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송 주왕산(周王山)풍경 landscape 2024. 11. 9. 20:26
주왕산 내력이 길다. 높이 722.1m에 풍광이 뛰어나고 계곡이 깊다보니
은둔자들과 선사가 많이 살았다 하여 대둔산(大屯山).
바위로 둘러싸여 석병산(石屛山), 병풍산(屛風山).
신라 선덕여왕 때 무열왕계의 김주원(金周元)이
상대등 김경신(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피신 와서 주방산(周房山).
고려의 고승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惠勤,1320~1376)선사가 이곳에서 수도할 때 주왕산.
또한 진나라 때 복야상서를 지낸 주의의 팔대손(孫) 주도(周鍍)가 진나라를 재건하겠다고
장안으로 쳐들어갔다가 패하여 신라의 석병산에 도망왔으나 마일성 상장군에게 토벌된 이후 주왕이 머문 산이라 하여 주왕산...
길목에 대전사(大典寺)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12년(672)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보광전(普光殿)은 보물 제1570호로 1976년 중수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여 그 건축년대(1672년, 강희 11년 임자 5월초 119일, 현종 13년)가 밝혀져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조선 현종 13년(1672)에 중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괴한 사람 같이도 보이는 시루봉의 어디가 떡을 찌는 시루를 닮았단 말인가. 한 도사가 시루봉 꼭대기서 도를 닦고 있는데 신선이 와 불을 지펴주었다는 있고, 바위 밑에서 불을 피우면 그 연기가 바위를 감싸면서 봉우리 위로 치솟는다나 뭐래나.
주왕산 제1폭포 용추폭포(龍湫瀑布, 용이 폭포에 살다가 하늘로 승천한 웅덩이) 높이 320m 지점에 3단 폭포로 이루어져 있다. 1단 폭포와 2단 폭포는 낙수 폭 약 2m, 낙차는 약 2m이며, 3단 폭포는 낙수 폭 약 2m, 낙차는 약 5m 이다. 폭호(瀑壺)는 구룡소라 불린다.
학소대(鶴巢臺), 청학과 백학 한 쌍이 둥지를 짓고 살았다는데, 어느날 백학이 사냥꾼에 잡혀 짝 잃은 청학이 슬피 울며 바위를 배회하다가 자취를 감추었단다. 절벽 위에 둥지가 남아 있다나 뭐라나.
급수대 주상절리(汲水臺柱狀節理), Geupsudae Columnar joint.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지질명소. 등산로 옆의 기반암(응회암)에서 화성활동(火成活動)에 의한 수직절리와 피아메(fiamme, 응회암 노두에서 나타나는 렌즈 모양의 흑요석 결정체)도 관찰된다. 신라 37대 선덕왕이 후손 없이 죽자 무열왕의 6세 손인 김주원(金周元)이 차기 왕으로 추대된다. 왕으로 추대된 김주원이 궁으로 향하던 중 홍수를 만나 입궐이 지체되자 상대등 김경신(金敬信)이 먼저 입궐해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 이에 김주원을 지지하던 귀족들이 김주원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고 위협을 느낀 김주원은 주왕산으로 피신해 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때 김주원이 절벽 위에 대궐을 짓고 식수를 얻기 위해 두레박으로 계곡의 물을 퍼 올렸던 곳이 급수대이다. 주방천 계곡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암절벽이다.
구암 각자-주방동천(周房洞川) 문림천석(文林泉石) 즉 빼어난 산수의 주왕산과 물과 돌은 문림랑의 것이란 뜻이다. 문림은 고려시대 문림랑위위시승 벼슬을 지낸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를 칭하는 것으로 청송심씨 봉토 완문표석이다. 암벽 글씨 아래 끼워 넣은 사각의 표석은 상단 암벽에 새겨진 큰 글씨에 대한 유래를 설멍한 것으로, 청송심씨 종유사 심호창과 심호택이 주방천 자연석에 주방동천(周房洞川) 문림천석(文林泉石)의 원석이 파손되어 1990년 5월에 당시 종유사 심완택, 심상일이 이 바위에 옮겨 새겼다는 기록이 있다.
주왕산성(周王山城)은 상의리의 주왕산국립공원 내에 있는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퇴뫼식의 석축 산성이다. 청송군의 여러 산성 중 유일하게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는 산성이다. 정유재란 때 의병항쟁 활동지로 박성(朴惺)이 청송 주왕산성 대장(周王山城大將)이 되어 활약하였다. 이명 주방산성(周房山城), 자하성(紫霞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주왕 전설에 따르면 본래 주왕산(周王山)[720.6m]은 기암괴석이 병풍 같다고 석병산(石屛山)이었다. 그런데 당(唐)의 주도(周鍍)라는 인물이 주왕을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후 주왕산으로 숨어들었다. 신라는 당 황제의 명을 받아 주왕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신라와의 전투로 주왕이 주왕산에서 비운의 최후를 맞았다고 하는데, 이때부터 주왕산이라 불렀다.
부채마
周王殿故基
周王殿故基(주왕전고기) / 鶴峰 金誠一(학봉 김성일, 1538~1593)
披草尋行闕(피초심행궐) 풀숲을 헤치며 (옛)주왕 궁궐(터)을 찾노라니
山椒落日低(산초낙일저) 지는 해 산마루에 낮게 걸려있네
階平已無級(계평이무급) 계단은 무너져 이미 층계(흔적)는 사라져 버렸구나
瓦解半成泥(와해반성니) 기와는 깨어져 반 쯤 흙이 되었는데
制陋非堯殿(제루비요전) 규모는 초라하여 (벼슬)높은 사람 (살던) 집은 아닌 듯 하고
林深是鳥棲(임심시조서) 숲은 깊어 산새들 서식지 되었구려
興亡千古恨(흥망천고한) 흥망은 천고의 한이 되어
長嘯過溪西(장소과계서) 길게 휘파람 불며 서쪽 계곡을 지나가네.
* 披 헤칠 피, 椒 산초나무 초, 산꼭데기 초, 級 계단형태 층 급, 堯 높을 요, 嘯 휘파람불 소.
주왕산 운해 /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共憑西嶺望仙鄕 (공빙서령망선향) 서산 마루에 함께 올라 신선 고을 바라보니
雲外千峯吐劍鋩 (운외천봉토검망) 일천 봉우리 구름 위로 삐죽삐죽 드러나네
願借惠連詩筆健 (원차혜련시필건) 바라는 건, 혜련의 훌륭한 시작 솜씨 빌려
片時收拾入奚囊 (편시수습입해낭) 잠시 시 주머니에 거두어 넣는 것이라네
*憑; 기댈 빙, 鋩; 서슬 망,
*惠連; 중국 6조(六朝) 때 남송의 시인 사영운(謝靈運·385~433)의 친족 동생으로 시를 잘 지었다. 李白(이백)이 '春夜宴桃李園序(춘야연도리원서)'에서 자신의 동생들을 사혜련에 비견하고 자기는 낮춘데서 유래한다. 즉 '群季俊秀, 皆爲惠連(군계준수 계위혜련) 吾人詠歌, 獨慚康樂(오인영가 독참강락), 여러 아우들의 뛰어남은 사혜련과 같은데, 내가 읊는 노래만이 강락후에 부끄러울 뿐이네'. 康樂은 사영운의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