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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자고택(宋子古宅)
    문화 culture/역사 전통 history tradition 2025. 4. 7. 21:56

    송자고택(宋子古宅), 조선 효종 4년(1653)에 세운 집이다. 송시열은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평생 주자학 연구에 몰두하여 율곡 이이의 학통을 잇는 기호학파의 주류였다. 대전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송자고택은 현재  공원조성 중이어서 접근이 불가하다. 송자(宋子)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을 가리키는 바, 우암사적공원 내 장판각에 보관중인 송자대전판(宋子大全板)은 그의 문집과 연보 등을 모아 만든 『송자대전』의 목판으로 총 11023판에 이른다. 대전유형문화재 1호이다.

     6세까지는 외가인 이원 구룡리 (九龍里)에서 자라고, 회덕으로 나와 동춘당 송준길과 함께 공부하여 163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잠깐 벼슬을 하다가 1637년 병자호란이 끝나면서 귀향하며 지낸 곳이다. 1649년에 효종이 불러 사헌부에서 일하다가 사직하고 다시 귀향한다. 1653년에 이조참의를 거쳐 1658년에 이조판서가 된다. 이후 55세인 현종 7년(1661)까지 이 집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효종이 독대를 청해 북벌을 논의했다. 예송논쟁을 거치면서 서인의  우두머리가 되고, 1671년 우의정에, 1673년에 좌의정에 봉해진다. 예송논쟁이 재연되어 1675년 함경도 덕원(德源)을 시작으로 유배생활을 한다. 숙종이 즉위하면서 영중추(領中樞)로 복직했다. 1683년에 낙향했다가 정계에서 은퇴하여 청주(淸州)의 화양동(華陽洞)에 은거하였다. 1689년 장희빈 아들 균의 왕세자(훗날 경종) 책봉에 반대하여 제주로 유배되었다. 남인들이  심문을 하자고 불러들여 한성부까지 와서 사사(賜死) 되었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정치적으로 파란만장한 삶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기론(理氣論)과 사단칠정(四端七精)은 조선의 주자라는 뜻으로 송시열의 제자와 문도들은 송자(宋子)라 높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사진은 문화유산청에서 차용.

    대덕구 중리동 115 소재한 송애당(松崖堂)으로 달려 갔다. 대전 유형문화재 제8호. 조선 효종때 충청관찰사를 지낸 송애당 김경여(金慶餘, 1597-1653)가 병자호란 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1640년(인조18)에 지은 별당(別堂)이다. 그는 "눈서리를 맞아도 변치않는 소나무의 우뚝 선 언덕의 굳센 기상을 간직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높은 기개와 충성심을 마음에 담고자 건물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건물의 크기는 앞면 3칸, 옆면 2칸에 팔작(八作)지붕을 올렸으며, 이곳에서 당시의 유명한 학자들과 학문을 닦았다. 인근의 동춘당, 쌍청당, 제월당 등과 함께 이 고장 별당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야산을 배경으로 한 서남향집이다. 제월당 답사까지 계획하였으나 날은 춥고 시간이 부족해 훗날을 기약한다.

    언제 심었는지 밑동부터 우산처럼 가지를 펼친 장수매(長壽梅, Chaenomeles lagenari a  'Chojubai')가 참 이쁘게도 벌었다. 일본 원산의 풀명자나무(Chaenomeles japonica)의 원예품종이다. 열매의 생약명은  목과(木瓜이다. 

    송애당을 먼저 둘러보고나면 데크가 나 있는 오른길을 뿌리치고 잔디길인 왼길로 접어들면 쌍청당 뒤꼍을 돌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담장은 철조망이 얹혀 있고 사유지 무단침입을 경고하는 현수막이 봄바람에 펄럭인다.  언잖아하는 기분을 안채 지붕을 덮다시피한 지목련이 어루만져 준다.

    자목련 향이 멀리 가지 않고 측벽을 따라 내려온다. 공간이 좀 있는 둔덕에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알맞게 달아나고 만다. 하늘이 시샘을 하는 거다.

    까치발을 서서 앞쪽 담장을 기웃거리면 꽃샘추위에 상처를 입은  백목련 이파리를 피해 쌍청당 송선생유적비와 쌍청당(雙淸堂) 건물이 지붕만 살짝 드러난다. 대전 유형문화유산 2호구나. 쌍청당(雙淸堂)이란 당호(堂號)는 려말선초에 송유(宋愉, 1388~1446)의 호(號)를 따서 지었는데 '청풍(淸風)과 명월(明月)의 맑은 기상을 마음에 품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12세에 부사정이 되었는데, 13세에 신덕왕후 강씨가 붕어 한 뒤 위패가 태조묘에 부(附)해지지 않자 이를 한탄하는 글을 지어 올리고 관직을 버렸다. 이후 고향 회덕으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 조그만 정사를 지어 난계(蘭溪) 박연에게 청하여 雙淸堂이라 편액하고 필연(筆硏)과 금기(琴碁)로 여생을 보냈다. 이 때문에 후인들이 쌍청처사(處士)라 부르기도 하였다.송유가 회덕 배달촌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송촌(宋村)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그의 묘표는 판암동 쌍청회관 입구에 세웠다. 은진송씨대종가인 쌍청당 당호는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이 지었다. 당의 추녀 밑에 있는 현판은 송담 송남수의 글씨이며, 당 안에 걸려있는 편액은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글씨이다. 지금의 건물은 2001년 9월 26일 준공한 것이다. 

    솟을대문은 수재문(修齊門)이다. 

    예나 지금이나 대문은 굳게 잠겨 있고 전자 자물쇠로 채워졌는데 안에 인기척이 있기에 부르니 나이 지긋한 노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현액이 원일당(源一堂)이라 보이는데 사랑채의 당명(堂名)이고 이는 송준영이 썼다. 쌍청당 송유의 후손된 모든 사람들은 지금은 촌수가 멀어졌고, 사는 곳이 다르긴 하지만 근원이 하나임을 깨달아 서로 화목하고 단결해서 문중의 발전을 이룩하자는 뜻에서 원일당(源一堂)이라고 한 것이다.

    삼문에서 왼편 측벽을 따르니 절우당터(節友堂址) 임을 알리는 석비가 오죽밭을 끼고 앉았다. 절우당은 송세협이 이곳 인근에 처음 세운 후 쌍청당 송유의 5대손 절우당 송남수(1537-1623)가 1664년(명종19)에 고쳐 지으면서 이름하였다. 이는 주변에 매송죽국을 심고 계절마다 그 절개를 벗삼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절우당 내에는 이화정, 상주정 등 정자도 지었다고 전한다. 이 절우당은 송남수 묘역이 있는 이사동 한옥마을에 옮겨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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