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k8837 2020. 8. 20. 14:50

주홍거미 일종

 

 

거미 / 이은봉

 

 

거미는 외로운 황제다 숲가에 쳐놓은

그물에 걸리는 먹이만 골라 먹는다

이슬이 내려 그물이 젖기라도 하면

중천에 해가 오를 때까지 그는 굶는다

오래 굶어야 하는 마음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위해

거미는 저 혼자 줄 타는 재주를 부리기도 한다

그물에 걸려 있는 이슬방울들

활활 털어낼 줄 모르는 거미!

날개가 없어 그는 땅벌처럼 날지도 못한다

개미처럼 튼튼한 발과 이빨을

갖고 있지도 못한 거미!

거미는 깡통을 들고

먹이를 얻으러 길 나서지도 못한다

먹이를 찾으러 길 나서지도 못한다

너무도 게을러빠진 거미!

굶어죽어도 자존심을 잃을 수 없는

거미의 목덜미에는 커다란 혹이 달려 있다

거미는 혹이 커다란 아바이 동지다

가깝고도 먼 나라의 슬픈 황제다.

 

 

―《서정시학2007년 겨울호