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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양 정병욱 가옥
    문화 culture/문학 literature 2023. 3. 18. 13:23

    광양 정병욱가옥, 등록문화재341호. 

    문화해설사

    올해가 탄생 100주년

    육필원고

    1962년의 가옥 모습. 1925년 망덕포구에 건립된 점포형 주택으로 양조장과 주택을 겸용한 보기 드문 구조의 건축물이다.  1941년에 시집을 발간하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고 ​대표작 19편을 수록한 시집을 육필로 3권을 필사해 연희전문 지도교수 이양하, 5살 후배이며 친구인 정병욱, 그리고 자신이 나누어 가졌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마루밑에 항아리를 묻고 그 속에 시집을 감추어 일제의 눈을 피했다. 1942년 일본유학을 따난 윤동주는 이듬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후쿠오카형무소에서 해방을 6개월 잎두고 숨을 거둔다. 그의 시는 드디어 1948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유고시집으로 간행되어 빛을 보게 된다.

    2017년의 가옥 모습(광양시)

    2019년의 가옥 모습(광양시)

    2021년에 정비한 2023년의 가옥 모습

    뜰안의 동백

    뜰안의 남새밭

    가옥 맞은편 망덕포구

     

     

    잊지 못할 윤동주 / 정병욱(1922~1982)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가 즐겨 거닐던 서강 일대에는 고층 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창냇벌을 꿰뚫고 흐르던 창내가 자취를 감추어 버릴 만큼, 오늘날 신촌은 그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달 밝은 밤이면 으레 나섰던 그의 산책길에 풀벌레 소리가 멈춘 지 오래고, 그가 사색의 보금자리로 삼았던 외인 묘지는 계절 감각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그가 묵고 있던 하숙집 아주머니는 어쩌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세월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마는 것이지만, 동주에 대한 나의 추억은 조금도 퇴색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내가 동주를 처음 만난 것은 1940년,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서였다. 오똑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일(一)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 마디로 미남이었다. 투명한 살결, 날씬한 몸매, 단정한 옷매무새, 이렇듯 그는 멋쟁이였다. 그렇지만 그는 꾸며서 이루어지는 멋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천성에서 우러나는 멋을 지니고 있었다. 모자를 비스듬히 쓰는 일도 없었고, 교복의 단추를 기울어지게 다는 일도 없었다. 양복바지의 무릎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일도 없었고, 신발은 언제나 깨끗했다. 이처럼 그는 깔끔하고 결백했다. 거기에다, 그는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휘갈겨도 요동하지 않는 태산처럼 믿음직하고 씩씩한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나보다 두 학년 위인 상급생이었고,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 위였다. 그는 나를 아우처럼 귀여워해 주었고, 나는 그를 형처럼 따랐다. 신입생인 나는 모든 생활의 대중을 그로 말미암아 잡아 갔고, 촌뜨기의 때도 그로 말미암아 벗을 수 있었다. 책방에 가서도 그에게 물어 보고 나서야 책을 샀고, 시골 동생들의 선물도 그가 골라 주는 것을 사서 보냈다. 오늘날, 나에게 문학을 이해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생의 참뜻을 아는 어떤 면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오로지 그가 심어 준 씨앗의 결실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그러기에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가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는 달이 밝으면 곧잘 내 방문을 두드려서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이끌어내어, 연희의 숲을 누비고, 서강의 뜰을 꿰뚫는 두어 시간의 산책을 즐기고 돌아오곤 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입을 여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이다. 가끔은 "정 형, 아까 읽던 책 재미있어요?" 하는 정도의 질문을 했는데, 그것에 대해 내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뚜렷이 생각나지 않지만, 그는 "그 책은 그저 그렇게 읽는 겁니다."라고 하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그 책은 대강 읽어서는 안 돼요. 무척 고심하면서 읽어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책입니다."라고 일러주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독서의 범위가 넓었다.

    문학, 역사, 철학, 이런 책들을 그는 그야말로 종이 뒤가 뚫어지도록 정독을 했다. 이럴 때, 입을 꾹 다문 그의 눈에서는 불덩이가 튀는 듯했다. 어떤 때에는 눈을 감고 한참 동안을 새김질을 하고 나서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공책에 메모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읽는 책에 좀처럼 줄을 치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만큼 그는 결벽성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자, 일본의 혹독한 식량정책이 더욱 악랄해졌다. 기숙사의 식탁은 날이 갈수록 조잡해졌다. 학생들이 맹렬히 항의를 해 보았으나, 일본 당국의 감시가 워낙 철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1941년, 동주가 4학년으로, 내가 2학년으로 진급하던 해 봄에,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기숙사를 떠나기로 했다. 마침, 나의 한 반 친구의 알선이 있어서, 조용하고 조촐한 하숙집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매우 즐겁고 유쾌한 하숙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숙집 사정으로 한 달 후에 그 집을 떠나야만 했다.

    그 해 5월 그믐께, 다른 하숙집을 알아보기 위해, 아쉬움이 가득 찬 마음으로 누상동 하숙집을 나섰다.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길에서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 있는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 찾아간 집은 문패에 '김송'이라고 적혀 있었다. 설마 하고 문을 두드려 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주인은 바로 소설가 김송, 그분이었다.

    우리는 김송 씨의 식구로 끼어들어 새로운 하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우리는 대청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고, 문학을 담론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성악가인 그의 부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의 생활은 알차고 보람이 있었다.

    동주의 시집 제 1부에 실린 많은 작품들이 그 해 5월과 6월 사이에 쓰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비록 쓸모는 없었지만, 마음을 주고받는 글벗이 곁에 있었고, 암울한 세태속에서도 환대해 주는 주인 내외분이 있었기에, 즐거운 가운데서 마음껏 시를 쓸 수 있었으리라.

    동주의 주변에도 내 주변에도, 별반 술꾼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술자리에 어울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가끔 영화관에 들렀다가 저녁때가 늦으면 중국집에서 외식을 했는데, 그 때 더러는 술을 청하는 일이 있었다. 주기가 올라도 그의 언동에는 그리 두드러진 변화가 없었다. 평소보다 약간 말이 많은 정도였다. 그러나 비록 취중이라도 화제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의 성격 중에서 본받을 점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본받아야 할 것의 하나는 결코 남을 헐뜯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술이 들어가면 사람들의 입에서는 으레 남에 대한 비판이나 공격이 오르내리게 마련이지만, 그가 남을 헐뜯는 말을 나는 들어 본 기억이 없다.

    1941년 9월, 우리의 알차고 즐거운 생활에 난데없는 횡액이 닥쳐왔다. 당시에 김송 씨가 요시찰 인물이었던 데다가 집에 묵고 있는 학생들이 연희 전문학교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감시하는 일제의 눈초리는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일본 고등계 형사가 무시로 찾아와 우리 방서가에 꽃혀 있는 책 이름을 적어 가기도 하고, 고리짝을 뒤져서 편지를 빼앗아 가기도 하면서 우리를 괴롭혔다. 우리는 다시 하숙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마침, 졸업반이었던 동주는 생활이 무척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진학에 대한 고민, 시국에 대한 불안, 가정에 대한 걱정, 이런 가운데 하숙집을 또 옮겨야 하는 일이 겹치면서 동주는 무척 괴로워하는 눈치였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중요한 작품들을 썼다.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서시' 등은 이 무렵에 쓴 시들이다.

    동주는 시를 함부로 써서 원고지 위에서 고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즉, 한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주일, 몇 달 동안을 마음속에서 고민하다가, 한번 종이 위에 옮기면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의 시집을 보면, 1941년 5월 31일 하루에 '또 태초의 아침', '십자가', '눈 감고 간다' 등 세 편을 썼고, 6월 2일에는 '바람이 불어'를 썼는데, 동주와 같은 과작의 시인이 하루에 세 편의 시를 쏟아 놓고, 이틀 뒤에 또 한 편을 썼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머릿속에서 완성된 시를 다만 원고지에 옮겨 적은 날이라고 생각할 때에야 비로소 수긍이 가는 일이다. 그는 이처럼 마음속에서 시를 다듬었기 때문에, 한 마디의 시어 때문에도 몇 달을 고민하기도 했다. 유명한 '또 다른 고향'에서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 작용하는 / 백골을 들여다보며 /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라는 구절에서 '풍화 작용'이란 말을 놓고, 그것이 시어답지 못하다고 매우 불만스러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두었지만, 끝내 만족해하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자기의 작품을 지나치게 고집하거나 집착하지도 않았다. '별 헤는 밤'에서 그는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로 첫 원고를 끝내고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그에게 넌지시 "어쩐지 끝이 좀 허한 느낌이 드네요". 하고 느낀 바를 말했었다. 그 후, 현재의 시집 제1부에 해당하는 부분의 원고를 정리하여 '서시(序詩)'까지 붙여 나에게 한 부를 주면서 "지난번 정 형이 '별 헤는 밤'의 끝 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 보았습니다." 하면서 마지막 넉 줄을 적어 넣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이처럼, 나의 하찮은 충고에도 귀를 기울여 수용할 줄 아는 태도란, 시인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임을 생각하면, 동주의 그 너그러운 마음에 다시금 머리가 숙여지고 존경하는 마음이 새삼스레 우러나게 된다.

    동주가 졸업 기념으로 엮은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의 자필 시고는 모두 3부였다. 그 하나는 자신이 가졌고, 한 부는 이양하(李陽河) 선생께, 그리고 나머지 한 부는 내게 주었다. 이 시집에 실린 19편의 작품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수록된 시가 '별 헤는 밤'으로 1941년 11월 5일로 적혀 있고, '서시'를 쓴 것이 11월 20일로 되어 있다. 이로 보아, 그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기를 계획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시고를 받아 보신 이양하 선생께서는 출판을 보류하도록 권하였다 한다. '십자가', '슬픈 족속', '또 다른 고향'과 같은 작품들이 일본 관헌의 검열에 통과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변에 위험이 따를 것이니, 때를 기다리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실망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선생의 충고는 당연한 것이었고, 또 시집 출간을 서두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집 출판을 단념한 동주는 1941년 11월 29일에 '간(肝)'을 썼다. 작품 발표와 출판의 자유를 빼앗긴 지성인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노여움이 가라앉으면서 1942년 1월 24일에 차분히 '참회록'을 썼다. 어쩌면 이것이 고국에서의 마지막 작품이었을지도 모른다. 1942년,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그는, 이듬해인 1943년 7월에 독립 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 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조국광복을 불과 반 년 앞둔 1945년 2월 16일, 감옥 안에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원통하게 눈을 감았다.

    이제, 동주는 세상을 떠나고 없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즐겨 외는, 그의 대표작 '별 헤는 밤'의 끝 넉 줄은, 단순히 시구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그의 고향인 북간도 용정에 있는 동산 마루턱에 묻힌 그의 무덤 위에는 이 봄에도 파란 잔디가 자랑처럼 돋아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주는 멀리 북간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 속에 배어 있는 겨레 사랑의 정신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정병욱. 국문학자(1922~1982). 호는 백영(白影).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내면서 고전문학의 여러 분야를 두루 연구하였으며, 특히 판소리 연구에 업적을 쌓았다. 저서에 <국문학산고(國文學散藁)>, <시조문학사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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