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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양 거창의 선비문화
    문화 culture/유교문화 Confucian culture 2022. 5. 3. 22:31

    함양 화림동계곡. 예로부터 좌안동 우함양이라 할만큼 함양은 안동에 버금가는 선비의 고장이다. 일찍이 묵향의 꽃이 피어 사대부들의 학문과 문화가 만발했고, 안의삼동(安義三洞)이 위치하고 있다. 안의에서 장수 방향으로 난 육십령 고개를 거슬러 올라가는 화림동계곡에서 요산요수하며 음풍농월을 즐겼다. 팔정팔담(八亭八潭)나 지금은 거연정(居然亭), 군자정(君子亭), 동호정(東湖亭)만 남아 있다.

    거연정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지개다리 즉 홍교(虹橋), 화림교, 오교(吳橋, 아치형 다리)를 건너야 한다. 중층으로 된 누각 형태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내부는 1칸의 판방을 갖춘 유실형(有室形) 정자다. 굴곡이 심한 천연 암반 위에 기둥을 세웠다. 자연에 순응하는 정신과 자연친화적인 건축술과 별서정원의 전통적 형식인 계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명승 86호.

    화림재전공유허비. 옛 안의현 서쪽 화림동에 새들마을이 있으니 임천이 그윽하고 깊으며 산수가 맑고 아름답다. 화림재 전공이 세상이 어지러워 이곳에 은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거연정 현판.

    어느 정자엘 가든 문인들의 현액이 주렁주렁하다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동 정원처럼 조성한 것이 계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원의 원형은 정자다. 별서는 본래 소박한 정자로 거연정이 계원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거연정 입구 푼지나무.  노박덩굴과의 푼지나무는 줄기에 작은 가시가 있고 잎에 톱니가 자잘하여 털처럼 보이며 탁엽이 갈고리모양으로 변하고 수꽃은 흰색에 가깝고 열매껍질이 연노랑색이다. 노박덩굴은 줄기에 가시가 없고 톱니가 크고 둔하며 탁엽이 없고 수꽃은 녹색이 강하고 열매껍질이 진노랑색이다.

    거연정(居然亭)  /  주자(朱子)

    琴書四十年(금서사십년) 거문고와 함께 책 읽기 사십 년을 하였더니,

    幾作山中客(기작산중객) 거의 산중의 나그네가 되었구나.

    一日茅棟成(일일모동성) 하루 만에 띠 집을 지을 수가 있으니,

    居然我泉石(거연아천석) 그렇게 나는 샘과 돌과 함께 사노라.

    *주자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

     

     

    화림동계곡 군자정, 조선 5현인 일두 정여창의 처가가 있는 봉전마을이다. 남계천 건너 영귀대에 와서 머물던 맞은편에 정선전씨 입향조 화림재 전시서의 5대손인 전세걸 전세택이 선생을 기리기 위해 1802년 암반위에 세웠다. 해동군자가 쉬던 곳이라 해서 군자정이라 하였다.

    군자정은 거연정 하류쪽 15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나 정면의 주칸을 5자, 측면의 주칸을 4자 정도로 잡아 규모는 작다. 하천내 자연암반에 조성된 정자 건물로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며, 건물의 입면비례가 적절하며 조선후기 정자건축에 대한 학술적 가치가 충분하고 보존상태 양호하여 경남문화재자료 제380호.

    영귀대와 영귀정. 詠歸(영귀)는 공자가 제자들의 포부를 물었는데 증점(증자의 부)만이 ‘늦은 봄옷을 갈아입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고 싶다’는 대답에 공자도 ‘나도 증점과 같다’고 했다는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君子亭(군자정)과 詠歸亭(영귀정) 사이를 흐르는 남계천.

     

     

    화림동계곡 동호정(東湖亭), 동호정은 경남 문화재자료 제381호. 화림동 계곡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고 추녀 네 귀에 세운 활주가 시원하고, 2층 누마루의 조망도 탁 트여 좋다. 임란 때 선조의 의주 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東湖) 장만리(章萬里, 고려 때 송나라에서 귀화한 장종행(章宗行)의 후손)를 기리기 위하여 9대손 가선대부겸오위장(嘉善大夫兼五衛將) 장재헌이 1895년 건립한 정자이며, 1936년에 중수가 있었다. 바위에 ‘장처사가 낚시를 하던 곳 章處事釣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세워진 한 동으로 된 중층 누각으로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배면의 중앙칸을 막아 구성한 판벽이 남아 있는데, 거연정과 마찬가지로 방을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81호.

    동호정 현판

    동호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세워진 단동의 중층 누각건물이다. 내부에는 배면의 중앙칸을 막아 구성한 판벽이 남아 있는데, 거연정과 마찬가지로 방을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면의 좌측으로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을 두어 누로 오르게 하였고, 4면 모두 기둥의 바깥쪽으로 약 30cm 정도를 연장하여 계자난간을 둘렀다. 마루는 장마루가 깔려 있는데 원래는 우물마루였다.

    정자 천장에는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눈에 띄는 것은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있는 용의 조각이다. 보통 용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데 이곳의 용은 물고기를 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단에는 공자의 일대기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차일암이라는 암반 바위와 짙푸른 숲, 여유 있게 흐르는 물줄기가 평온한 기운을 내뿜는다. 정자에 올라 바라보는 물과 너럭바위와 물 건너 숲의 풍경이 한가로우면서도 풍요롭다.

     

     

    함양 농월정(弄月亭) 조선 중기 학자인 안의출신 지족당 박명부(知足堂 朴明榑,1571-1639)가 광해군때 영창대군 죽음과 인목대비 유배에 대한 부당함을 직간하다가 파직되어 낙향 은거하면서 서당을 짓고 심신을 수련하였다. 인조반정후 예조참판과 강릉도호부사를 역임하고 1637년 농월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농월정 건물은 중수를 거쳐 1899년 건립였으나 2003년 화재 이후 복원하였다. 정자 오른쪽 암반에 지족당 장구지소(杖屨之所)라는 글씨를 새겼다. 달밝은 고요한 밤 암반위 냇물에 비친 달빛은 한 잔의 술로 달로 희롱한다는 선비들의 풍류와 멋을 함축하고 있다.

    농월정 입구에 소박하기 그지없는 큰꽃으아리가 때마침 불어오는 봄바람에 가는 몸을 맡기고 있다. 괴불주머니는 머리가 무거워 자꾸만 숙여진다. 땅에 납작 기어붙은 뱀딸기에게는 완전히 남의 일이다. 

     

    농월정 /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榑, 15711639)

     

    路傍誰識別區幽 (로방수식별구유) 길 곁에 그윽한 별천지가 있는 줄 누가 알리

    山若盤回水若留 (산약반회수약류) 산은 구비 구비 도는 듯 물은 멈춰 있는 듯

    暎砌池塘澄更滿 (영체지당징갱만) 섬돌을 비추이는 월연의 물 맑고도 그득하고

    撲窓嵐翠捲還浮 (박창람취권환부) 창에 드리운 푸른 남기 걷혔다 비췄다 하네

    兒飢不慍饘糊口 (아기부온전호구) 아이는 굶주려도 쪼들린 가난에 성내지 않고

    客至寧嫌屋打頭 (객지녕혐옥타두) 손이 이르러 천장에 머리가 부딪힌들 저어하랴

    莫道散人無事業 (막도산인무사업) 하는 일 없는 한가한 사람이라 말하지 마소

    晩專邱壑亦風流 (만전구학역풍류) 늘그막에 산골짝을 차지한 것 또한 풍류라오

     

     

     

    함양 종담서당(鐘潭書堂) 조선중기 지족당(知足堂)박명부(朴明榑, 15711639)가 후학양성했던 강학소이다. 농월정에 그의 시판이 걸려 있다. 서당의 정문과 대문채가 二 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고 정당은 정면3칸 측면 1.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위에 까치박공(ㅅ자 널판지)이 달린 삼각형 벽이 있는 지붕이다. 기단은 자연석을 1-2단으로 쌓고 초석은 자연석을 올렸으며 사각형태의 기둥을 혼용하였다.  조선시대 사설 글방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당시 교육문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잇는 귀중한 문화재여서 경남문화재자료 640호.

     

     

    안의 광풍루, 조선 태종 12년(1412)에  현감 전우(全遇)가 건립한 선화루(宣化樓)를 세종 7년(1425)에 지금의 옮겨왔다. 성종 25년(1494)에 정여창이 중수하며 광풍루(光風樓)라 불렀다. 정유재란(1597)시 소실된 것을 선조 34년(1601) 복원하고, 숙종 9년(1683)에 다시 지었다. 1980년에 정비하였다.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겹처마건물로 학사루(學士樓), 함화루(咸化樓)와 함께 함양의 3대 누각으로 꼽힌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92호.

    광풍루엔 역대 현령들의 공덕비 송덕비가 즐비하다.

    광풍루 앞을 흐르는 금호강(錦湖川)에 오리나무숲과 반영이 장관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동계 정온종택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단정하게 마주친 동계 정온 종택 사랑채. 정온(1569~1632)의 생가를 1820년에 중창하였다. 남향한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이며, 정면 6칸, 측면은 2칸 반이고, ㄱ자로 꺾여 나온 내루(內樓)부분이 간반(間半) 규모이다. 이 집에서 주목되는 점은 두 줄로 된 겹집이며 전퇴를 두었다는 것과 내루에 눈섭지붕이 따로 만들어졌다. 학술적 가치는 집 전체의 평면구성에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05호.

    난간 아래 뜨락에 나란히 진열된 화분이 정갈하다

    동계 정온고택 안채는 사랑채 뒤곁 남향인데, 정면 8칸, 측면 3칸 반의 전·후퇴가 있는 두 줄의 겹집으로 사랑채의 평면구성과 함께 주목된다. 거창은 남쪽지방인데도 북쪽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겹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안채나 사랑채는 기단이 낮은 반면 툇마루가 높게 설치되어 남쪽지방의 특색을 갖추고 있다. 안채로 들어가려면 사랑채 좌측의 중문을 통하도록 되어 있고 중문채는 3칸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네모의 안뜰인데,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내정 좌우로 각각 부속건물이 있다. 서쪽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큼직한 곡간이 있다. 곡간 뒤편에 화장실. 마당 동쪽에 서향한 뜰 아래채가 있는데 4칸 집이다. 사당은 안채에 있는데 3칸 집이다. 7동(棟) 규모가 큰 기와집들이 부재도 넉넉하면서 장대하고 훤칠해 보인다. 

    육백년된 집인데 300년째 살고 있다는 팔순의 15대 종손께서 친절한 해설을 해주신다. 

     

     

    정온종택 담장너머는 반구헌이다. 반구헌(反球軒)은 조선말 영양 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鄭夔弼)이 기거하던 주택이다. 야옹은 청백리의 덕행으로 명망이 높았으나 사직 후에 재산과 거처가 없자 당시 안의 현감의 도움으로 반구헌을 1870년대에 세웠다. 자신을 뒤돌아보고 반성한다는 뜻의 반구어제심(反求於諸心)에서 유래한다. 반구헌이라 불리는 사랑채는 팔작기와지붕에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의 건물이다. 이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대청이 중앙에 있지 않고, 규모가 1칸인 반면에 방이 3칸이다. 측면 1칸에 난간을 두룬 누마루까지 있다. 따라서 건물 후면 중앙에 아궁이를 설치하여 방 2개를 한 곳에서 난방하도록 평면을 구성하였다. 민도리집으로 단순소박한 구조지만 전체적으로 사대부가의 품격을 엿볼 수 있다.

     

     

    거창 세익스피어 동상. '이 세상은 하나의 무대요, 모든 인간은 제각각 맡은 역할을 위하여 등장했다가 퇴장해버리는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뜻대로 하세요>의 대사 중, 거창국제연극제(Geochang International Festival of Theater, KIFT)가 1989년부터 매년 7,8월 사이에 개최된다. 2012년 정무길 작품이다.

     

     

    거창 구연서원 관수루(居昌龜淵書院觀水樓)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422호.

    구연서원 1694년(숙종 20)에 지방유림이 신권(愼權)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자를 가르치던 구주서당(龜州書堂) 자리에 짓고 위패를 모셨다. 후에 성팽년(成彭年)과 신수이(愼守彛)를 추가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아직 복원되지 않고 있으며, 서원 터에 황고신선생사적비와 석곡선생유적비,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가 남아 있다. 산고수장(山高水長, 산처럼 높고 물처럼 장구하다)은 덕행이나 지조의 높고 깨끗함을 비유한다. 중국 송(宋) 범중엄(范仲淹)의 〈동려군엄선생사당기(桐廬郡嚴先生祠堂記)〉에 나온 말이다. 엄선생은 후한 때 은사(隱士)인 엄광(嚴光)으로, 동한(東漢)을 개국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친구였다. 광무제가 즉위후 벼슬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며 평생을 보냈다.

    구연서원에서 건너다보이는 요수정과 수승대

     

    암구대岩龜臺,장마때 북상의 거북이 떠내려와 이곳을 지키던 거북과 싸움에 져서 죽어 바위로 변하여 암구대가 되었다. 구연서원지에 기록된 월성계곡 14경은 연하굴, 장주갑과 반타석, 용우암과 원타굴, 연반석과 사담, 구룡폭과 용반, 자고암과 약어담, 남정, 연암, 사암, 자암과 무오동암, 별암,)욕기암과 풍우대, 석송, 변계천이다.

    수승대 7명소는 연하굴(煙霞窟), 장주갑(藏酒岬)과 반타석(盤陀石), 용우암(龍羽巖)과 원타굴(黿鼉窟), 연반석(硯磐石)과 사담(蛇潭), 세필짐(洗筆㴨), 구룡폭(九龍瀑)과 용반(龍盤)을 이른다. 바위에 모두 새겨져 있는데 하나하나 찾아볼 요량이면 몇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수승대 역사, 화림지(花林誌)에 병마사 척암 성윤동이 계단 층대를 만들었다. 암구대 북쪽 바위 암면에 척암성공(滌菴成公) 축단대상(築壇臺上) 방천대하(防川臺下)라는 석각문이 새겨 있다. 수승대 북쪽 암면에 퇴계와 갈천의 시 및 갈천장구지대(葛川杖屨之臺, 갈천이 지팡이 집고 신발 끌던 곳),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 퇴계가 이름 지어준 곳) 옆에 1810년 군수 한복연이 새겼다는 기록이 있다. 암구대의 동쪽에 요수선생(樂水先生) 축단대상(築壇臺上) 방천대하(防川坮下), 반대편에 척암 성윤동이 새긴 각과 같은 내용이다. 서편에는 요수장수지대(樂水藏修之臺, 요수가 큰 뜻을 품고 숨어서 수행한 곳). 암구대에서 떨어진 곳에 요수음영지대(樂水吟詠之臺, 요수가 시와 노래를 읊은 곳). 관수루(觀水樓) 옆 바위에 요수신선생장수동(樂水愼先生藏修洞)과 욕기암(浴沂岩), 요수정(樂水亭) 앞 바위에 영귀정(詠歸亭)이 새겨져 있다.

    나제접경지대인 원학동계곡이며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본래 수송대(愁送臺)였는데 퇴계 이황이 요수 신권에게 수승대(搜勝臺)로 개명할 것을 권유하였다. 요수선생이 축대를 쌓아 만든 섬에 소나무를 심고 石松(석송)이라 새겼다. 그가 요산요수하던 요수정이 맞은 편에 보인다.

    수승대 구연교

    요수정(樂水亭), 수승대 맞은 편에 요수 신권(愼權, 1501-1573)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1542년 구연재와 척수대 사이에 건축하였으나 임란시 소실되어 1805년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겨지었다. 요수는 구연서원에 배향되었다. 정면3칸 측면2칸의 규모인데 자연암반을 초석으로 이용하고, 정자마루는 우물마루 형식이며 사방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종보가 있는 오량가구는 짜임이 견실하고 네 곳의 추녀에는 정연한 부챗살 형태의 서까래를 배치하여 세부장식의 격조 있는 양식이 반영되었다. 특히 추운 산간지역을 반영하여 내부에 방을 놓는 등 거창지역의 대표적 건축문화재로서이 가치가 있다. 경남유형문화재423호.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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