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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묘(宗廟)엘 가보자
    문화 culture/역사 전통 history tradition 2024. 3. 2. 17:58

    홍화문(弘化門). 창경궁의 정문으로 1483년(성종 14년) 창경궁을 지을때 조화를 넓힌다는 뜻이다. 이름은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었는데, 《서경》 〈주서(周書)〉의 貳公弘化, 寅亮天地, 弼予一人, 즉 공의 다음이 되어 조화를 넓혀[弘化] 천지를 공경하여 밝혀서 나 한사람을 보필한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년)에 다시 짓고 이후 중수되었다. 보물384호.

    다포식 팔작지붕 형태의 명정문(明政門) 은 창경궁 외전(外殿)의 중문(中門)이며 행각은 문의 좌우로 연결되는 회랑이다. 행각의 앞면 중앙에 있는 명정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 건물이다. 행각은 모두 복랑(複廊)으로 2칸이며 기둥 위에는 새 날개 형태의 장식(裝飾)인 익공(翼工)을 하나 설치한 초익공식(初翼工式)이다. 1484년(성종 15) 창경궁을 세울 때에 지은 것이지만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버려, 1616년(광해군 8) 재건되었다. 회랑 중 남쪽과 북쪽 일부분은 일제시대 때 철거되었다가 1986년 복원되었다. 보물385호.

    금천(禁川)=옥류천(玉流川). 하천의 이름은 인조가 후원 안의 바위에 옥류천(玉流川)이라는 글씨를 새긴 데에서 유래하였다. 옥천교(玉川橋) 이름은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전체적인 형태는 반원아치형태의 홍예(紅霓) 2개를 이어붙여 안정감이 느껴지며, 궁궐의 다리에 맞는 격식을 갖추고 있다. 공간에는 억센 표정을 하고 있는 도깨비얼굴을 새겨놓았다. 보물386호.

    연리목(連理木), 18세기 초 회화나무와 20세기 초 느티나무의 사랑.

    영춘헌(迎春軒). 정조는 1800년(정조 24) 6월에 이곳에서 승하했다. 헌종은 이곳에서 국사를 돌보고 경서 강독을 했으며, 아플 때도 치료를 받았다. 고종도 영춘헌에서 경서를 읽고 정사를 보았으며 신하들을 만났다. 1830년(순조 30년)에 화재로 불탔고 순조 33년에 다시 지었다.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꾸면서 많은 전각들을 헐었으나 영춘헌은 무사하여 오늘에 이른다. 초등학교때 이 창경원을 수학여행으로 왔었다. 

    통명전(通明殿)은 왕의 침전 겸 연회용 건물이다. 명정전 서북쪽 궁궐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동쪽에 있는 왕비의 침전인 환경전과 함께 남향하고 있다. 창경궁 창건 때인 성종 15년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고, 광해군 8년에 다시 세운 건물은 다시 정조 14년에 불탔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 창경궁의 전각 대부분을 재건할 때 지은 것이다. 보물818호.

    보춘정(報春亭)은 남쪽에 걸린 현판이고, 희우루(喜雨樓)는 동쪽 현판이다. 보춘報春은 봄春이 옴을 알린다報이다. 봄은 동쪽을 상징하기에 동궁에 속한 건물의 이름으로 쓰인 것이다. 희우喜雨는 비(雨)가 내려 기쁘다(喜)다는 뜻인바. 홍재전서(弘齋全書) 희우루지(喜雨樓志)에 1777년(정조1년)에 가뭄이 들었는데 이 누각을 중건 및 완성후 임금행차 때 비가 내려 희우라 하였다. 나라 소식(蘇軾,1036~1101)희우정기(喜雨亭記)2)를 지은 이래 희우는 정자의 이름으로서 각지에서 애용되었다. 창덕궁 주합루 뒤에도 희우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다. 눈이 녹아내리고 살구꽃이 붉게 픤 날 다시 오리라.

    희정당(熙政堂)은 전통과 근대의 만남으로 요약된다. 건물 앞을 보면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이 보인다. 순종 임금의 어차(純宗御車)가 문 앞까지 들어오게 했던 보기 드문 구조다. 보물815호.

    희정당(熙政堂). 조선 영조가 희정당에 나가 친정한 것을 기념하여 그린 그림. 위키백과.

    잡상(雜像). 추녀마루 위에 놓은 10신상(神像) 인바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譚)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1) 대당사부(大唐師父)는 당(唐) 현장(玄奘) 삼장법사(三藏法師)이며,  2) 손행자(孫行者)는 손오공(孫悟空), 돌원숭이이며, 3) 저팔계(猪八戒) 즉 멧돼지이며. 4) 사화상(獅晝像=沙和尙)은 사오정이다. 5) 이귀박(二鬼朴)은 이귀(二鬼) 즉 이구(二求)로 득구(得求)와 명구(命求)를 뜻한다. 6) 이구룡(二口龍)으로 귀와 입이 두 개인  짐승이고. 7) 마화상(馬畵像)은 삼장법사가 타고다니던 백말(白馬)이다. 8) 삼살보살三殺菩薩은 재앙을 막아 주는 잡상이다. 9) 천산갑(穿山甲)은 머리 뒤통수에 뿔이 돋혀 있고 등이 울퉁불퉁 튀어 나온 짐승이다. 말레이천산갑은  201911, 중국후베이성우한시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코로나19(COVID-19)의 숙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들을 잡상(雜像) 혹은 어처구니라 했다. 경복궁의 경회루(慶會樓) 잡상이 11개로 가장 많으며 화재방지를 위한 벽사적(僻邪約) 주술적(呪術的) 의미로 해석된다. 이밖에 0) 나토두(羅土頭)는 작은 용(龍)의 얼굴형상 또는 검붉은 곰의 형상이다. 흥미로운 점은 유교의 나라 궁궐 건축물에 대당사부, 손행자, 사화상. 삼살보살은 불교를 상징하는 형상물이고, 나머지는 도교에서 나오는 잡신들이라는 점이다. 조선의 철학과 종교는 유불선(儒佛仙) 합일의 정신임을 엿볼 수 있다.

    인정전(仁政殿), 창덕궁의 정전이요 법전(法殿)이다. 법전은 왕의 즉위식, 결혼식, 세자책봉식, 문무백관의 하례식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 때의 중요한 건물이다. 광해군 때 중건되고 순조 3년(1803)에 소실되어 재건하고, 철종 8년(1857년)에 보수하였다..인정전 마당에서 조회를 하였기에 조정(朝廷)이라 한다. 삼도 좌우에 늘어선 품계석은 문무백관 정1품에서 시작하여 정9품 18품계를 새겨 위치를 나타냈다. 이는 정조 때 조정의 위계질서가 문란해졌다고 하여 세웠다. 그러나 정(正)4품부터는 종(從)을 함께 포함시켰으므로 각각 12개씩 있다. 3품 이상을 당상관(堂上官), 3품 이하를 당하관(堂下官)이라 한다. 문무관이 마주 보고 서서 임금님께 절을 할때 배(拜)-하는 구령에 맞춰 홀(笏)을 들고 국궁배례(鞠躬拜禮)하며 절을 한다. 이를 곡배(曲拜)라 한다. 인정전(仁政殿) 내부, 정면에는 임금님의 용상이,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曲屛)과 그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국토를 의미한다.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이 담겼다.

    숙장문(肅章門). 창덕궁의 중문(中門)으로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인정전을 나와 희정당과 낙선재 후원으로 드나드는 문이다. 숙장문은 성종 6년(1475) 좌찬성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어 올린 이름을 성종이 낙점하여 그 때부터 사용된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다가 1996년 시작된 복원공사를 통해 재건되었다.

     

    출판기념회 참석하고 점심식사하고 곧바로 종묘엘 왔더라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세운상가 맞은편 종묘(宗廟) 외대문(外大門)에 도착하니 눈은 거의 다 녹고 길은 질척거리고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적125호. 유네스코세계유산. 종묘사직 가운데 경복궁 동편의 종묘는 보았으나 경복궁 서편의 사직은 또 언제 기회가 올까. 사직은 땅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말한다. 종묘사직은 조선의 통치 이념이자 조선인의 정신 세계인 유교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공간인 것이다.

    종묘(宗廟) 중연지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고 정의한 것은 고대의 주비산경(周髀算經)에서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는 형태적 관점보다는 형이상학적 관점으로 풀이하였다. 전국시대 이후 증자(曾子)는 하늘과 땅이 지닌 양과 음의 도()라고 해석한 것과 상통한다. 17세기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에 의해 지구설(地球說)이 확산되자 굳건히 회전하는 하늘의 덕, 그 가운데에 고요히 정지한 땅의 덕으로 풀이하게 되었다.   

    전사청을 뒤로 하고 재궁의 긴 담장을 후다닥 지나니

    문화재청에 소개된 종묘(宗廟)의 겨울 이 장면만 생각하면 가슴이 설렜다. 배병우의 작품으로 알고 있다. 종묘는 태조4년(1395) 창건하였으나 임란시 소실되어 광해원년(1608)에 재건. 신실19칸이 있으나 초창기엔 7칸, 세종 연간에 공간이 부족하여 영년전을 증축하였다.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 독일의 미술사학자 요한 요하임 빈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1768)이 그리스조각을 찬양한 말이지만 국내지식인이 종묘를 비유할 때 드는 문장. 건축가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건축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 수상자인 프랭크 게리(Frank Owen Gehry, 1929- )는 "이렇게 엄숙하고 고요한 공간은 세상 어디에서고 찾아보기 힘들다. 굳이 꼽는다면 파르테논(Parthenon) 정도가 아닐까 한다." 일본의 건축가 시라이 세이이치(白井晟一, 1905-1983)도 "서양에 파르테논신전이 있다면 동양엔 종묘가 있다." 고 극찬하였다. 파르테논은 수직과 균형을, 종묘는 수평과 무한을 지향한다.  이런 찬사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펼쳐진 종묘 정전은 떠억! 하니 가림막에 가려져 2024년 9월까지 수리중이다. 국보227호.

    종묘(宗廟) 정전의 남신문(南神門)은 홍살문(紅箭門)이다. 조상신을 모신 공간이니만큼 벽사(辟邪)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왕실의 조상을 추모하는 국가의 제례로서 종묘제례가 있다. 악(樂), 가(歌), 무(舞)를 갖춘 종묘제례악을 연주한다. 이때 세종이 지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편곡한  여민락(與民樂), 치화평(致和平), 취풍형(醉豊亨)이란 궁중음악이 포함된다. 

    아쉬운 마음을 종묘 정전의 서쪽 영녕전(永寧殿)으로 달랜다. 발자욱이 보기 싫어 지우고나니 겉보기는 그럴싸하다. 종묘 영녕전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묘에 있는 조선전기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이안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종묘 영녕전은 1421년(세종 3) 정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태실이 부족하여 별묘를 건립하여 태조의 4대조를 함께 옮겨 모신 곳이다. 이후 정전에 계속 모시지 않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대에 재건하고 이후 현종과 헌종 대에 중수하였다. 영녕(永寧)"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에서 취했다. 별묘이므로 조묘라고도 부른다. 종묘에서는 종묘제례를 지내고 영녕전에서는 왕세자, 왕비, 왕세자빈이 와서 알묘(謁廟)를 지냈다. 17세기 중기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구조와 장식·색 등이 제사 공간에 맞게 간결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보물8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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