼존불과 후불탱(後佛幀)을 영조 45년(1769)에 완성하였다.

    그 후 퇴락된 것을 일제 강점기인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개수한바 있으며, 이어 1934년부터 1936년 사이에도 개수되었다. 그 뒤 또 다시 심하게 퇴락되어 가던 것을 1970년대에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지시로 중창되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동서가 약간 긴 장방형의 평면으로 단층 팔작 기와지붕이며, 조선 후기의 다포계 형식을 가지고 있다. 대웅전의 외관은 중앙의 어칸을 협칸(8.7尺)이나 퇴칸(8.2尺)보다 배이상 넓은 주칸(17.7尺)으로 꾸며졌다.

    공포는 다포로 어칸에 3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었고, 협칸과 퇴칸에는 1구의 공간포가 배치되어 있다. 살미첨차에는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를 조각하였고,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대웅전 정면의 어칸은 사분합꽃살문이고, 협칸과 퇴칸은 쌍분합교살문이며, 양측면의 문은 삼분합띠살문으로 꾸며졌으며, 후면의 어칸은 사분합정자살문이며, 협칸은 벽체로 막았고 퇴칸은 분합정자살문으로 20칸중 10칸은 문을 설치하여 개방 했다.

    기단은 면석에 우주(隅柱)와 탱주(撐柱)가 설치되어 있고, 상부에 갑석(甲石)을 덮은 통일신라시대의 가구식 기단(架構基壇)이다. 기단의 사면 중앙부에는 계단이 놓여 있고, 계단 양측의 소맷돌은 측면을 삼각형 문양으로 가공하였다.

    천정은 우물 천정인데 층단식으로 중앙이 높게 꾸며졌다. - 문화재청

     

    토함산 불국사 불이문(不二門). 사찰로 들어가는 3문 중 마지막 문이 불이문()이다.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으로 진리는 곧 하나임을 의미한다. 이 문을 본당 입구에 세운 것은 이곳을 통과해야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물이다. 다른 말로 해탈문(解脫門)이다.

    불국사 http://ktk84378837.tistory.com/1682 http://ktk84378837.tistory.com/5464 https://ktk84378837.tistory.com/8982

    구한말 불국사 cafe.daum.net/bong109/16O3/927?q=%EA%B5%AC%ED%95%9C%EB%A7%90%20%EB%B6%88%EA%B5%AD%EC%82%AC

     

     

    불국사기행  /   현진건

     

     

    '이 돌 층층대(청운교, 백운교)를 거치어 문루를 지나서니, 유명한 다보탑과 석가탑이 눈앞에 나타난다. 이 두 탑은 물론 돌로 된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만져 보아도 돌이요, 두들겨 보아도 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석가탑은 오히려 그만둘지라도 다보탑이 돌로 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하여도 눈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연한 나무가 아니요, 물씬물씬한 밀가루 반죽이 아니고, 육중하고 단단한 돌을 가지고 저다지도 곱고 어여쁘고 의젓하고 아름답고 빼어나고 공교롭게 잔손질을 할 수 있으랴. 만일, 그 탑을 만든 원료가 정말 돌이라면, 신라 사람은 돌을 돌같이 쓰지 않고 마치 콩고물이나 팥고물처럼 마음대로 뜻대로 손가락 끝에 휘젓고 주무르고 하는 신통력을 가졌던 것이다. 귀신조차 놀래고 울리는 재주란 것은 이런 솜씨를 두고 이름이리라...

    석가탑은 다보탑 서쪽에 있는데, 다보탑의 혼란한 잔손질과는 딴판으로, 수법이 매우 간결하나마 또한 정중한 자태를 잃지 않았다. 다보탑을 능라와 주옥으로 꾸밀 대로 꾸민 성장 미인(盛裝美人, 화려하게 치장한 미인)에 견준다면, 석가탑은 수수하게 차린 담장 미인(淡粧美人, 엷게 단장한 미인)이라 할까? 높이 27, 층은 역시 3층으로 한 층마다 수려한 돌병풍을 두르고, 병풍 네 귀에 병풍과 한데 어울러 놓은 기둥이 있는데, 설명자의 말을 들으면 이 탑은 한 층마다 돌 하나로 되었다 하니, 그 웅장하고 거창한 규모에 놀랄 만하다.

    석가탑은 오히려 그만둘지라도 다보탑이 돌로 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하여도 눈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연한 나무가 아니요, 물씬물씬한 밀가루 반죽이 아니고, 육중하고 단단한 돌을 가지고 저다지도 곱고 어여쁘고 의젓하고 아름답고 빼어나고 공교롭게 잔손질을 할 수 있으랴. 마일, 그 탑을 만든 원료가 정말 돌이라면, 신라 사람은 돌을 돌같이 쓰지 않고 마치 콩고물이나 팥고물처럼 마음대로 뜻대로 손가락 끝에 휘젓고 주무르고 하는 신통력을 가졌던 것이다. 귀신조차 놀래고 울리는 재주란 것은 이란 솜씨를 두고 이름이리라...' -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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